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보호’보다는 ‘가해자 처벌’에만 집중

노원 세모녀 살인사건 피의자 김태현이 9일 오전 서울 도봉구 도봉경찰서에서 검찰 송치 전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21.04.09. [뉴시스]
노원 세모녀 살인사건 피의자 김태현이 9일 오전 서울 도봉구 도봉경찰서에서 검찰 송치 전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21.04.09. [뉴시스]

[일요서울ㅣ김혜진 기자] 최근 ‘노원구 세 모녀 피살 사건’의 피의자 김태현(25)이 피해자 모녀의 큰딸을 장기간 스토킹해 온 정황이 드러나면서 ‘스토킹 범죄’가 주목받고 있다. 스토킹은 우리 사회에서 오랜 시간 지적돼 온 문제지만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정안(스토킹 처벌법)’은 1999년 국회에서 첫 발의 이후 22년만인 지난달에서야 겨우 통과돼 오는 9월 시행을 앞두고 있다. 해당 법안이 ‘가해자 처벌’에만 치중해 고통에 시달리는 피해자나 그 가족을 ‘보호’할 만한 조치는 미흡하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반의사불벌죄’ 조항 그대로 포함… 일회성 행위는 범죄로 규정 안 해

포털 검색창에 ‘스토킹’ ‘스토킹 범죄’ ‘스토킹 피해’ 등 스토킹 관련 단어를 검색하자 지난 6일 하루에만 10여 건이 넘는 다양한 고민 글이 쏟아졌다. 이렇듯 스토킹 피해는 일상에서 꾸준하고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최근 3년간 스토킹 범죄 신고 건수는 2018년 2772건, 2019년 5468건, 2020년 4515건으로 집계됐다. 신고 건수 대비 처벌 건수는 2018년 19.62%, 2019년 10.6%, 2020년 10.8%로 높지 않은 편이다. 평균 신고 건수 10건 중 1건만 처벌되는 셈이다.

- 22년 만에야 스토킹 처벌법 통과… ‘범죄’ 아닌 ‘호감’으로 치부해 온 탓

오랜 시간 논의돼 온 문제지만 법안 제정까지는 결국 20여 년이 걸렸다. 이는 그동안 스토킹 범죄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사회 분위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윤선영 한국여성인권진흥원 본부장은 일요서울에 “면식 관계의 스토킹 범죄는 꾸준하게 있었지만 과거에는 이를 ‘범죄’보다는 ‘호감’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여성 폭력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인식이 부재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스토킹 범죄 처벌 관련 논의는 1999년 15대 국회에서부터 이뤄지기 시작했다. 2013년에는 스토킹 범죄를 ‘경범죄 처벌법’에 따라 처벌이 가능하도록 했다. 하지만 죄명은 ‘지속적 괴롭힘’이었던 만큼 다발적인 범죄를 저질러야만 처벌할 수 있었다. 처벌 수위는 10만 원 이하 벌금, 구류 또는 과료형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그러다 최근 몇 년간 스토킹 범죄 심각성이 꾸준히 부각되면서 22년만인 지난달 말에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정안(스토킹 처벌법)’이 제정됐다. 법안은 오는 9월 비로소 법적 근거를 갖게 된다. 

이번에 제정된 스토킹 처벌법의 구체적인 내용은 ‘스토킹 행위를 지속적 혹은 반복적으로 하는 경우’에 스토킹 범죄 행위로 처벌 받는다. 스토킹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만약 흉기 등 위험한 물건을 이용하면 5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으로 형량이 가중된다. 스토킹 처벌법은 필요한 경우 ‘경찰이 100m 이내 접근금지’ 등 긴급 조치를 취한 뒤 지방 법원 판사의 사후 승인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 피해자 존중 X, 소유물로 생각… 스토킹이 살인으로 이어졌다

