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ㅣ박종평 객원기자] 지난 1편에서는 북한산우이역 1번 출구 근처에 있던 육당(六堂) 최남선 옛집 ‘소원(素園)’이 있었던 곳을 소개했다. 이번 2편에서는 ‘소원 터’를 출발지로 시작한다. 바로 앞 북한산을 바라보며 최남선의 삶으로 인해 역사의 무서움이 발길을 당기는 개운치 않은 뒷맛과 씁쓸한 마음을 큰 호흡으로 뱉어낸다.

 북한산 방향 횡단보도 앞에 서면 건너편에는 ‘단풍 물결’이 일렁인다. 봄의 전령사인 신록이 찾아오기 전 북한산 자락에, 봄빛이 오기도 전에 가을빛이 가득하다. 등산복들이 만들어낸 ‘사람 단풍’이 피었다. 이 탐방기를 위한 답사를 봄이 오기 전인 2월 28일과 3월 6일에 했기 때문이다. 그런 단풍은 신록이 무성한 지금도 비슷할 듯하다.

 산자락에 넓게 드문드문 펼쳐진 독립운동가들의 묘소로 간다. 이번 2편에서는 북한산 기슭에는 드문드문 퍼져 있는 손병희·방정환·여운형·이용문·김도연·신숙·김창숙 선생 등의 흔적과 묘소를 찾아간다. 3편에서는 유림·이시영·김병로·이준 선생으로 시작해 공초 오상순 선생까지 찾아갈 예정이다.

봉황각 별관(방정환 선생 개벽사)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봉황각 별관(방정환 선생 개벽사)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3·1운동 민족대표 손병희의 숨결이 담긴 곳, 봉황각

 먼저 가는 곳은 북한산 등산길 초입에 있으면서도 의외로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공간이다. 그래서 아주 한적하고, 오히려 푸근한 곳이기도 하다.

 1919년 3·1운동과 관련한 천도교 성지이며 민족대표였던 손병희(孫秉熙, 1861~1922) 선생과 관련된 공간이다.

 ‘북한산우이역’ 앞 횡단보도를 건너 ‘도선사·봉황각’ 방향으로 북한산에 오르는 등산객을 따라 10분 정도 곧바로 가면 왼쪽에 ‘봉황각(鳳凰閣)’ 안내판이 보인다. 붉은 벽돌로 된 양쪽 문기둥에는 각각 ‘천도교종학대학원’과 ‘천도교의창수도원’이라는 동판이 붙어 있다.

 문 안에는 소나무 사이로 붉은 벽돌과 화강석으로 된 옛날 건물이 보인다. 맨 앞에 있고, 크기도 크고 고풍스러운 건물이라 ‘봉황각’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이 건물은 지금은 ‘봉황각 별관’이다. 봉황각과는 완전히 다른 별도 건물이다. ‘별관’은 ‘천도교 의창수도원·천도교 종학대학원’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그 때문에 명칭이 혼란스럽기도 하다.

 별관 왼쪽으로 돌아가면 옛 기와집 두 채가 보인다. 앞에 널다란 마당이 있는 큰 기와집이 ‘봉황각’이다. 

 ‘봉황각’은 “봉황이 깃들어 사는 집”이라는 뜻이다. 손병희 선생이 천도교 및 독립운동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1912년에 세웠다. 이곳에서 천도교 지도자들과 훗날 3·1운동 지도자들이 육성되었다. 그 결과로 봉황각은 천도교의 “3·1정신의 발원지, 3·1운동의 발상지”로 여겨진다. 유형문화재 제2호이다. 1913년에 봉황각 옆에 수련도장을 세웠으나, 3·1운동 이후 해체되어 현재는 봉황각만 남았다.

 『조선일보』(「살아있는 ‘삼일운동’ ① 33인의 민족대표」, 1969년 1월 1일)에 언급된 33인 중 유일한 생존자 이갑성(李甲成, 1889~1981) 선생의 인터뷰에 따르면, 손병희 선생은 평상시 포드 자가용과 쌍두마차를 타고 다니며 사치와 대규모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종교 지도자였기에 사람들의 오해를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는 일제 경찰로 하여금 신흥종교인의 허장성세 행동처럼 보이게 하면서 속으로는 독립운동을 하기 위한 위장술이었다고 한다. 봉황각 역시 겉으로는 종교인들의 기도회와 연성대회 등을 하는 곳이었으나, 실제로는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150여 명의 지도자급 인물을 육성해 전국 천도교 교당에 독립정신을 심어준 공간이라고 한다.

 봉황각에서 손병희 선생이 여름을 보내고 때때로 지도자 교육을 했다. 선생의 부인인 주옥경 여사가 가난하게 말년을 보냈던 곳이기도 하다.

봉황각 현판(오세창 선생 글씨)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봉황각 현판(오세창 선생 글씨)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뒤편에는 북한산 백운대가 우뚝 솟아 있다. 건물에는 ‘봉황각’과 ‘강선루(降仙樓)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봉황각(鳳凰閣)’ 현판 글씨는 당시 최고의 학자이며 서예가, 독립운동가인 위창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선생이 썼다. 중국 당나라 명필 안진경(顏眞卿)과 회소(懷素), 북송의 미불(米芾)의 글씨에서 한 글자씩 각각 모사한 것이라고 한다. 『동아일보』(1972년 11월 2일)에서는 ‘봉’은 안진경, ‘황’은 미불이 썼으나, ‘각’은 “낙관이 희미해 필자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고 하면서 그 글자들이 “‘봉(鳳)’자는 한번에, ‘황(凰)’자는 두번, ‘각(閣)’은 세번 대어 쓴 것이 특색”이라고 필획을 주목했다. 글자를 자세히 보면, 『동아일보』 기사처럼 각각의 글자가 그렇게 쓰여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봉황각 안에는 손병희 선생 초상화와 독립운동을 토론하는 모습을 그린 「조선독립숙의도(朝鮮獨立熟議圖)」가 있다.

 봉황각 별관, ‘어린이의 동무, 방정환’의 공간

 지나온 ‘봉황각 별관’에는 특별한 역사가 있다. 봉황각을 소개하는 글들은 봉황각에 있는 홍보물이나, 인터넷에도 많다. 그러나 별관의 역사나 관계 인물 내용은 거의 없다. 완전히 잊혀진 건물과 다름없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깜짝 놀랄 역사가 있다.

 이 건물은 어린이의 영원한 친구였던 소파 방정환(方定煥, 1899~1931) 선생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방정환 선생의 부인 손용화 여사가 봉황각의 주인인 손병희 선생의 셋째 딸이기에 관련이 있다고 할 수도 있으나, 그와는 별도의 특별한 관계가 있다. 방정환 선생의 역사, 그의 숨결 그 자체가 이 공간에 새겨져 있고 지금도 이 건물에서 숨 쉬고 있다고 과언은 아닐 듯하다.

 현재는 ‘봉황각 별관’ 혹은 ‘의창수도원’으로 불린다. 이 건물은 처음부터 우이동 이곳에 지어져 있던 건물이 아니다. 이 건물은 1921년 종로구 경운동 현재의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지어질 때 그 옆(지금의 수운회관)에 함께 지어졌다. 『경향신문』 (「6개 종단 대표 모여 실천하는 종교에로」, 1970년 4월 2일)에 따르면, “천도교총부건물”이었다고 한다. 중앙대교당은 그대로 남겨졌고, 이 건물만 1969년에 지금 자리로 옮겨졌다.

