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방태산이 범인이 아닐 수도 있어. 무슨 꼬투리라도 있니?”
“알고 있어. 네가 필요한 것은 모두 여기 있어. 천천히 읽어봐. 이것은 죽은 그이가 조사해 놓은 방태산의 비리야. 거긴 참말도 있고 거짓말도 있을 거야. 정치란 상대방을 모함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래. 그리고 이 돈도 가져가 봐. 보수가 아니라 경비라고 생각해. 돈이 없으면 조사도 할 수 없잖아.”
그 말에 오명자도 군말 없이 돈을 받았다.

“그런데 왜 경찰에 사건을 맡겨 두지 않는 거니?”
“경찰은 이런 사건을 다룰 수가 없어. 진상을 알아내려고도 하지 않는 데다가 알아내 봤자 정치 모략이다, 공작이다, 중상이다, 이렇게 떠들어대면 만사형통이거든.”
송희는 고개를 저으며 힘없이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기댈 수 있는 언덕은  너밖에 없어. 게다가 너는 방태산의 심장부에 있는 것 아니겠니. 제발 이 원수를 갚게 해 줘.”
“같은 이야기를 두 번씩 할 필요는 없잖아.”

송희는 그 말에 한시름을 놓았다. 집안이 어려워 비록 대학은 가지 못했던 명자지만 그 머리만은 얼마나 비상했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방태산이 정말 사람을 죽이라고 했을까?”

송희와 헤어진 오명자는 그 생각이 들 때마다 짐승처럼 덤벼들던 방태산의 벌거벗은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의 커다란 물건이 그녀의 중심부로 밀고 들어오는 상상이 뒤따랐다. 남편에게서 느끼지 못하던 짜릿한 흥분을 경험한 것은 사실이었다. 

남편과의 잠자리는 언제나 미진했다. 사랑의 대화도 애무도 없이 손부터 사타구니에 불쑥 들어와 속옷을 우왁스럽게 벗긴 뒤 숨돌릴 틈도 안 주고 혼자 씩씩거리다가 싱겁게 끝나고 내려갔다. 이내 돌아누워 코를 골았다. 그럴 때마다 오명자는 모멸감 같은 것을 느꼈다. 모멸 감뿐만 아니라 막 불이 붙으려던 심신을 수습하기가 힘들었다. 옆에 다른 남자가 있다면 누구든 끌어안고 몸부림치고 싶은 생각이 들고는 했다.

그녀가 오르가슴을 느낀 것은 결혼 하고 난 뒤 한두 번에 불과했다. 몇 년 전 설악산에 여행을 갔을 때였다. 제법 깨끗한 장급 여관에 그들은 짐을 풀었다. 낮에 온 산이 불타는 듯한 단풍에 취하면서 등산을 했다. 저녁 무렵 그들은 간이 빠에서 라이오닐 리치의 달콤한 노래를 들으면서 칵테일 한 잔씩을 마셨다. 

방에 들어온 그는 예의를 갖추고 천천히 오명자에게 키스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로맨틱하게 오명자의 옷가지를 하나하나 벗겼다. 알몸이 드러나자 그녀의 수줍은 젖꼭지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녀를 침대에 들어다 눕힌뒤 자기도 천천히 옷을 벗고 그녀 위에 올라왔다. 그는 여느 때처럼 서둘지 않았다. 그의 큼직한 입술은 그녀의 목덜미에서부터 통통한 유방으로 옮겨졌다. 유두를 삼킬 듯이 입안에 넣었다가 뱉아냈다. 그의 입술은 다시 가슴 밑으로 배꼽으로, 그리고 숲을 헤치고 계곡으로 내려갔다. 

오명자는 꿈을 꾸는 듯했다. 평소에 느끼던 남편이 아니었다. 꿈에 그리던 왕자가 온 것 같았다. 그녀는 불탔다. 그녀의 중심은 촉촉이 젖은 채 왕자를 기다렸다.
“어머, 어머, 당신 정말 멋져. 어머, 어머⋯”

그녀는 몇 번이나 감탄했다. 신음했다. 몸부림쳤다. 천국을 경험했다. 그 날 밤 이후 남편은 다시 성급하고 이기적인 남자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녀는 방태산이 송희도 건드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차가운 가을바람이 그녀의 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그녀는 먼저 송희의 자료를 읽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바로 근처의 카페에 들어갔다.
“손님을 기다리십니까?”

