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강 형사의 추리가 일단 끊겼다. 보다 절박한 의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왜 한 여관 종업원을 이렇게 치밀한 계산 아래 죽여야 했단 말이지?’
강 형사는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아저씨 무슨 생각하세요?”
미스 조가 여관 안으로 따라 들어와 강 형사를 보고 물었다.
“누가 박철호를 죽였을 것 같아요?”

강 형사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녀는 어느새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어헤쳐 가슴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조금만 더 옷이 내려가면 젖꼭지가 보일 것 같은 차림이었다.

“그 사람은 자살했을지도 몰라요. 늘 고민해 왔거든요.”
“고민이라니요? 박철호가 자살을 할만한 고민 꺼리가 있었단 말이오?”
강 형사가 눈이 동그래서 물었다. 그때 뚱뚱보 주인 아주머니가 나오다가 두 사람의 모습을 유심히 보았다.

“아서라 아서. 쯧쯧⋯”
그녀는 강 형사가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지나갔다.
“박철호의 고민이라는 것이 무엇이야?”
강 형사가 다시 다그쳐 물었다.

“맨 입에?”
그녀가 혀를 날름 내밀었다.
“그럼 저기 나가 맥주 한잔 할까?”
강 형사는 미스 조를 데리고 나와 앞 골목에 있는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천 씨씨짜리 두 개”

여자가 들어서자 마자 생맥주를 시켰다. 자주 이곳에 드나든 것이 틀림 없었다.
“그래 박철호의 고민이란⋯”
그녀는 생맥주 반 잔을 한모금에 들이켠 뒤 입을 열었다.
“사실 걔 험담을 해서는 안 되지만...”

“빨리 말해 봐요.”
강 형사도 생맥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뒤 그녀의 입술을 바라 보았다.
“박철호는 조루증이에요. 지독한⋯ 시작하자마자 1분도 채 못 가 터뜨리고 내려와요. 호호호 그것 때문에 얼마나 고민했다구요.”
강 형사는 어이가 없었다. 맥주값이 아까웠다.

11. 예술적인 살인

“이번에도 자살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어.”
추 경감이 부검 소견서를 책상 위로 던졌다.

“박철호가 죽기 전에 환각제 종류의 약을 사용한 것은 알 수 있지만 그것은 자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먹었을 가능성이 크고 그의 팔에 있는 바늘구멍으로 보아 마약을 여러 번 사용한 경험이 있는 자라는 것이야.”
“아닙니다. 이번의 경우는 진짜 자살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절대로 살해된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강 형사가 흥분하여 말했다.

“무슨 근거로?”
추 경감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자네 말을 듣고 자하문장의 주전자를  회수하여 조사해 보았지만 그저 수도물에 불과했어. 수면제 따위는 검출되지 않았단 말야.”

“당연하지요. 범인은 이미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 정도의 실수를 할 리가 없는 거지요. 하지만 사실은 거기에 작은 과오가 있었던 겁니다.”

“작은 과오?”
“예, 작지만 확실히 범행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실수입니다.”
“흠, 그게 뭐지?”
추 경감은 흥미가 당기기 시작했다. 강형사는 그 눈치를 채고 우쭐해졌다.

“그날 밤 주전자에 담겨 있던 물은 끓인 물, 즉 보리차였던 것입니다. 범인은 들어와서 자리가 비어 있는 틈에 수면제를 탔지요. 일을 쉽게 해치울 속셈이었지요. 혹시라도 있을 방해와 자신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고 범행 후에 증거를 없앨 생각으로  물을 쏟아 버리고 맹물을 담아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실수가 있었던 거지요.”
강 형사는 의기양양했다.

“여관 주인은 주전자의 물이  보리차였다는 것을 증언했습니다. 그럼 범인은 누구인가? 일단 알 수 있는 것은 범인이 박철호와 면식범이라는 점입니다. 그것도 상당히 밀접한 관계에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범인은 아마도 박철호에게 마약을 제공하는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박철호는 그에게 별 의심이 없었던 거지요. 마약을 받아 먹고 나서 부르는 대로 유서를 썼습니다. 그 뒤에 저항력을 상실한 박철호를 예술적으로 처치해 버린 거지요.”

강 형사가 신이 나서 떠들었다. 추 경감 보다 앞선 추리를 한 것은 이것이 처음 같았다.

“예술적으로?”
추 경감의 그 반문은 이미 강 형사가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요. 예술적이지요. 경감님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는 소설을 읽어 보셨습니까?”