 이 건물에 대해 김후란 기자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소파가 끝내 재정적 운영난에서 뒷감당을 못해 고혈압으로 쓰러지는 원인이 되었던 『개벽사』의 편집실이있던 건물은 손병희 선생께서 지방두목훈련원으로 쓰던 수유리 ‘봉황각’ 옆으로 그대로 옮겨져 영구보존건물이 되었고 경운동 그 자리엔 15층 현대건물이 지금 한창 올라가는 중이었다.” (『경향신문』·「역사와의 대화 ‘선각의 땅’을 찾아 – 특별시리즈…한국의 재발견(5), 1969년 5월 3일)

 방정환 선생이 민족 교육과 계몽을 위해 온몸을 바친 건물이라는 기사이다. 선생은 이 건물에서 우리나라 첫 순수 아동지인 『어린이』와 『개벽』·『별건곤』·『신여성』·『학생』 등과 같은 다양한 잡지를 출판했다. 또 이 건물에서 ‘어린이 운동’을 펼쳤다. 이 건물은 선생의 어린이 운동의 시작과 끝, 그리고 일제강점기 잡지계의 황금기를 만든 문화공간이다. 그 잡지들을 통해 수많은 문인들이 길러졌고, 그들이 그 공간을 오가면서 우리 민족을 바꾸어 나갔다.

 『서울, 공간으로 본 역사』(장규식, 혜안, 2004년)에서는 지하철 안국역에서 천도교 중앙대교당으로 들어갈 때, 왼쪽(동남쪽)에 있는 ‘세계 어린이운동 발상지’라는 기념비와 정문 기둥에 붙어 있는 ‘개벽사 터’라는 기념동판이 있는 공간은 1920-30년대 천도교 계열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거점이었던 ‘중앙종리원 건물 터’라고 했다. 또한 그 건물에는 『개벽』을 발간하는 개벽사 등의 잡지사가 들어 있었고, 방정환 선생이 1921년 5월 1일 천도교소년회를 창립하고, 1922년 5월 ‘어린이 날’을 제정·공포하면서 시작된 어린이 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했다고 한다. 장 교수는 현재의 수운회관 자리에는 1924년 최제우 탄신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수운기념관(水雲紀念館)이 세워졌다고 한다. 그 건물이 지어지기 이전인 1919년 3·1운동 전에는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 사장 ‘이종일 선생의 집’이 있었다고도 했다.

 그런데 장규식 교수의 글과 경향신문 기사와는 차이가 있다. 즉 장 교수는 현재의 ‘세계 어린이운동 발상지’라는 기념비와 정문 입구 왼쪽 공간에 중앙종리원이 있었고, 그곳이 방정환 선생이 활동한 공간이나 현재는 그 건물이 없다고 한다. 경향신문 기사에서는 장 교수와 달리 지금의 수운회관 자리에 ‘천도교총부’가 있었고, 그곳이 방정환 선생이 활동했던 공간이라고 했다. 건물 역시 우이동 봉황각 옆으로 옮겨져 현존하고 있다.

 장 교수의 주장과 달리 김후란 기자의 주장이 맞다면 경운동에서 옮겨진 건물은 방정환 선생이 활동했던 그 공간의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김 기자는 “(우이동 봉황각 옆 별관) 정문 왼쪽 유리창개가 그 방(방정환 선생의 방)에 해당된다”고 했다. 방정환 선생이 활동했던 구체적인 공간까지 특정했다.

 현재의 물질세계에서는 방정환 선생 흔적이 많이 사라졌다. 김 기자가 옳다면, 별관은 잊혀진 건물, 천도교의 수도원 일부가 아니라, 방정환 선생을 21세기에 우리 곁으로 다시 생생히 살아 숨 쉬게 불러올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선생이 글을 쓰고, 아이들과 이야기하고, 많은 문인과 동요작가들과 토론하던 공간을 되살려 그를 재탄생시킬 수 있다. 단지 특정한 한 인물의 공간이 아니라, 세계 최초로 ‘어린이 날’을 만든 그였기에 세계적인 어린이 명소가 될 수도 있다. 관계자와 관계 당국의 적극적인 관심과 재확인을 당부한다.

 북한산 산행을 ‘북한산우이역’에서 출발하는 분들이라면, 꼭 이 별관을 단 몇 분 동안만이라도 들리시길 바란다. 아직은 정확히 확신할 수 없지만, 그 건물은 최소한 방정환 선생이 경운동에서 일할 때 있었던 건물, 다양한 일로 오갔던 건물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 공간에서 김 기자가 언급했던 ‘방정환 선생의 방’을 보고 그의 삶, 어린이를 존중하는 마음을 새겨보았으면 한다.

의암 손병희 선생 묘소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의암 손병희 선생 묘소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대범했던 민족대표 손병희 선생 묘소 가는 길

 ‘북한산우이역’에서 내려 북한산 등산길로 올라가다 보면, ‘에코로바 북한산커뮤니티샵’을 막 지나 왼쪽에 ‘북한산 둘레길 소나무숲길’ 표지판이 보인다. 무심히 가면 둘레길 표지판조차 보이지 않겠지만, 이리저리 구경하며 가거나 둘레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보인다.

 또 그 뒤 울타리 안에 있는 ‘묘소 안내’ 표지판 역시 무언가를 찾는 사람에게는 보인다. 그 표지판을 읽어보면, 울타리 안에 손병희 선생의 묘소가 있음을 알려준다. 손병희 선생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안내판을 보고 둘레길 이정표를 따라갈 듯하다. 묘소 담장을 길을 60여 미터 가면 묘소 정문이 나온다. 그러나 아쉽게도 묘소 정문은 닫혀 있다. 담을 넘지 않는 한 들어갈 수 없다. 아주 진심으로 그를 존경해 묘소에 가고 싶은 사람들은 담이라도 넘겠지만, 담을 넘는 것은 마음이 편치 않다.

 손병희 선생 묘소에 참배하고자 한다면 들어갈 방법이 있다. 정문이 있는 둘레길 대신 다른 길이다. 봉황각으로 가면된다.

 봉황각 별관과 봉황각 사이 왼쪽 쪽문을 열고 숲으로 난 나무 계단을 따라 50여 미터 올라가면 손병희 선생 묘소이다. 이 문은 옛날 나무문으로 밖에서는 들어올 수 없으나, 봉황각 안에서는 열고 나갈 수 있다. 묘소 정문 담 때문에 묘소를 외면하지 말고, 또 급하고 열정이 넘친다고 담을 타지 말고, 봉황각으로 가면 된다. 별관에서 방정환 선생을 만나고, 봉황각에서 독립운동을 논의하던 독립운동가의 기개를 품어보며, 몇 걸음 더 가면 손병희 선생을 만날 수 있다. 동쪽을 바라보는 그의 묘소에서 그의 대범한 호연지기를 들이마시면 잠시나마 대인(大人)이 된 느낌이 든다.

 이 탐방기를 위해 두 차례나 갔으나, 산에 오르기 위해 줄지어 가는 등산객은 있었어도 봉황각과 묘소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 역시 좋은 일이다. 시장이 아니기 때문이고, 경건해야 하는 곳이니 어쩌면 사람이 없는 것이 더 좋은 듯하다. ‘북한산우이역’으로부터 북한산을 오른다면, 한 번은 들려보기를 권한다.

 다음은 손병희 선생이 3·1운동을 했던 이유이다.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어록비 중)

 그의 말에는 민족독립에 대한 믿음과 꿈이 있다. 지금 시대와는 크게 다른 표현일지라도 그의 말을 숲길을 걸으며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꿈꾸는 대로 말하고, 꿈꾸는 대로 행동하라” 쯤 될 듯하다.

 손병희 선생 묘소에서 봉황각으로 내려간다. 몽양 여운형(呂運亨, 1886~1947) 선생의 묘소로 간다. 북한산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앞에서 살펴보았던 처음에 만났던 묘소 정문으로 가는 북한산 둘레길 중 ‘소나무숲길’로 간다. 묘소 가는 길은 일부만 둘레길 구간이다.