웨이터가 주문표를 내밀며 공손하게 물었다.
“아니요.”
“그럼 뭘로 주문하시겠습니까?"
“스크류 드라이버.”
아직 4시밖에 되지 않았지만 약간은 술이 필요한 것 같았다. 그녀는 조금씩 술을 마시며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읽어 나갈수록 오명자의 가슴은 진정할 수 없도록 뛰기 시작했다. 서류대로라면 방태산만 한 악당은 천하에 없을 것이었다. 그 대부분은 사기에 관한 항목들이었다. 당선을 담보로 내건 협박들이 그 주 내용이었는데 그는 떨어진 뒤에도 자기 당의 위세를 빌려 사건을 유야무야로 만들어 놓는 데 전문가였다. 그리고 사람들도 정치가와 싸워 봐야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포기하기가 일쑤였다.

카페 창 밖으로 바람이 불 때마다 잎새들이 떨어졌다. 멍하니 그 것을 바라보던 오명자는 쿨짝거리며 조용히 울기 시작했다.
술기운이 약간 올라서 그런 건지도 몰랐다. 자신의 인생이 허무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되었다.

여고 시절엔 반에서 1, 2등을 다투었다. 그러나 애당초 대학에 갈 형편은 되지 못했다.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행상을 나가는 어머니에게 바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애당초 상고를 보내려 했던 것을 그래도 우겨서 인문계 학교로 갔을 때는  오명자 역시 생각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4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공부를 하자는 것이 그녀의 목표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모든 꿈은 깨어졌다. 그녀가 예비고사에서 305점이라는 훌륭한 점수를 받았던 그날 그녀의 어머니는 번쩍거리는 로얄 살롱에 받혀서 죽고 말았다. 장소가 육교 밑이었기 때문에 보상도 받지 못했다. 당장 집안에서 돈을 벌 사람이라고는 자신 하나밖에 없었다.

지금의 남편을 만난 것은 그녀가 다방에서 레지를 하던 때였다. 명문대에서 가까운 위치의 다방이라 대학생들도 곧잘 드나들었다. 그리고 대학가에 지금처럼 카페가 널려 있는 때도 아니었다.
여자가 남편이 된 문석관과 처음 만난 것은 축제 때였다. 대학 거리는 축제와 낭만으로 가득 찼었다.

갑자기 다방에 뛰어든 대학생 문석관은 오명자의 손을 덥석 쥐더니 마구잡이로 밖으로 끌어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오명자는 빙긋이 웃음을 머금었다. 그때가 여자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석관은 파트너를 찾아서 뛰어든 것이었다. 친구들끼리 그날 5시에 파트너를 데리고 모이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벌써 준수한 그의 외모에 반해 있던 그녀는 군말 없이 그를 따라갔다. 그렇게 인연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더 생각하면 무얼 해.”
오명자의 눈에는 다시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옛 생각은 끊임없이 그녀의 머릿속으로 돌아갔다.

남편은 그 당시만 해도 급진적이었다. 학벌도 지위도 개념치 않았다. 오명자에게 결혼을 신청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악연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남편의 집안에서는 극렬한 반대가 있었다. 그 때문에 비록 얼굴을 내밀 수 없는 시댁이긴 하였지만 든든했던 남편의 집안이 하루아침에 부도를 내고 파산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정절마저 잃은 화냥년이 된 거지.’
오명자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어디에서부터 출발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신미혜, 그 여자부터야.”
오명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신미혜는 기록에 나와 있는 유일한 여성 피해자였다.

서류에 따르면 신미혜는 방태산에 의해 4년 전에 농락 당하고 임신까지 하였다가 버림받자 자살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오명자는 자신의 경우와 비슷한 그 여자의 일에 분노를 느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라도 나서서 당신을 매장시키고 말 거야.”
오명자는 이를 뽀드득 갈았다. 그의 버릇 중 10분의 1만이 진실이라도 그에게 표를 던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표는커녕 침을 뱉을 유권자들만 있을 것이라고 오명자는 생각했다.

9.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런 중대한 순간에 이게 무슨 일이야!”
“죄송합니다, 형님.”
“죄송하다고 해결될 일이야?”

최장배는 가운데 머리가 한 줌 빠진 초로의 사내 앞에서 쩔쩔매고 있었다. 그곳은 아주 잘 차려진 사무실이었다.
모든 것이 최고급 사무 집기로 꾸며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천박하게 번쩍거리는 물건들로 되어 있어 쓰는 사람들의 수준을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책장에는 수석들과 조각품만 들어 있을 뿐 책이라고는 한 권도 보이지 않았다.
“형주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아냈어?”

“그게 아직⋯”
최장배가 식은땀을 흘릴 때 전화벨이 노래 소리를 내며 울렸다. 최장배가 전화를 받았다.
“나, 최장배야.”
“예, 형님, 곰보입니다. 큰일이 났습니다.”
“형주가 박정자라는 기집년 하나를 꿰차고 토꼈습니다.”

