“엉덩짝 하나는 크구나. 어느 사내놈 녹이려고⋯”
형주가 그녀의 히프를 밀어주며 농을 걸었다. 그녀의 히프가 거의 빠져 나가자 이번에는 그녀의 허벅지를 슬슬 만졌다.
“이 손 치워욧”

정자가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쉿!”
밖으로 나온 여자는 일순 당황하고 말았다. 어두운 방에서 그대로 나오는 바람에 여자는 걸치고 있는 것이라고는 헐렁한 슬립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황한 그녀는 들창으로 다시 발을 들이밀었다.
“뭐하는 거야?”

낮은 소리로 형주가 여자를 탓했다.
“속에 아무것도 입은 게 없단 말이에요.”
그녀는 그 말을 하면서도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이른 시각이라 지나다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자.”
형주는 정자의 발을 다시 밀며 점퍼를 벗어 내밀었다.
“이것 갖고는 안 돼요.”
정자는 일단 점퍼를 팔에 꿰면서 말했다.
“가만 있어 봐.”

형주는 벌써 몸을 내놓고 있었다.
“좀 끌어당겨.”
들창은 형주의 몸이 드나들기에는 작은 편이었다. 정자는 주위를 힐끔힐끔 살피면서 형주를 끌어당겼다. 건물 뒤로 몸을 일단 숨겼다.

“이게 뭐예요?”
정자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점퍼 밑으로는 슬립의 레이스가 빠져 있었고 정자의 늘씬한 다리에는 새벽 추위로 닭살이 돋아 있었다.
“이걸 입어.”

형주는 어느 결에 준비를 한 것인지 가방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그 속에서 바지를 하나 꺼내 주었다.
“맞을는지 모르겠어. 아마 좀 클지 몰라. 내가 입히려고 산 거야. 작으면 큰 일이니까 큰 걸로 샀어.”

형주는 들창을 다시 맞춰 끼우며 말했다.
‘용의주도한 남자야.’
정자는 경탄스런 눈초리로 쭈그리고 앉아 끼우고 있는 형주를 바라보았다. 슬립을 입은 채 바지를 입으니 모양이 말이 아니었지만 그런 것을 투덜거릴 수는 없었다.

“어디로 갈 작정이야? 최 부장하고 곰보가 찾느라 눈이 벌건데.”
형주는 대꾸 없이 정자를 잡아 끌었다. 마침 지나가는 택시가 있었다.
“인천!”
형주는 차를 타자 인천으로 가자고 했다. 기사가 돌아보았다.
“인천은 곤란헌디요. 역까지만 가시지요?”

“5만 원을 드리지요.”
“그렇다면 또 얘기가 다르지요.”
기사는 갑자기 공손해지며 핸들을 잡았다.
‘야반도주라도 하는 애인들인가베?’

기사는 그 정도로 생각한 듯 두 사람을 백미러로 넘겨다보았다. 정자는 그제서야 추위와 두려움을 느꼈다. 형주의 팔에 꼭 안겨들었다.
“아저씨, 이 차 왜 이렇게 추워요?”
“금방 차고에서 나왔기 땀세 그렇죠.  쬐깐만 있으면 훈훈해질 겁니다.”
운전사가 거세게 액설러레이터를 밟았다.

“형주 씨⋯”
정자는 다시 형주를 바라보며 말했으나 형주는 손가락을 그 녀의 입술에 갖다 대었다.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얼마 가지 않아 차 안이 훈훈해지자 그녀는 졸음이 쏟아졌다.
‘이런 위급한 순간에 졸리다니 나도 참 웃기는 여자야.’
정자는 그런 생각과 함께 잠에 빠져들었다.

“다 왔어, 일어나.”
정자가 비몽사몽간에 깨어난 곳은 부둣가였다. 비릿한 바다내음이 전해져 왔다.
“여기가 어디야?”
낯선 풍광에 정자는 어리둥절해졌다.
“인천으로 가자고 한 소리 못 들었어?”
“그건 들었지만⋯”

“그치들이 찾지 못할 지역으로 도망칠 거야.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어. 그리고 배를 타려는 거야.”
그 말은 정자에게 침묵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좋아, 우린 신혼행 온 걸로 해 두지 뭐. 하지만 배고프다, 형주 씨.”
형주는 그녀의 투정을 웃으며 바라보았다. 화장을 안 한 그녀는 새로운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했다. 늘 전등불 밑에서 술잔을 들고 보던 모습과는 아주 딴판이었다.