1935년 조선중앙일보 사장 시절 여운형(출처 이기형 여운형평전 실천문학사)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1935년 조선중앙일보 사장 시절 여운형(출처 이기형 여운형평전 실천문학사)

 조선의 스타 독립운동가, 몸짱 독립운동가 여운형

 여운형 선생 묘소로 가기 위해서는 둘레길에서 빠져나와 주택가를 지나가야 한다. 서라벌중·고교 근처에 있다. 둘레길 안내 지도에도 묘소가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여운형 선생의 묘소는 네이버나 카카오 지도에 주소를 넣고 가는 것이 편리하다. 30여 분 정도 걸린다.

 묘소는 지금은 주택가에 둘러쌓여 섬처럼 되어 있다. 이 묘소 역시 담장이 있고 문이 닫혀 있다. 정문에는 불굴의 의지와 민족에 대한 사랑이 담긴 “정관매진(正觀邁進, 바르게 보고 힘써 나아가라)”과 “혈농어수(血濃於水, 피는 물보다 진하다)” 어록이 새겨져 있다.

 여운형 선생에 관한 글을 읽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다. 선생은 험난한 독립운동을 했지만 인기 스타였다. 또 요즘 표현으로 하면 ‘몸짱’이었다. 쾌남아였고, 다양한 신체 운동으로 단련되어 스스로 빛을 내는 사람이었다. 그의 삶을 연구한 펜실베니아대 정치학 명예교수·경희대 석좌교수였던 정치학자 이정식 교수는 선생의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너무나 멋진 사람이었고 한국의 근·현대사가 낳은 호걸 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호걸이라 함은 지용(智勇)이 뛰어나고 기개와 풍모가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인데, 여운형은 지용과 기개가 남다르게 뛰어나서 독립운동선상에서 빛나는 공훈을 세웠고 그의 풍모와 인품은 많은 외국 사람들을 압도하여 한국인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도록 하였다. 즉 조선 민족에 대한 존경심을 갖도록 하였다. 아마도 21세기의 독자들은 망국노(亡國奴) 조선 민족에 대한 존경심을 갖게 하는 일이 얼마나 뜻있는 일이었는지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여운형이 살고 있던 시대에는 ‘조선인’이라는 용어 자체가 경멸과 멸시의 표현이었으며 ‘존경’이라는 말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호걸이 되는 조건 중의 하나가 ‘풍모가 있는 것’이라고 했는데, 영운형은 풍채 하나만으로도 많은 사람을 현혹하였다.” (『여운형』, 이정식, 서울대출판부, 2008년)

 『여운형 평전』을 쓴 이기형 선생은 여운형 선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몽양을 말한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몽양은 영원한 청춘’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원로 언론인 이관구 선생은, 몽양은 한 마디로 ‘싱싱했다’고 서슴없이 회상했다. 두산 선생은 몽양을 따른 수많은 사람들이 몽양을 ‘사랑했다’라는 감동적인 표현을 했다. 또 몽양은 ‘너무 착했다’라고도 평하면서 몽양의 눈을 유심히 쳐다본 사람이면 누구나 그 ‘착함’이 잘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몽양의 정적들은 간혹 몽양을 영웅주의자라고 비방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몽양의 용모와 풍채와 호방 대범한 면만을 보고 말한 잘못이다. …… 천성적 민주주의자였다.” (『여운형 평전』, 이기형, 실천문학사, 2004년)

 일제강점기에 법정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를 변호했고, 우리나라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김병로(金炳魯, 1887~1964) 선생은 「동서고금인물좌담회」(『동광』, 1931년 12월 27일)에서 자신이 참여했던 법정에서 가장 인상 깊은 인물로 여운형 선생과 채(蔡)그레고리(1929년 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된 러시아 출신 독립운동가)를 꼽았고, 또 여운형 선생에 대해 인격과 언어의 조리, 체격을 보았는데 선생 이상의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하기도 했다.

 정치 사상 측면에서는 일부 사람들은 선생을 공산주의자로 여기기도 한다. 선생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번역했고, 『공산주의 ABC』 같은 책도 번역했기 때문이다. 선생이 번역한 『공산당선언』은 당시 만주와 식민지 조선에서 널리 퍼져 공산주의 사상 전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선생의 삶을 보면 공산주의자로 볼 수 없다. 이정식 교수는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로 평가했다.

 “여운형은 계급이 없고, 압박이 없는 자유로운 사회를 이상으로 삼았던 민족주의자였다.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했으나 폭력과 독재를 배척했다. ……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당을 통하여 좌우합작에 전력했는데 중국에서의 경험이 강하게 작용했다. 남북을 점령한 미군정과 소련군정 사이에서 융화를 시도했으나 소련군정이 그의 인민당을 남조선노동당으로 강제 흡수하려고 하자 공산 진영과 작별했고, 그를 민정장관으로 추대하려는 미군정당국과의 교섭에 응했다. 암살당한 날 그는 미군정과의 회담 장소에 가고 있었다.” (이정식, 같은 책, 뒷표지) 

 스포츠맨 여운형, 세계를 뒤흔든 조선 청년 손기정

 선생은 기독교인이었고, 가장 천시 받던 사람들인 백정들이 많이 다녀 ‘백정 교회’로 알려진 서울 승동교회를 다녔다. 양반이었으나 평등사상을 갖은 선각자였다. 집안의 반대에도 자신의 집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를 해방시켰다.

 또 선생은 YMCA운동부장으로 야구팀 주장을 하기도 했으며, 우리나라 최초로 야구단의 해외 원정 경기를 하게 했다. 야구는 물론 축구·농구·태껸·철봉·수영을 잘 했으며 관련 단체에도 적극 관여했다.

 중국 생활 중에 잠시 귀국해 마포 앞 한강에서 수영을 하다가 만난 사람이 청산리대첩의 주인공 이범석 장군이다. 수영 하던 선생을 청소년 이범석이 알아보고, 선생의 영향을 받아 중국으로 망명을 했다. 선생에게 스포츠는 청년들을 감동시키고 움직이는 힘이었다.

 선생이 상해에서 1929년 7월에 체포된 것도 운동과 관련이 있다. 상해에서 운동경기를 관람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1932년 7월 대전형무소에서 풀려난 뒤 1933년 3월 『조선중앙일보』의 사장으로 취임했다. 선생의 신문사에는 이태준(소설가)·김복진(조각가)·윤석중(아동문학가) 등 독립운동과 관계된 인물, 그와 관련해 감옥에 다녀온 투사들이 많았다. 선생의 신문사는 독립운동 기지였다. 또 축구 선수 이영선·정용수, 권투 선수 김창엽, 마라톤 선수 유해붕도 기자로 혹은 직원으로 발탁했다.

 그들 중 유해붕(柳海鵬) 기자는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孫基禎, 1912~2002) 선수의 학교 및 마라톤 선배이기도 했다. 손 선수는 또한 선생의 아들과 친구이기도 했고, 또 선생의 신문사인 『조선중앙일보』 주체 전국마라톤대회에서 ‘2시간 25분’이라는 세계 최고 기록 보유한 인연이 있었다. 손 선수가 1936년 올림픽 출전 전에 선생을 찾아와 출전 여부를 상의하자 선생은 “일장기를 달고 나가는 것은 원통하지만 나가야 해. 나가서 조선 민족의 우수성을 전세계에 보여주어야 돼”라고 출전을 권유했다고 한다.

 1936년 8월 9일 오후 5시 31분, 독일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 제10회 세계올림픽대회 마라톤대회에서 손기정 선수는 ‘2시간 29분 19초 2’로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다. 함께 출전한 남승룡(南昇龍, 1912~2001) 선수는 ‘2시간 31분 2초’로 3위를 했다.

 이들의 승리는 뜻하지 않게 10여 일 뒤에 선생의 『조선중앙일보』의 휴간과 송진우(宋鎭禹, 1887~1945) 선생이 사장인 『동아일보』의 정간을 가져왔다. 『조선중앙일보』는 끝내 폐간되었다. 일제에 저항했던 기자들이 민족 양심에 따라 우승자 손 선수의 유니폼 가슴에 있던 일장기를 지운 ‘일장기 말살 사건’ 때문이다.

