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아들 나라 지키다 다쳤는데”… 국가 ‘나 몰라라’

“너무 힘들 땐 구름 위를 걷는 기분… 아프면 안 된다고 정신 다잡아”

[사진=신은총 예비역 하사 어머니 제공]

[일요서울ㅣ김혜진 기자] 지난달 23일 국방부 앞에는 천안함 피격 사건 당시 최후 구조자 신은총 하사가 휠체어를 탄 채 플래카드를 들고 천안함 사건 재조사 논란에 대처 방안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옆에는 그의 어머니가 함께 서서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신 하사는 사고 당시 후유증으로 복합부위통증후군(CRPS)을 겪고 있다. 늘 온몸에 강한 통증이 동반되는 탓에 강도가 센 약을 먹지 않으면 못 버티는 그는 어머니의 도움 없이는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일요서울은 5월8일 어버이날을 맞아 신 하사의 곁을 지켜온 어머니 최정애(68) 씨를 만났다. 

최정애 씨는 외유내강(外柔內剛)형 어머니인 듯했다. 고생 한 번 안 한 듯한 고운 이미지의 그는 11년째 아들 신은총 하사의 통증을 곁에서 함께 감내하며 그를 살뜰하게 돌봐 왔다. 어머니 최 씨는 인터뷰를 위해 “두 시간 동안 은총이가 나를 찾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다 해놓고 나왔다”고 했다. 

천안함 피격 사건 당시 신 하사는 마지막으로 어렵게 구조됐다. 당시 허리뼈 세 곳과 다리, 발목이 부러지고 정수리 두 군데가 구멍난 상해를 입은 그는 1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온몸과 손가락, 발가락에 파스를 붙이고 강한 마약성 패치와 독한 진통제에 의지해 통증을 버텨 내고 있다. 최 씨는 “자다가 소리가 들려 가보면 은총이가 벽을 치며 고통을 호소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약으로도 버티기 어려워지자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뼈를 깎고 기계를 넣는 큰 수술을 두 차례 진행했다. 

신 하사는 수술 후 조금만 일어서려고 해도 다리에 힘이 빠져 복대를 3개씩 차고 다닌다. 최 씨는 제대로 걷기 어려운 아들을 부축하며 서울과 인천에 있는 병원을 오갔다. 지난달 국방부 앞에서 1인 시위를 할 때도 천안함 생존 장병, 유가족들과 목소리를 함께 전하기 위해 한숨도 못잤다. 그는 “시위를 할 때 유가족들을 처음 뵀다. 한 어머니를 보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며 “그 부모는 얼마나 기가 막힐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데 세월이 갈수록 얼마나 보고플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심한 부상 당했지만 수술 거절당해

집안에 육군 출신만 있던 탓에 아들에게 멋진 제복을 입는 공군이나 해군에 가라고 권유했다. 신 하사는 주저 않고 지원해 해군에 입대, 천안함을 타게 됐다. 2010년 3월26일 사건이 발생했다. 신 하사가 입대한 지 2년 반 정도 됐을 때였다. 결혼 후 처음으로 커피 만드는 일을 배워 바리스타로 일하던 최 씨는 사건이 있던 날 동생의 전화를 받고 TV뉴스를 통해 사고가 난 천안함이 반으로 갈라진 채 구조되는 현장 중계를 보게 됐다. 그는 “너무 놀라 계속 눈물이 났다”며 “생사를 모르니 연락을 기다리던 차에 국군수도병원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고 했다. 병원으로 달려가 온몸에 붕대를 감은 아들의 모습을 보게 됐다. 

수술을 하면 나아지겠지라고 생각했으나 물거품이 됐다. 수술을 앞두고 이틀 전, 담당 대위는 “갑자기 수술 금지 명령이 내려왔다”며 연신 죄송하다는 말만 되뇌었다. 최 씨는 “죽음 직전에서 건진 건 이해한다. 몸 안에 흩어진 뼛조각이라도 맞춰 달라고 애원했는데 병원은 위에서 내려온 명령이라 어길 수 없다고만 했다”고 말했다. 