문학 소년이었던 그는 엉뚱한 질문을 했다.
“헤밍웨이의 소설 말이지. 읽지는 않고 게리 쿠퍼와 잉그리드 버그만이 나오는 영화는 보았지.”

“거기에 보면 고통 없이 죽는 방법에 대하여 마리아, 아니 잉그리드 버그만이 조던, 즉 게리 쿠퍼에게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귀 뒤의 경동맥을 끊는 방법이지요. 그리고 마사다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마, 사, 다?”

“예. 마사다란 이스라엘이 옛날 로마제국에 정복될 때 마지막 남아 있던 요새였습니다. 마지막까지 거대한 로마제국에 대항하던 집단이었지요. 이들은 점령될 위기에 처하자 죽음으로써 최후의 저항을 하게 됩니다. 이때 사용된 자살 방법도 귀 뒤의 경동맥을 자르는 것이었지요.”

추 경감은 강 형사가 문학 지망생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꿈은 은퇴 후에 자기가 겪은 사건들을  소설로 쓰는 것이었다.
강 형사는 추 경감의 말에 한번 히죽 웃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문학은 현실에 바탕을 둔 것이지요.  이번 범인도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는 친구였습니다. 자기 몸에 피가 튈 만한 일은 하지 않은 것이지요.”
“그럴 듯하군. 그렇다면 범인은 어떻게 잡지? 남겨진 단서가 없잖아.”

“아닙니다. 여러 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우선 범인은 박철호를 아는 면식범입니다. 그리고 더불어 여관 사람들도 얼굴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범인은 여관의 구조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2. 타살과 자살 사이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범인은 마약밀매 조직과 어떻게든지 관련이 있다는 점입니다.”
강 형사는 더욱 신이났다.

“음, 계속해 봐.”
추 경감이 아예 자리에 퍼지르고 앉으며 물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그 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마약조직을 수사 해 보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박철호를 죽였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도 하필이면 이 시기에.”

“이 시기라면?”
“도망친 구형주 때문에 조사를 받고 난 직후라는 점입니다.”
“구형주라고 단정은 짓지 말고⋯”
“아무튼 여관에서 도망친 남자로 인해 그 친구가 의심을 받고 수사를 당하던 중이었습니다.”

“음.”
“그 남자는 구형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마약과 구형주와 박철호, 이 세 가지 함수가 우리 손에 쥐여 있는 셈입니다.  박철호의 살해도 여기서 벗어난 결과는 아닐 것입니다.”

“그럴듯하군.”
추 경감이 짙은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강형사는 더욱 자신의 추리에 매료되었다.

“저는 구형주의 전과 기록을 살펴보았습니다. 폭력 전과 2범이 더군요. 마약밀매 조직이 그 정도의 사내를 어디에 이용했을까 하는 점을 생각하는 것은 간단했습니다. 정필대의 살인이었지요.”
“그럴 수도 있겠지.”

추 경감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정필대를 죽인 후에⋯”
“왜 정필대를 죽였지?”

“그건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정치 자금의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돈  문제로 분란이 생겨서 살인이 일어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가짜 송희는 뭐지?”

추 경감이 담배를 꺼내 물고 불 켜지지 않는 지포 라이터를 철거덕거렸다.
“그것도 현재로서는 잘 알 수는 없지만 수사상의 혼란을 일으키려는 농간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해 두고, 계속 말해 보게.”

“그래서 정필대를 죽인 후에 구형주를 몰래 내보낸 것이지요. 그때까지는 들통이 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거지요. 하지만 남자가 머물러 있던 것을 경찰이 밝혀내자 박철호가 형사들한테 입을 열까 걱정이 된 조직에서 살해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아무래도 아구가 떨어지지 않는걸⋯ 자네는 제법이긴 하지만 아직 아마추어 티가 난단 말야.”
추 경감이 빙그레 웃으면 말했다.

“먼저 가짜 송희를 내게 보내서 정필대를 주목 받게 할 필요가 없어. 만일 자네가 미행하지 않았다면 손님들을 다 내보내고 여관을 깨끗이 정리한 후에 신고를 할 수도 있었던 것이거든.”