심훈의 오오, 조선의 남아여! (조선중앙일보 1936년 8월 11일, 4면)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심훈의 오오, 조선의 남아여! (조선중앙일보 1936년 8월 11일, 4면)

 태극기를 염원하며 일장기를 지운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

 8월 9일, 손 선수가 우승하자, 『조선중앙일보』에서는 8월 10일 호외를 발행했고, 8월 11일 대대적인 관련 기사와 함께 4면에는 심훈(沈熏, 1901~1936) 선생이 전날 발행했던 호외 뒷면에 축하를 위해 즉흥적으로 쓴 (詩) 「오오, 조선의 남아여! - 마라손에 우승한 손·남 양군에게 -」란 시를 인쇄해 실었다.

 같은 날 신문 조간 4면에는 시상대 위에 선 1등 손 선수와 2등 어니스트 하퍼(Ernest Harper), 3등 남승룡 선수의 사진이 게재되었다. 그런데 손 선수와 남 선수의 유니폼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일장기가 없었다. 고의로 일장기를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당시는 그 사진 속 일장기 말살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말살한 당사자들만이 알고 있었다.

손기정 선수 베를린올림픽 일장기 말살 사건 관련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 비교 사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손기정 선수 베를린올림픽 일장기 말살 사건 관련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 비교 사진

 같은 날 『동아일보』에서도 시상대에 선 손 선수의 사진을 크게 실었다. 1판에서는 일장기가 확실히 나타나 있었으나, 2판에서는 완전히 지워졌다. 『조선중앙일보』 사진처럼 당시는 아무도 몰랐다. 문제가 터진 것은 8월 25일자 『동아일보』였다. 2판의 삭제된 사진을 보고 일제 경찰에 누군가 밀고를 하면서 오늘날 널리 알려진 ‘일장기 말살 사건’이 일어났다.

 『동아일보』의 체육 담당 기자였던 이길용(李吉用, 1899~?, 6·25중 납북) 기자, 화가로 동아일보에 재직 중이었던 청전 이상범(李象範, 1897~1972), 편집국장 설의식(薛義植, 1900~1954) 선생 등이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 또 『동아일보』 송진우 사장도 사직하고 신문도 정간되었다.

 8월 25일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살 사건’으로 인해 그동안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던 『조선중앙일보』의 8월 13일자 ‘일장기 말살 사진’이 다시 수면에 드러났다. 담당 기자 유해붕과 사진기자 3명이 체포되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조선중앙일보』는 휴간했다가 얼마 뒤 일제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아예 스스로 폐간했다. 여운형 선생의 서울 계동 집은 그 때 폐간을 하면서 신문사 주주들이 결의해 선생의 공로를 보답하는 차원에서 기증한 집이다.

 ‘일장기 말살 사건’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다. 가장 큰 논란은 어느 신문사가 먼저 말살 했느냐이다. 『조선중앙일보』가 먼저 했느냐, 『동아일보』가 먼저 했느냐. 그동안 관련 연구를 보면, 『동아일보』가 먼저 했다는 주장이 있다가 『조선중앙일보』가 먼저 했다는 주장이 생겨나고, 최근에는 다시 『동아일보』가 먼저 했다는 주장으로 바뀌어 왔다.

 ‘최초’ 문제가 중요할지라도 분명한 것은 두 신문 모두 8월 13일, 같은 날에 손기정 선수의 유니폼에 있는 일장기를 지웠다는 사실이다.

 기존의 연구나 관련 기록들을 보면, 어떤 과정에서 하필 그 두 신문에서만 일장기를 지웠는지에 대한 내용이나 연구는 없었다. 이번 탐방기를 쓰기 위해 관련 기록들을 살펴보았다. 사건 당시 『동아일보』의 주동자였던 운동 담당기자 이길용 기자가 1947년 11월 5일 쓴 「세기적 승리와 민족적 의분의 충격 – 소위 『일장기말살』 사건’」(『신문기자수첩』, 서울 모던출판사, 1948년)에서는 ‘최초’나 『조선중앙일보』관련 언급은 없다. 

 “사건이라기 보다 머마어마한 일대 사변(事變)이니, 동아일보란 크나큰 기관의 문이 닫처젓고 날마다 중압속에서 일망정 왜노(倭奴)의 그 눈초리를 받어가면서도 조석으로 그렇게도 우렁차게 활기있게 굴든 윤전기가 시름없이 머머 녹슬고 있으며 …… 세상이 알기는 백림 올림픽 마라손의 일장기 말살 사건이 이길용의 짓으로 꿈이어진 것만 알고 있다. 무리도 아니다. 사내의 사시(社是)라고 할가, 전통이라고고 할가, 방침이 일장기를 되도록은 아니 실었다. 우리는 도모지 실찌 않을 속심이었든 것이다. …… 이러한 우리로써 어찌 손기정 선수 유니폼에 일부러 거려너은 듯한(전송사진으로서는 너무 일장(日章) 마크가 선명하였다.

= 문제의 사진은 『大阪 朝日 電送 所載) 일장 마크를 그대로 실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월계수 화분을 들고 촬영한 손 선수 인물로는 처음인지라 너코 싶은 욕심에 그것을 오려서 화백 이상범 형(당시 동아사 근무)에게 좀더 수정을 하되 일장 마크를 아니 보이도록 부근을 흐려버리라고 필자가 부탁을 하였다. 그 당시의 감분과 환희가 부지불식간에 조선 민족혼의 본연으로 돌아갓고 무엇 하나 겁 없는 승리의 환열이 조선 이 따의 청년에게 큰, 새로운, 빛나는 힘을 부어준데 도시(都是)가 도취되었든 것이다. 운동기자 생활 16년! 이처럼 흥분되고 기꺼운 때가 또 언제 있었으랴. 이러든 나는 이 나라의 아들인 손선수를 왜놈에게 빼앗기는 것 같은 느낌이고 그 『유니폼』 일장 마크에서 엄숙하게도 충격을 받았다.” ((『신문기자수첩』) 

 이 기록으로 보면, 『동아일보』의 사내 분위기와 더불어 이길용 기자가 단독으로 일장기를 잘라냈고, 이상범 화백이 이 기자의 요청에 따라 오린 부분을 수정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중앙일보』의 유해붕 기자는 다음과 같이 당시 사건을 회고 했다.

 “당시 사장이든 몽양 여운형 선생은 필자보고 ‘붓대가 꺾거질 때까지 마음것 민족의식을 주입할 것이며 그놈들의 주의를 드를 필요는 없다’고 말하였다. 8월 14일 오후에 손군이 승리한 문제의 사진이 백림에서 일본 동경으로 전송되어 대판조일신문이 게재한 것을 일장 마-크만을 말살하고 전사(傳寫)발행하였으나 그 후 수일을 경과하도록 무사하였다. 약 1주일 후 정식 사진이 동맹통신을 통하여 온 것을 동업 동아일보는 역(亦) 우리와 같이 일장 마-크를 말살하고 게재한 것을 발견 당하야 이길용씨 외 6, 7명의 동아일보 기자 제씨가 경기도 경찰부에 피검되자 당시 조선중앙일보사 체육기자로 있는 필자도 1주일 전에 이미 좀 명백치 못한 전송사진을 이용하였스나 ‘일장 마-크’만은 말살하였스니 발견만 당하면 기필코 피검될 것은 각오하였다. …… 그 때 ‘일장 마-크’를 말살하였다고 필자는 우월감을 갖은 일은 한번도 없다. 그 이유는 조선중앙일보 사내의 사상의 조류는 당시 으레히 어떠한 때든지 일장기 같은 것은 일차도 게재한 경험이 없다. 그림으로 누구든지 필자의 자리에 있스면 역(亦) 왜적의 기를 말살하였을 것이다.” (전 체육기자 유해붕, 「일장기 말살하기까지, 이 손으로 부활시켜 통쾌사」·『조선중앙일보』, 1947년 7월 1일)

 유해붕 기자는 사장 여운형 선생의 민족의식 고취 주장과 『조선중앙일보』의 사내 분위기 때문에 누구라도 그 자리에 있으면 일장기를 말살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만큼 『조선중앙일보』는 민족의식이 강했던 신문으로 볼 수 있다.