“뭐야 ? 너희들은 무엇을 했어?”
“그게⋯”
“이놈의 새끼들 모두 잘라버리겠어. 그새를 못 참아 기집년 배 위에 올라가 있었지!”
“자, 장배형⋯”
“거기 어디야?"
“황금 살롱입니다.”
“꼼짝 말고 있어라! 내가 곧 그리 가겠다.”

최장배는 전화를 끊었다. 형님이라는 사나이를 돌아보았다.
“형님, 형주가 나타났던 것 같습니다. 그곳으로 가보겠습니다.”
“명심해. 형주란 놈을 잡아오지 못한다면  너도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최장배는 식은땀을 흘리며 물러났다. 
형님이라는 자는 그의 뒷모습을 분노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단 하나의 실수가 조직을 무너뜨려 온 것을 그는 너무나 많이 보아 왔다.
폭력과 범죄의 세계에서 잔뼈가 굵은 남봉철, 그는 마침내 서울의 암흑가를 휘어쥔 형님의 자리에까지 오른 것이었다.
“망할 것들, 그 돈이 어떤 돈이라고 함부로 돌린단 말인가!”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천천히 수화기를 들었다.
“남봉철입니다.”
“나요, 나. 그간 안녕하셨소? 난 보시다시피 잘돼 가지요.”
“잘돼 가다니, 그게 누구 덕인 줄은 알고 계시오?”
“하하하, 그걸 왜 내가 모르겠소. 헌데 그쪽에는 무슨 이상이 생긴 모양인데.”
“음⋯”

남봉철은 깊은 신음을 내뱉었다.
“문제가 심각하다면 상의를 해야겠는데요?”
“아직은 괜찮소. 필요한 조치는 우리가 취할 것이요.”
남봉철이 피식 그를 비웃었다. 남봉철은 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창 쪽 으로 걸어갔다. 형주를 잡아야 한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게 해내야 한다는 딜레머가 그를 괴롭혔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일로 경찰이 끼어드는 것이었다. 그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만 했다.

박철호라는 녀석이 경찰에 모든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경찰은 곧 형주가 자하문장에 있다가 도망쳤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박철호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남봉철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런 하찮은 녀석 때문에 전 조직이 위험에 빠질 수는 없었다.
남봉철은 그를 은신시킬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그가 사라지면 경찰은 전력을 기울여 그를 찾으려 할 것이다. 그건 위험 부담이 더 크다고 생각되었다.
“죽이는 수밖에 없어.”
남봉철은 박철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형님이 조직을 온전히 숨겨 둘 수 있는 길을 생각하고 있을 무렵, 황금 살롱 내부를 살피고 있던 최장배는 갑갑한 심정을 누를 길이 없었다.
“아시다시피 문은 안으로 잠겨 있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에도 안으로 잠겨진 상태 그대로였습니다. 여긴 지한데 들어올 곳도 없고 나갈 곳도 없단 말입니다.”
곰보의 설명 그대로였다.

“문 닫기 전에 그년이 도망친 것은 아냐?”
“그렇지 않아요.”
주 마담이 끼어들었다.
“어제 나와 함께 끝까지 손님을 받았어요. 형주 사건도 있고 해서 외박도 보내지 않았다고요.”

“그럼 어떻게 사라졌단 말야? 여자 훔쳐 가는 홍길동이라도 나타났단 말이야!”
최장배가 화를 냈다.
“완전히 허를 찔렸어. 설마하니 여자를 데리고 달아날 줄이야 꿈엔들 생각해 보았나 어디.”

최장배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뒤덮였다. 세수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 속이 너무 혼탁했다.
화장실에 도착한 그는 물을 한껏 틀고는 아예 머리통을 세면대에 집어넣고 흔들어댔다.
“씨원하구만.”

머리를 흔들며 고개를 번쩍 든 최장배의 눈에 화장실의 들창이 잡혔다. 그 들창은 형주가 어떻게 침입하고 도망쳤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젠장할 그놈은 여길 통해서 도망쳤어.”

최장배가 얼굴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화장실에서 뛰쳐나왔다. 잠시 후 그들은 그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화장실의 들창은 먼지 사이로 손가락 자국이 선명히 나 있었고 밖에도 발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이것 봐요, 장배씨,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은 거예요. 나한테 잘 보이면 누가 알아요? 무슨 정보라도 내놓을지⋯”

얼굴이 벌겋게 단 최장배에게 주마담이 생글거리며 다가갔다. 윗단추가 열린 옷깃 사이로 뽀얀 젖가슴이 눈을 자극했다. [계속]

 

[작가소개]
이상우;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학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