“아하! 경감님의 말씀을 들으니 알 것 같습니다. 그 송희는 분명히 우리 쪽이었던 겁니다. 정필대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지요. 그래서 경감님에게 도움을 요청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필대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경로를 설명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여자였기 때문에 자신을 정필대의 부인인 송희라고 속인 것이지요.“

강 형사는 그래도 기가 죽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치더라도 역시 이상해. 구형주는 자신의 정체가 탄로났다는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이미 행방을 감추었어. 이미 그 근처의 불량배들도 사건이 있던 날 이후 구형주를 보았다는 사람이 없네.”

“그거야 당연하잖습니까? 살인을 저지른  다음인데 숨겨야지요.”
“그럴 바에는 박철호는 왜 도망을 치지 않았을까?”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서지요.”
강 형사에게는 모든 것이 명확했다.

“그럼, 자네가 보았다는 그 여자,  가짜 송희라고 생각되는 여자는 어떻게 되지?”
“모든 걸 지금 알 수는 없지 않습니까?”
추 경감의 추궁에 마침내 강 형사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자네 추리 중 믿어지는 부분은 박철호가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뿐이네. 나머지 부분은 그저 생각일 뿐이야. 박철호와 구형주가 무슨 관계가 있을지는 몰라.  그리고 마약과 관계가 있을는지도 모르겠네. 그건 마약 전담반의 최 경감에게 좀 물어보게. 최경감은 알고 있지? 예전 김묘숙 박사 살인사건 때 만나 보았으니까.”

“김묘숙 박사 살인 사건이라뇨? 아, 그 사건 말이죠. 무인도에서 남녀 두 짝이 바뀐 사건. 왜 여름 바캉스 갔던 두 쌍의 부부가 서로 짝이 바뀌어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서로 친구의 남편과 밤에 섬씽이 있지 않았나 해서 의심하다가 마침내 고교 동창 단짝이고 남편 친구의 아내이기도 한 김묘숙을 가스 폭발을 가장해서 죽게 한 사건 말입니다.”

추 경감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강형사를 쳐다보았으나 그는 눈치 채지 못하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경감님. 그때 말입니다. 정말로 친구 남편과 섬씽이 있었던 것입니까? 그게 사실이라면 그 사건은 김묘숙 사건이 아니고 남편 바꿔 자기 사건이라고 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이 사람아. 그 사건은 김묘숙 사건이 아니고 ‘악녀 두번 살다’ 사건이야. 김묘숙 사건은 유전자 연구소의 연속 살인 사건을 말하는 거야.”
“아아. 그렇군요. 그 못생긴 노처녀 박사 김묘숙 말이지요? 하지만 부검 때 보니까 몸매는 그만이던걸요. 아주⋯”
“쯧쯧쯧⋯”

추 경감이 혀를 찼다.
“언제 철이 들려는지⋯ 자네 형사 생활 몇 년이야?”
추 경감이 다시 핀잔을 주었다.
“경감님 따라 다닌 것만 7년입니다.”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무슨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 알지?”
“예, 알고 있습니다.”
강 형사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신의 멋진 추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데 대한 불만이었다.

13. 농락 당한 세월

그날따라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오명자는 망우리의 공동묘지에 있었다. 빗줄기가 차츰 굵어지는 것 같았지만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근처라고 했는데⋯’

오명자는 묘지들의 언덕 주위에 멈춰서 비석들을 찬찬히 살폈다.
있었다. 신미혜.

오명자는 허겁지겁 그 비석 앞으로 다가갔다. 마치 묘지가 갈라지고 그 속에서 진실을 이야기해 줄 원혼이라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수많은 다른 묘지와 하나도 다르지 않은 그 묘지는 신미혜가 스물넷의 젊디젊은 나이에 죽었다는 것만 알려줄 뿐이었다. 오명자는 그 앞에 국화 한 다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신이 조사한, 4년 전에 죽은 신미혜의 이야기를 되새겼다.

눈보라가 쏟아지던 겨울이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춥게 느껴졌다. 서슬이 퍼런 계엄령 하에 놓여 있던 거리에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굳어 있었다.

강동대학교 졸업반이던 신미혜는 동부 이촌동의 낡은 아파트에서 혼자 자취를 하고 있었다. 충청북도 산골에서 올라온 미혜는 집에서 얼마간 부쳐오는 돈과 이일저일의 아르바이트로 겨우 학비를 대며 공부하고 있었다. 아파트도 미국으로 이민 간 언니 친구가 비워 놓은 것을 잠시 쓰고 있었다. 겨울 방학인데도 그녀는 시골집에 가지 않고 서울에 남아 있었다. 겨우내 학비를 벌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계속]

[작가소개]

이상우;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학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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