 이 두 기록을 보면, ‘일장기 말살 사건’은 이길용 기자와 유해붕 기자가 각자의 신문사에서 주도한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최근 필자가 발견한 이길용 기자의 다른 기록을 보면, 이 사건은 두 기자가 서로 무관하지만 동시에 개별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두 기자가 공동으로 만든 작품이다.

 이 기록은 1947년 11월 5일 쓴 「세기적 승리와 민족적 의분의 충격 – 소위 『일장기말살』 사건’」 보다 앞선 기록이기에 더욱 중요하다.

중앙신문 1947년 4월 22일 2면 동아일보 이길용기자 인터뷰 내용(국립중앙도서관)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중앙신문 1947년 4월 22일 2면 동아일보 이길용기자 인터뷰 내용(국립중앙도서관)

 1947년 4월 19일 제51회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서윤복(徐潤福, 1923~2017) 선수가 2시간 25분 39초로 세계 신기록을 수립한 며칠 뒤 『중앙신문』에 실린 기사이다.

 “우리의 기억도 새로운 제12회 백림 올림픽대회 당시 우승한 손기정씨의 가슴에 부친 일장기말살사건으로 당시 동아일보 체육부장이엿든 이길용씨, 조선중앙일보 체육부기자 유해붕씨는 일제의 탄압으로 경찰에 구금까지 당한 사실이었섯는데 이길용씨는 서군이 우승하엿다는 반가운 소식을 듯고 다음과 갓치 말하엿다. ‘…… 우리의 대표인 손군이 일장기는 가슴에 부치고 월게관을 쓰게 되엿슬 때 차라리 내가 일제의 탄압의 칼, 총 아래 죽을지언정 손군의 가슴에 부친 일본기를 그대로 신문에 낼 수는 업서 각오를 하고 당시 조선중앙일보에 잇든 유해붕군과 갓치 태극기로 고처버렷다. 이러한 기억도 새로운 가운데서 해방 족국의 영예를 짊어지고 당당히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세계신기록으로 우승을 하엿다는 소식을 듯고 누구보다도 감회 깁흔 나는 감격의 눈물을 흘엿다.’” (「이길용씨 감회(感懷)」·『중앙신문』(1947년 4월 22일)

 이 기사 속 이길용 기자의 인터뷰에 따르면, 『동아일보』의 이길용 기자는 『조선중앙일보』의 유해붕 기자와 함께 일장기를 지우는데 앞장 선 것이다. 이길용 기자와 유해붕 기자, 손기정 선수는 모두 서로 아주 밀접한 사람들이다.

 강점기 신문을 조사해 보면, 이들은 유해붕과 손기정은 학교 선후배이며, 마라톤을 함께 한 사이다. 이길용 기자는 이들의 활동을 취재하고 후원했던 사람이다.

 그런 그들이었기에 이길용 기자와 유해붕 기자가 서로 만나 일장기를 지울 것을 공동으로 결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의를 한 뒤에 각자의 신문사에 돌아가 각각 일장기를 지웠고, 같은 날 일장기를 지운 신문을 내보냈다고 보인다. 당시 다른 신문에서 일장기를 지우지 않았던 것은 세 사람의 특수한 친분과 민족의식이 작용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8월 13일과 25일 사진들을 비교해 보아도 13일 사진은 같은 사진을 활용했으나, 25일 『동아일보』 사진은 전혀 다른 사진이다. 13일의 같은 사진으로 보아도 두 사람의 공동 작품임을 추정할 수 있다.

 다만 이길용 기자가 “태극기로 고쳤다”고 한 것과 11월에 쓴 ‘일장기를 오렸다’와는 차이가 있다. 전송받은 사진에서 일장기를 태극기로 고쳤다가, 사진이나 태극기 상태 등 다른 이유로 아예 일장기를 지웠던 것으로 보인다.

 두 기자가 관여해 처음 일장기를 지운 8월 13일 사진에도 차이가 있다. 이길용 기자의 『동아일보』에서는 손기정 선수만 크게 내보내며 일장기를 지웠지만, 유해붕 기자의 『조선중앙일보』에서는 우승한 세 선수를 모두 내보내며, 손 선수는 물론 남 선수 가슴에 있던 일장기까지 지워버렸다.

 유해붕 기자의 두 선수 유니폼 상의 일장기 말살이 가능했던 이유는 유 기자가 언급한 것처럼 『조선중앙일보』 사장 여운형 선생의 지침과 사내 분위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또 이길용 기자의 『동아일보』 역시 사장 송진우 선생과 사내 분위기 영향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우선하는 것은 이길용 기자와 유해붕 기자 두 사람의 일장기에 대한 고민과 ‘말살’ 결단이다.

 말살 사건의 주인공들은 6·25 전후로 언론 지상에서 사라졌다. 이길용 기자는 납북되어 생사를 알 수 없고, 유해붕 기자는 그 어떤 언론에서도 등장하거나, 언급되고 있지 않다. 일장기를 지운 의사(義士)로 기억되나, 그들이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 미스테리다.

 어느 신문에서 먼저 일장기를 지웠느냐도 중요하겠지만, 사라진 두 사람의 역사를 다시 찾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들에 대해서는 어느 언론에서도 주목하지 않고 있다. 일을 만든 사람 대신 ‘최초’만이 관심사이다. 버려야 할 ‘1등주의’ 문화 잔재이다.

 여운형 선생은 강점기에 조선체육회장으로 추대되었고, 체육계와 지속적 관계를 맺으며 우리 스포츠의 역사를 썼다. 선생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는 선생이 암살된 뒤 장례식장에서도 드러난다,

 선생의 장례식에서 손기정 선수는 물론 김성집(제1회 전 일본 역도대회 겸 베를린올림픽 파견 선발대회에 참가, 미들급에서 우승) 선수 등 스포츠 선수들이 흰 상복을 입고 선생의 영구를 호위하고 운구와 하관을 담당했다. 여운형 선생에게 스포츠는 독립운동의 수단이며 방법이었다. 그는 민족의 스타였다.

여운형 선생이 세운 이순신 장군 송덕비(한겨레 신문 2005년 5월 10일)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여운형 선생이 세운 이순신 장군 송덕비(한겨레 신문 2005년 5월 10일)

 여운형 선생이 세운 이순신 장군 추모비는 어디에?

 선생은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고 삶을 닮으려 했다. 『여운형 평전』에 따르면, 선생이 1914년 중국으로 유학 갈 때 친구가 작별시를 짓자, 선생은 다음의 답시를 주었다고 한다.

 “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서해어룡동 맹산초목지. 바다에 맹서하니 용과 물고기가 감동하고 산에 맹세하니 나무와 풀도 알아주는구나)”

 『여운형 평전』에서는 읽기에 따라 선생이 지은 시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 답시는 선생이 지은 시가 아니다. 임진왜란 때 인물인 조경남 선생이 쓴 『난중잡록』 1593년 10월 27일에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20운(韻)을 노래했는데, 그중에 ‘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 등의 구절이 있었다.”에 처음 소개된 이순신 장군의 시이다. 그 뒤 정조 때 편찬된 이순신 장군의 기록을 모은 『이충무공전서』에 다시 실렸다.

 선생의 답시는 선생이 이순신 장군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존경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조선중앙일보 사장 시절 그의 집 벽에는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가」도 걸려 있었다고 한다.