6개월 반 만에 수술을 하려고 보니 부러진 뼛조각은 생살에 다 붙어버린 상황이었다. 그는 “수술을 하려면 살을 다 긁어 내야 한다고 했는데 이걸 다 긁어 내면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덮을 수밖에 없었다”며 “그래서 더 원망스럽기도 하다”고 한탄했다. 신 하사는 결국 병원을 나와 제대로 치료받기 위해 전역을 몇 달 안 남기고 의병 제대를 하게 됐다. 

[사진=신은총 하사 어머니 최정애 씨 제공]
[사진=신은총 하사 어머니 최정애 씨 제공]

병원 치료비 위해 월세방까지 전전

신 하사를 제대시킨 후 최 씨는 한방 병원을 제외하고도 10군데의 병원을 함께 다녔다. 그는 “아들의 병을 고쳐 줘야 한다는 생각에 좋다는 병원은 다 다녔다. 하루에 교통비로도 5만 원 10만 원씩 쓰다 보니 점차 빚을 지기 시작했다”며 “지금은 후원을 통해 얼마 전부터 아파트에 살게 됐지만 그 전까지는 집과 가전을 다 팔아 창문이 조그맣게 난 월세집까지 가게 됐었다”고 회상했다. 

병원 치료를 받으러 다니고 약을 먹이는 게 일상이 된 최 씨는 “아프니까 자꾸 진통제 같은 센 약을 먹게 되는데 온 몸에 약기운이 돌면 바로 누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자리에 쓰러져 버린다”며 “가끔 약을 먹고 반신욕을 하거나 씻을 때 넘어질 뻔한 적이 있어 항상 넘어지거나 그 자리에서 잠들까 봐 걱정돼 옆을 떠나질 못한다. 항상 신경이 쓰여 잠을 자는 걸 보고서야 잠이 든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이렇게 하는 게 아들이라 할 수 있는 것 같다. 힘들어도 기쁘게 참아 주고 때론 힘이 들 때 그냥 혼자 속으로 삭인다”며 “나도 재작년부터는 체력이 부족해 진통제를 먹고 있다. 너무 힘들 땐 땅을 딛는 느낌이 아니라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진통제를 먹으면 반짝하고 힘이 나니까 자꾸만 찾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가 절대 아플 수가 없다. 한 번은 종일 부축을 하고 다녀 온몸이 아파 하루 동안 못 일어났는데 집이 완전 비상이었다”며 “스스로 절대 아프면 안 된다고 정신을 다잡는 노력을 한다”고 덧붙였다. 

국가유공자도 혜택 없어… 모든 장병들 다 비슷해

현재 신 하사는 제대 후 국가유공자 6급 2항 판정을 받았다. 최 씨는 “현재 남은 장병들이 58명인데 전역자 34명 중 12명만 국가유공자가 됐다”며 “말이 안 된다. 당시 국군수도병원의 행동을 보고 국가유공자 인정이 어려울 것 같아 변호사를 찾아가 제대 후 바로 인정받았다”고 했다.

최근 국가유공자를 신청한 천안함 생존 장병 두 사람 중 한 명은 떨어졌다고 했다. 그는 “국가에 ‘나 여기 아파요’ ‘다쳤어요’ 라고 직접 문을 두드리는데도 인정해 주지 않는다”며 “나라를 지키다가 이렇게 됐는데도 예우나 보상도 없다. 부모로서 누가 군대 보내고 싶겠나”라고 말했다. 이어 “아들이 하나 더 있었다면 절대 안 보냈을 것이다. 건강한 몸으로 군복무를 하다가 사건이 발생했는데 부모에게 다친 자식 넘겨주고 나 몰라라 하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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