“정자, 몇 살이지?”
“진짜 나이?”
형주는 고개만 끄덕였다. 점퍼도 없는 셔츠 차림에 커다란 가방만 어깨에 멘 형주의 모양은 왠지 쓸쓸하게 보였다.
“스물다섯. 나이로 치면 한물갔지. 꺾어진 오십이니.”
그러다가 정자는 갑자기 생각난 듯 화들짝 놀라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형주 씨 큰일 났어. 나 핸드백을 안 가지고 왔단 말야.”
형주는 히죽이 웃으며 말했다.
“악어가죽 핸드백으로 사줄 테니 아까워하지 마.”
“바보야, 거기 주민등록증이 있단 말야. 그게 없으면 배를 못 타잖아.”
“뭐?”

형주도 그 말에는 난감한 모양이었다.
“그래, 주민등록증이 없으면 배를 못 타지. 하지만 그것도 다 수가 있을 거야.”
“어쨌든 진짜 배고프다. 거기다가 춥고. 우린 돈까지 없으면 진짜 거지 중의 상거지야.”

“걱정 말어. 곧 등 따시고 배부르게 해 줄 수 있으니까.”
“등 따시고 배부르게?  그러면 애 하나 업고  9개월 된 임신부가 되는 거라던데? 난 그렇게 되고 싶지 않은데⋯ ”

가을 바다 바람이 정자의 앞 이마를 스쳤다. 머리카락이 날렸다. 형주가 그것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 보기 흉하지? 머리 정리도 못하고 나왔으니⋯ 아무튼 나 뭐 사달란 말야.”
정자는 형주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들은 부둣가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많은 음식점 중에 꼭 한 집이 문을 열었다.

“따뜻한 방 있어요?”
정자가 들어서면서 물었다.
“이 쪽으로 오세요. 배 타러 나오셨군요. 아직 한 시간은 있어야 할 텐데⋯”
“배 타러 왔냐구요? 맞아요. 따뜻한 방에서 배 좀 타려고. 후후후⋯”
형주의 농에 식당 아줌마가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다가 두 사람의 아래 위를 훑어보고는 함께 웃었다.

두 사람은 방으로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정자가 형주의 팔을 꼬집었다.
“창피하게 무슨 농담을 고따위로 하는거야?”
“아야야⋯”
형주가 비명을 지르면서 정자를 껴안았다. 그리고 다짜고짜 방바닥에 쓸어트렸다.

“왜 이러는 거야?”
“가만있어 봐. 배 타려고 그래..”
형주가 그녀의 사타구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정말 아무 것도 안 입었네.”

8. 음모가 이루어지는 곳

오명자가 송희를 만난 곳은 종로의 ‘카펜터’라는 커피숍이었다.
여고시절에 선도부 선생님들을 피해 가끔 들르던 곳 이다. 의자도 낡고 탁자도 몇 개 없는 조그만 다방이었다. 명자는 낡은 홀의 벽을 쳐다보며 철없던 학창 시절을 떠올렸다.

“왜 방태산의 일을 도와주고 있니?”
송희는 차 주문을 하기가 무섭게 오명자에게 말을 걸었다.
“먹고살기 위해서지.”
송희의 살기등등하던 눈빛도  이제는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얼굴은 퍽 수척하게 보였다.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네 남편은 아직⋯ ”
“그 무능력자 이야기는 하지도 마.”
“그렇구나.”
송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부탁을 하나 할게.”
오명자는 계속 불안한 마음을 씻을 수가 없었다.
“사실 내 남편도 그곳에서 출마를 할 예정이었어.”
“그곳?”

“그래. 방태산이 나오려는 13선거구 말야.”
“그래?”
오명자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렸을 때부터 긴장할 때면 나오는 버릇이었다.
“우리의 우정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꼭 들어주겠지?”
“원 애두. 갈피를 못 잡겠구나. 무슨 일인지 자세히 말부터 해라. 우리가 뭐 어제 오늘 사귄 친구니?”

“그래, 내가 말할게.”
송희의 표정에 다시 원한의 빛이 떠올랐다.
“너도 다 들었겠지? 신문에도 다 나갔으니까. 우리 그이가 여관에서 벌거벗은 채 죽었다는 것 말이야. 처음엔 이상한 대로 자살이 아닐까 그렇게도 억지로, 정말 억지로 생각해 보았어. 하지만 아니야. 그럴 수가 없어. 우리 그이가 왜 죽니? 공천받고 정계에 발을 들이민 그 자리에서 왜 자살을⋯ 그건 정말 말도 안 돼.”

송희는 울먹이며 말했다.
웨이터가 커피를 따르며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두 사람의 얼굴을 흘깃흘깃 보았다.

“내가 허튼 소리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냐. 다 짚이는 바가 있어서 그래. 어떤 년이 나를 사칭하고 경찰에 찾아가 우리 그이를 조사해 달라고 그랬대. 그년이 우리 남편을 죽인 거야. 그년을 꼭 찾아내고 말 거야.”