 여상화(여운형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관리자)가 『한겨레신문』(2005.05.10.)에 기고한 「몽양의 이순신 사랑」에 따르면, 장군을 존경했던 선생은 충남 아산 음봉면에 있는 이순신 장군 묘역 정화사업을 했다고 한다.

 1934년 11월, 묘소를 둘러보고, 황폐해진 묘역에 가슴이 아파 묘역 단장 사업을 구상하고, 1935년 묘를 허물어진 묘를 손질하고, 나무를 심고 서예가 이각경 선생이 쓴 송덕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송덕비는 언젠가부터 사라졌다고 한다. 

여운형 선생이 세운 이순신 장군 추모비는 없다!

여상화씨가 기고한 글에 실린 송덕비 사진을 추적해 보았다. 『한겨레신문』에서 인용한 1991년 발간 『몽양 여운형 전집』에 실린 ‘이순신 송덕비’ 사진은 실제로는 1932년 현충사 재건 당시 ‘이충무공유적보존회’에서 세운 비석이다. 충남 아산 현충사에 있는 ‘옛 현충사’ 건물, 즉 지금은 ‘구(舊) 본전’이라고 불리는 건물 오른쪽에 세워져 있는 비석이다.

‘이순신 송덕비’ 사진과 ‘이충무공유적보존회 비석’ 사진을 비교해 보면, 두 비석은 같은 비석이다. 글자 행수와 비석 속 글자의 위치 등이 일치하고, 유심히 보면 글자도 일치한다. 그러면 이 비석은 여운형 선생이 세운 것일까?

 비문(碑文)을 읽어보면, 이 비석 건립 시기는 “공 나신지 삼백팔십팔년 임신 오월 이일”이라고 했으니 ‘1932년 5월 2일’이다. 또 건립 주체도 “리충무공유적보존회”라고 되어 있다. 시기와 주체로 보면, 이 시기에 여운형 선생은 독립운동을 이유로 대전형무소에서 갇혀 있었다. 선생은 비석이 세워진 뒤인 7월에 출옥했다. 건립 주체도 『조선중앙일보』와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당시 사회 지도급 인사들이 만든 “리충무공유적보존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선생은 1933년 2월에야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했다.  이로 보면 ‘이순신 송덕비’를 선생이 세웠다는 『몽양 여운형 전집』 속 설명은 오류이다.
 

아산 현충사 구(舊)본전 옆 “리충무공유적보존회가 건립한 비석(2018년)
아산 현충사 구(舊)본전 옆 “리충무공유적보존회가 건립한 비석(2018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늘신한 소나무와 멋진 시비가 있는 솔밭근린공원

 여운형 선생 묘소에서 다음에 갈 곳은 이용문 장군 묘소이다. 묘소는 독립운동가 묘역이 아니라서 그런지 강북구에서 만든 ‘강북구 탐방과 체험 지도’와 ‘스탬프 힐링투어’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대신 ‘북한산 둘레길 종합안내’에는 나온다. 강북구가 만든 여러 지도와 둘레길에서 만나는 여러 안내 지도를 보면, 모두 제각각이다. 지역에 관련된 인물이나 장소들이 표시된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 지도의 목적과 용도의 차이 때문인 듯하다.

 이용문 장군 묘소는 ‘박을복자수박물관’ 근처에 있다. 여운형 선생 묘소에서 삼양로 큰길로 나와 ‘솔밭근린공원’으로 가서 메리츠화재연수원-박을복자수박물관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가면 된다. 삼양로 큰길을 따라 솔밭근린공원 입구쯤 가면 그 앞에 “고(故) 이용문장군·김정자 여사 묘소 입구”라는 오벨리스크 형태의 화강암 푯말을 볼 수 있다.

 푯말에서 오른쪽 길로 가면 된다. 봉황각에서 여운형 장군 묘소를 거치지 않고 ‘소나무숲길 둘레길’로 갈 수도 있다. 그러나 둘레길코스 보다는 여운형 선생 묘소를 거쳐 솔밭근린공원을 통해 이용문장군 묘소로 가는 길을 추천한다. 도심을 지나야 하는 불편이 있으나, 이왕 나선 역사탐방길이라면 여운형 선생 묘소를 제외하면 이 탐방의 의미를 50퍼센트는 빼먹는 것이기 때문이다. 솔밭근린공원까지는 10여 분 걸린다.

 공원에는 늘씬한 소나무들이 한가하게 여유로운 공간에 자리 잡고 있다. 소나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둘레길을 걷는 그 이상으로 좋다. 시민들이 운동하거나, 산책하거나 터를 잡고 앉아 있으나 탐방객이 불편할 정도로 붐빌 정도는 아니다. 공원 안에는 이흥렬(1909~1980) 시인의 ‘바위고개’, 유치환의 ‘바위’, 윤석중의 ‘반달’ 같은 시가 시비로 혹은 나무에 걸려있다.

 다음은 그 중 한 편인 김종길 시인의 「아픔」이란 시다.

 “사람들은 꽃을 좋아하지만
  그것이 얼마마한 아픔 끝에
  피어나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나도 이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것을 알았다

  초봄부터
  뜰의 철쭉 포기에서
  꽃망울들이 애처롭게, 애처롭게

  땀나듯 연둣빛 진액을 짜내던
  그 지루한 인내를 지켜보고서야
  비로소 그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독립운동가들을 멋지게 살다간 화려한 꽃처럼 여길 수도 있지만, 그들 역시 시인이 말한 것처럼 수 없는 아픔을 겪으며 꽃으로 피어난 분들이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들은 보통의 꽃과 달리 한 번 피고 지는 꽃이 아니라, 이 땅에 영원히 지지 않는 불멸의 꽃이다. 그들의 아픔 역시 영원하다. 그 아픔을 우리가 잊는다면, 우리는 또다시 역사의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

 우이동에 있는 ‘안국동 별궁 정화당’ 미스터리

 소나무 숲속을 소요하면서 10여 분을 쉬었다가 이용문장군 묘소로 간다. 솔밭근린공원 서북쪽 메리츠화재연수원 쪽으로 가서 박을복자수박물관 방향 길을 따라가면 된다. 메리츠화재연수원으로 가다보면 ‘동양화재중앙연수원’이라는 현판이 붙은 조선 시대 대갓집 정문 같은 문이 있다. 그 정문 안 연수원 공간에는 강북구에서 만든 그 어떤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특별한 건물이 있다.

 네이버 지도에는 연수원 안쪽과 ‘박을복자수박물관’ 사이에 ‘안국동(安國洞) 별궁(別宮) 정화당’으로 나온다. 이름을 보면 조선 궁궐과 관련된 곳으로 볼 수 있다. 때문에 국가나 지자체가 관리하는 시설로 여길 수 있으나, 이곳은 사유지이기에 시민에게 개방되어 있지 않다.

 안국동에 있어야 할 ‘안국동 별궁 정화당’이 왜 이곳 우이동에, 메리츠화재연수원 안에 있을까?

 별궁의 역사를 보면, 이해가 간다. 본래 안국동 ‘옛 풍문여고 터’에 있었던 조선 시대 별궁 건물의 하나였다. 안국동 별궁 터에서는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살았고, 성종이 이름을 지은 ‘풍월정(風月亭)’이란 정자도 있었다. 고종 때에 비로소 왕실 직속 별궁이 되었다. 그때부터 ‘안국동 별궁’이란 이름이 생겼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된 순종의 두 번의 혼례도 그 별궁에서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풍문여고로 변했고, 풍문여고가 이전한 뒤 현재는 공예박물관으로 변신하고 있다.