전문가들은 스토킹 범죄는 피해자에 대한 집착과 소유물로서 상대를 대하는 사고방식에서 기인한다고 분석한다. 상대의 거절 의사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무시당했다고 생각해 격분하며 결국 살인까지도 이르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수정 교수는 “대부분 가해자인 남성은 피해자인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보지 않는다. 여성이 의사를 거절할 수도 있는 존재라고 여기지 않고, 또 존중하지 않는 심리도 깔려 있다”며 “내 말을 안 들으니 결국 괴롭히다가 죽이는 게 목적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권일용 동국대 경찰사법대학원 겸임교수는 “스토킹 범죄를 저지르는 상당수가 망상이나 성격 장애의 경향성이 높은 사람들”이라며 “피해자의 거부 의사 표현과 태도를 오히려 자신과 상호작용하고 있다고 착각한다”고 했다. 권 교수는 “상대방의 확고한 태도를 무시하고 자신의 의도대로 접촉을 시도하다가 결국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며 “모든 스토킹 범죄의 발생 원인이 정신 문제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과도한 집착을 표현하는 방식, 지속적 괴롭힘을 통한 자존감 회복, 상대방을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등의 이상 심리에서 발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24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안(대안)이 통과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2021.03.24. [뉴시스]
24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안(대안)이 통과되고 있다. 2021.03.24. [공동취재사진]

- 피해자 보호 조치 ‘미흡’

오는 9월 시행되는 스토킹 처벌법은 ‘피해자 보호’보다는 ‘가해자 처벌’에만 중점을 두고 있어 피해자를 보호하기엔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공소를 제기할 수 없는 ‘반의사불벌죄’ 조항이 그대로 포함됐고, 일회성 행위의 경우는 스토킹 범죄로 규정하지 않는 내용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통과된 법안명도 ‘스토킹 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아닌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다. 

한국여성의전화는 “제정 법률안은 스토킹 ‘행위’와 스토킹 ‘범죄’를 구분함으로써 법이 보호하는 피해자를 한정적으로 규정했다”며 “피해자의 동거인, 가족 등도 피해자의 범주에 포함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을 스토킹 ‘행위’의 대상으로만 규정할 뿐 실질적인 보호 조치는 어디에도 없다. ‘직접적인 피해’를 당한 사람만 스토킹 범죄의 피해자로 인정하겠다는 인식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여성 폭력의 특성상 피해자의 입을 막는 반의사불벌 조항의 존속으로는 피해자 보호와 인권 보장의 실효성을 담보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협박하거나 가족을 회유하는 방식으로 신고·고소를 취소할 수 있는 현실을 외면하고 기존의 ‘반의사불벌’ 조항을 그대로 넣었단 의미다.

해당 법안을 발의한 정춘숙 (더불어민주당·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위원장) 의원실 관계자는 “법안의 내용을 보면 스토킹 범죄 피해의 범위가 협소하게 적용될 우려가 있다”며 “법을 집행할 때 다양한 상황에 맞춰서 적용할 수 있을지 고민이 필요할 듯하다. 앞으로 시행 규칙이 만들어질 때 실질적인 사례들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피해자 보호법 ‘여가부 별도 마련’

당초 해당 법안에는 가해자 처벌과 피해자 보호가 함께 포함되게 했으나 국회는 처벌법을 통과시키고 피해자 보호를 후속 입법하기로 논의했다. 정치권과 여성가족부 등 관련 부처는 ‘처벌법’과 ‘보호법’을 나눠 제도화하는 최근의 입법 추세를 원인으로 봤다. 

정춘숙 의원실 관계자는 “최근 가정폭력방지법, 성폭력 관련 법 사례처럼 처벌법과 피해자 보호법이 별도로 나뉘어 제정되는 추세”라며 “처벌법은 법사위 법, 보호법은 여가위 법으로 분리돼 법이 쪼개져 마련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어 “처벌법이 제정되고 나서 여성가족부가 피해자 보호 조치 관련 연구용역을 시작했다고 들었다”며 “올해 중반기 정도에 연구용역을 끝내고 법안을 준비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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