여전히 오명자는 송희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너무 격앙되어 말을 하고 있었기에 그대로 듣기만 하였다.
“내게 떠오른 육감이 있어. 이건 정치적인 음모야. 우리 그이가 나오면 지가 떨어질 거니까 우리 그이를 죽인 거라구. 방태산이 범인이야. 틀림없어.”
“무엇?”

“늘 남편하고 그 수하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 남편은 그 지역구에서 나오려고 열심히 정보 수집을 하고 있었거든. 너 방태산을 조심해야 한다. 보통 호색한이 아니거든. 반반한 여자라면 다 건드려. 혹시 너한테도 손 뻗치지 않든?”
“무슨 소리야?”

오명자는 속으로 뜨끔하면서도 겉으로는 시치미를 떼었다. 등골로 전율이 스쳤다.
“여자를 홀리는 데는 귀신이야. 일단 점 찍으면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아. 대낮이고 뭐고 여자 팬티 벗기고 올라탄다. 물건도 좋고 힘도 보통이 아니야. 여자를 녹초를 만든다니까. 방태산 밑에 깔리기만 하면 옴마야 나 살려라 하고...”
“넌 어떻게 그렇게 자세하게 아니?”

오명자가 흥분해서 떠드는 오명자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물었다.
“응, 저어, 들은 얘기야. 어쨌든 그는 말이야 여자들의 온갖 약점을 다 잡아서 꼼짝 못하게 한대. 너한테도 남편 취직이니 뭐니 하는 올가미를 가지고 덤벼들지 몰라.”
그러나 오명자는 그 말을 겉으로 무시해 버렸다. 그리고 화제를 돌렸다.
“방태산이 여자를 꼬셔서 네 남편을 죽였다는 거야?”
“그렇대니까. 뭘 들었어? 그 여자도 틀림없이 방태산 앞에서 옷벗고 들어 누웠을꺼야.”

“그렇게 악독한 사람은 아닌데⋯”
“아직도 네가 뭘 모르는구나.”
송희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명자를 건너다보았다.
“정계라는 게 사실 알고 보면 참 더러운 게 많단다.  물론 내 남편처럼 양심적인 사람도 없는 건 아니지만 그이도 형님 되시는 이가 사장쯤 되다 보니까 정치자금을  이리저리  댈 수 있었지. 웬만한 집안이라면 어림도 없는 게 정치야. 심지어 보스가 되려면 단단한 돈줄부터 쥐어라 하는 소리까지 있으니까. 방태산 같은 게 어디서 돈을 대겠어? 다 사기치고 다니는 거야. 그 와중에 여자까지 건드리고 다니니⋯ ”

“그래서 내가 뭘 해 주었으면 좋겠어?.”
송희의 말이 끝이 없을 것 같아 오명자가  중간에 말을 끊었다.
“그래, 그 얘기를 안 했구나. 방태산을 좀 조사해 줘. 틀림없이 증거가 있을 거야.”

그러면서 송희는 핸드백을 열어 하얀 사각봉투를 하나 꺼냈다.
“50만 원이야. 부탁해.”
“집어넣어! 그런 일은 할 수 없어! 너 나를 정말 우습게 보는구나!”
오명자는 뜻밖에도 버럭 화를 내었다.
주위의 사람들이 죄 그들을 쳐다보았다. 웨이터도 따가운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왜 이래?”

“돈으로 친구를 사려고 하다니. 너도 정계의 썩은 사람들과 다를 바 없어.”
오명자는 차가운 눈으로 송희를 바라보았다.
“너마저 나를 도울 수 없다는 거니?  너마저?”
송희는 어이없다는듯이 차가운 오명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자는 그 눈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고등학교 때부터 그랬다.

학창 시절 두 사람은 가까운 사이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어딘가 둘은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었다. 송희는 공주님과 같은 존재였고 오명자는 시종과 같은 존재였다. 송희는 결코 자신보다 나은 아이를 친구로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오명자가 가장 친한 친구가 된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 좋아, 좋아. 하지만 너한테 돈을 받을 수는 없어.”
실망하는 송희를 바라보고 있던 오명자는 다시 마음이 약해졌다.
“아니야. 받아야 해. 그게 너뿐만 아니라 내게도 좋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돈을 받아야 내 마음이 편해. 그리고 너도 의무감이 생기고⋯”
오명자로서는 그 말이 불쾌했으나 그렇게까지 송희가 나온다면 자신도 조건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우리 남편을 취직시켜 줘.”
“그 사람, 취직할 생각이 이제는 있어?”
“응.”
“그래? 니네 남편 이제 철났구나.”

송희는 조건을 수락했다. 거래가 이루어진 것이다.
“네 남편 너 사랑해 주니? 침대에서도 잘해주니? 하기야 돈 못 버니까 잠자리 서비스라도 잘해 줘야지. 안 그렇니?”
송희가 짓궂게 웃었다.

[작가소개]

이상우;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학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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