 그런 오랜 역사를 가진 ‘안국동 별궁’에 속한 한 건물이 난데없이 우이동에 있다. 그 까닭은 풍문여고 초기 때까지도 남아 있던 ‘안국동 별궁’의 몇몇 건물이 여러 곳에 매각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의 ‘정화당’도 그런 건물의 하나이다. ‘정화당’은 이곳으로 옮겨져 ‘선운각’이라는 요정으로 사용되다가 김성곤 쌍용그룹 회장 별장이 되었다. 김 회장 사후 ‘쌍용중앙연수원’이 되었고, ‘동양화재중앙연수원’, 그리고 지금의 ‘메리츠화재연수원’으로 변해왔다.

 그 안은 들어갈 수 없어 어떤 모습인지 볼 수 없다. 위성사진으로 윤곽은 볼 수 있으나 자세히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이용문 장군 묘소 근처에 가면 길 오른쪽 위장막이 쳐진 곳이 있다. 위장막 구멍을 통해 안을 아주 조금 엿볼 수 있다. ‘정화당’은 안보이나, 그 뒤편에 놓인 다양한 많은 불상과 석물들이 보인다. ‘정화당’과는 관계없는 사적으로 수집한 석물들인 듯하다.

 ‘정화당’은 일제강점기에 이미 민간에 매각된 건물이다. 그러나 국가나 지자체에서 한 번은 조사해야 할 건물이다. 또 메리츠화재 역시 사유재산이기 이전에 국가 소유였던 건물임을 고려해 국민에게 되돌려 줄 고민을 한 번은 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지금처럼 사방을 담장으로 막고 위장막까지 쳐 놓고 극소수만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대기업이 할 일은 아닌 듯하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역시 기부를 강제 혹은 강요해서는 안된다. 기업이 오랫동안 소유하면서 관리해왔던 공로와 지출비용 등은 적극 지불해야 한다. 그래야 다른 문화재들의 기부나 기증이 확대될 수 있다. 국가나 지자체라는 권력과 권한, 문화재라는 이유만의 반강제적인 강탈 방식은 후진국에서나 할 일이다.

 조국의 방패가 된 전직 친일 군인 이용문
 
 메리츠화재연수원에서 박을복자수박물관을 지나면, 다시 이용문장군 묘소 입구 푯말이 나온다. 그 길을 따라 5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손병희 선생 묘소 앞의 ‘소나무숲길’ 구간을 만난다. 손병희선생 묘소와 이어진 둘레길이다. 그 바로 옆에 철문으로 굳게 닫힌 이용문 장군 묘소가 있다.

 이용문(李龍文, 1916-1953) 장군은 일제강점기 일본 육사 출신으로 해방 후 국군에 입대했다.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 2010년)에 따르면, 1942년 “조선인으로 드물게 일본군 참모본부인 대본영(大本營)에서 근무”했었고, 1943년에는 수마트라와 말레이시아, 미얀마 등지에서 근무하다가 일본이 패망한 뒤 사이공수용소에서 풀려났다고 한다.

 그러나 친일에 따른 구체적인 악행 여부는 『친일인명사전』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 반면에 같은 사전에서는 “6·25 전쟁이 일어나자 5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울 시내에서 유격전을 벌이다 좌절한 후 3개월 간 은신하다가 9·28 서울 수복후 계엄민사부장, 육군보병학교 기획부장 등을 맡았다. …… 1953년 6월 24일 지리산지구 빨지산 토벌작전을 지휘하던 중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지역에서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등과 같은 사실만을 기록하고 있다.

 묘소 입구에는 그의 공적을 자세히 설명하는 두 개의 안내판이 있다. 그 안내판에서 눈길을 끄는 몇몇 부분은 군인 이용문을 생각을 보여 준다.

 전쟁 전 정권은 그에게 ‘정치인 동향 파악지시’를 요구했으나 거부했고, 생포되어 사형 집행될 12명의 빨치산을 포용해 사형집행을 반대했으며, 1952년 5월 부산정치파동 때 국방부 장관의 병력 차출 지시를 거부했다는 점이다. 그는 군인의 정치개입을 반대하고 정치적 중립성을 강조했던 인물로 전형적인 직업군인이다.

 이 묘소에는 그의 부인 김정자 여사도 합장이 되어 있는데, 그녀는 『한국결혼풍속사』를 저술했다.

 우리 나이로 38세에 사망한 이용문 장군의 삶을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태어나서 30세까지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전형적인 일제강점기 사람이다. 물론 그 시기 사람 중에도 독립운동을 한 분들이 있다.

 그러나 그가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일본 육사 입학이나 일본군 활동을 했다고 일방적으로 비난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 과정에서 민족에 극악한 해를 끼쳤다면, 비난을 면할 수는 없다. 이용문 장군 같은 사람이 있기에 역설적으로 변절하지 않았던 독립운동가가 더 귀히 존경받을 수 있기도 하다. 해방 후의 그의 활동은 논란이 있을 수 있는 강점기 모습과 달리, 민족에 헌신을 한 존경받을 인물이다.

 인생 후반기를 접어들면서 더욱더 그의 삶의 생각하게 된다. 전반기는 지났으니, 후반기만큼은 제대로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해 준다.

독립운동가이며 나라 살림꾼, 김도연 선생

 이용문 장군 묘소에서 다시 솔밭근린공원으로 내려간다. 독립운동가들의 묘소를 찾아가려면 그곳에서 능선을 따라 가도 되나, 독립운동가 묘역들을 산길로 다니기엔 길을 찾기 불편하기 때문이다.

 첫번째로 들릴 곳은 김도연 선생 묘소이다. 솔밭공원 안 둘레길을 따라가다가 국립4·19묘지와 4·19전망대 사이에 있는 순례길 구간으로 들어가 ‘보광사’ 쪽으로 올라간다. 이용문 장군 묘소에서 김도연 선생 묘소까지는 40분 정도 걸린다. 이번 탐방에서는 4·19묘지는 제외했다. 4·19묘역 자체는 짧게 쓸 수 없는 혁명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보광사’까지는 30분 걸린다. ‘보광사’는 안내판에 따르면, 1788년 금강산에서 수도한 원담스님이 창건했다고 한다. 다른 절처럼 신라나 고려, 혹은 조선 초기에 연원을 둔 사찰은 아니다. 조용하고 한적하다.

 김도연 선생 묘소가 가깝게 있다. 보광사 주차장 옆에 있는 둘레길로 올라간다. ‘북한산둘레길(정릉동) 방향’으로 5분 정도 가다 보면 다시 이정표를 만난다. 그 이정표 바로 옆에는 ‘사산금표(四山禁標)’가 있다. ‘궁금장(宮禁場)’이란 글씨가 써진 바위가 안내판 위에 있다. 이는 나무 벌채와 묘를 쓰는 것을 금지하는 조선시대 표시이다. 바위를 자세히 보면 글씨가 새겨져 있다. ‘사산금표’에서 위쪽으로 20미터 가서 다시 왼쪽으로 5분 정도 가면 ‘인수재’라는 산속 음식점 지붕이 보인다.

 ‘인수재’로 내려가는 길 근처에 ‘김도연 선생 묘소’가 있다. 김도연(金度演, 1894~1967) 선생은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 해방 이후에는 정치가로 활동했다. 1919년 동경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을 주도했다. 그 뒤로 미국에 유학, 경제학 박사가 되었고, 돌아와 여러 기업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독립운동도 계속해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체포되어 2년간 감옥 생활을 했다. 1950년 이승만 정부의 초대 재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1965년 한일협정 비준을 반대해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묘비 옆면에는 ‘사귀정직(事貴正直, 일을 할 때는 정직이 귀중하다)’는 그의 글씨가 새겨 있다. 그의 호는 상산(常山)이다. 호처럼 그는 언제나 산처럼 무겁고 변함없었고, 국민을 위해 많은 먹거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했다. 묘비는 장관이나 국회의원이 아닌 ‘박사’라는 호칭이 새겨져 있다.

 온 가족이 독립운동을 했던 신숙 선생과 논란의 서상일 선생

 다음으로 갈 곳은 ‘신숙 선생 묘소’이다. ‘김도연 선생 묘소’ 근처에 ‘김창숙 선생’·‘서상일 선생’·‘신숙 선생’ 묘역으로 가는 이정표가 있다. 이정표를 따라 인수재로 내려가 다시 그 아래로 내려가면 된다. 5분 정도 걸린다.

 신숙(申肅, 1885~1967) 선생은 천도교 출신 독립운동가이다. 3·1운동의 「독립선언서」를 보성사 사장 이종일 선생과 함께 인쇄해 전국에 배포했다. 상해·북경·만주 등에서 무장투쟁을 포함한 다양한 독립운동과 천도교 포교에 노력했다.

 해방되어 돌아온 뒤, 1948년 4월, 김구·김규식 선생과 함께 평양으로 가서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해 분단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부인 최백경 여사는 의병장 최도환 선생의 딸로 두 아들(신원균·신화균)도 독립운동가로 키웠다. 온 집안이 독립운동에 뛰어든 독립운동 명문가이다.

 ‘신숙 선생 묘소’에서 다시 인수재, ‘김도연 선생 묘소’로 올라가 이정표를 따라 ‘서상일 선생 묘소’로 간다. 10분 정도 걸린다.

 서상일(徐相日, 1886~1962)은 1909년 안희제 선생 등과 함께 독립운동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했다. 3·1운동에 참여하고, 4월 상해 임시정부의 선언문과 강령을 대구 등지에 배포하다가 체포되었다. 1920년에는 동경에서 영친왕과 일본인 이방자의 결혼에 반대해 이방자가 탄 가마에 폭탄을 던지려다 체포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기에 친일활동을 했다는 논란이 있다. 묘비는 묘 옆에 없고, 동남쪽 20미터 정도에 떨어져 있다.

 서상일 선생 묘소에서는 김창숙 선생과 유림 선생 묘소로 가는 길이 정반대이다. 먼저 ‘김창숙 선생 묘소’로 간다. 10분 정도 걸린다. ‘김창숙 선생 묘소’ 근처에 ‘양일동 선생 묘소’도 있다. 5분 거리다.

 유학자 독립운동가, 앉은뱅이 혁명가 김창숙 

 김창숙(金昌淑, 1879~1962) 선생 묘소 가는 길에는 아래에 작은 계곡이 있다. 가물지 않아 물 내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묘소 입구에 도착하면 오석(烏石)으로 된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先生) 묘소(墓所)’라는 안내석이 있다.

 김창숙 선생은 유학자 출신 독립운동가이다. 또 혁명가이다. 1905년, 고종에게 을사오적의 처형을 상소했고, 그로 인해 8개월의 옥고를 치뤘다. 1906년에는 국채보상운동에 앞장 섰다. 성균관대학을 설립했다.

 상해에 있을 때 의열단(義烈團)의 나석주(羅錫疇, 1892~1926) 의사(義士)를 상해임시정부의 이동녕·김구 선생과 협의해 국내에 파견했다. 나 의사의 거사 자금과 무기(폭탄·권총)는 김창숙 선생이 준비한 것이다. 김창숙 선생의 계획에 따라 나 의사는 국내로 잠입해 일제의 경제수탈기관인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졌다. 일제 경찰과 총격전을 하다가 자결했다. 나석주 의사의 시신은 미아리 공동묘지에 가매장되었다가 가족들에 의해 황해도 재령으로 옮겨졌다.

 『서울 근현대 역사기행』(정재정·염인호·장규식, 혜안, 1999년)에 따르면, 식산은행은 현재 소공동 롯데백화점 자리에 있었고, 토지조사사업으로 우리의 농토를 약탈해 일본인들에 불하했던 동양척식회사는 을지로 2가 외환은행 본점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정재정 등이 말한 외환은행 본점은 지금은 ‘하나금융그룹 명동사옥’으로 바뀌었다. 본점 오른쪽 모퉁이 안쪽에 ‘나석주 의사 동상’은 그때의 의혈 청년 나석주 의사의 역사를 생각하게 해준다.

 이 사건과 관련해 김창숙 선생은 1927년 6월, 밀정들의 밀고로 상해에서 일본 영사관 소속 형사에게 체포되었다. 징역 14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재판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일본 법률을 부인하는 자이다. 일본 법률을 부인하면서 일본 법률가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그것은 대의에 얼마나 모순되는 일인가? …… 나는 포로이다. 포로이면서 구차하게 살고자 하는 것은 치욕이다.” (『유림 독립운동의 상징 심산 김창숙』, 김기승, 지식산업사, 2017년)

 그는 스스로 일본과 독립전쟁을 하는 전쟁포로라고 여겼다. 이는 안중근의사가 말하고 생각했던 것과 같다. 심문 과정에서 심한 고문으로 두 다리가 마비되는 하반신 장애인이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호를 ‘벽옹(躄翁)’이라고 했다. ‘앉은뱅이 노인’이라는 뜻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중 거의 유일한 ‘앉은뱅이 혁명가’이다.

 두 아들 역시 아버지의 삶을 따랐다. 장남 환기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고문으로 사망했다. 둘짜 아들 찬기는 아버지의 뜻으로 독립운동을 위해 당시 중경에 있던 임시정부에 파견 갔다가 사망했다.

 탕아 김창숙을 혁명가로 만든 어머니

 김창숙 선생은 조선 시대 전란 기간 중 활약했던 ‘선비 의병장’들과 비교해도 그는 그 이상이다. 망한 나라에 절망해 미치광이처럼 방랑하다가 35세인 1913년 어머니의 질책을 받고 깨우침을 얻은 뒤 한결같이 평생을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었고, 선비의 지조를 지켰다.  방랑하던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말했다.
 
 “망국으로 인한 울분으로 자제력을 잃고 패악한 행동을 했다고 하지만, 유교의 명분과 가르침에서도 즐거움을 찾고 몸을 편안히 하면서 천명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개과천선하여 학술을 닦으면서 서서히 조국의 광복을 도모하되 기회를 보아 움직이는 것이 너의 나아갈 길이다.” (『유림 독립운동의 상징 심산 김창숙』)

 3·1운동 때 유림대표의 3·1운동 참여가 없었던      것을 알고 파리강화회의에 유림대표 137명의 서명을 받아 대표로 참가하려고 했을 때, 그를 끊임없이 질책했던 어머니는 그에게 말했다.

 “네가 이미 나라 일에 몸을 허락하였으니 늙은 어미를 생각하지 말고 힘쓰라. 네가 지금 천하의 일을 경영하면서 오히려 가정을 잊지 못하느냐?”

 “너의 이번 거사와 이번 걸음은 실로 네가 평소에 소원하던 바이니 늙은 어미에 마음쓰지 말고 힘써 하라.” (『유림 독립운동의 상징 심산 김창숙』)

 호랑이 어머니, 나라와 민족을 생각했던 어머니가 불굴의 독립투사 김창숙 선생을 만들었다. 위대한 어머니는 위대한 자녀를 만든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자주 독립과 통일을 염원한 늙은 혁명가

 묘소에 도착하면 우측에 있는 비석이 특별하다. 그 비석에는 “有韓 心山先生 金昌淑之墓(유한 심산선생 김창숙지묘)”라고 되어 있다.

 필자는 여러 경로로 조선 시대 비석을 많이 보았다. 그러나 높은 관직을 했던 사람들의 경우 대부분 ‘有明 朝鮮國(유명 조선국)’처럼 자신의 출신 국가를 표현했다. ‘有明 朝鮮國(유명 조선국)’의 뜻은 “중국 명나라의 제후국인 조선”이라는 뜻이다. 명나라와 조선의 사대관계를 자랑스럽게, 당당하게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김창숙 선생의 묘소는 ‘有韓(유한)’이라고 새겨져 있다. ‘韓(한)’은 ‘대한(大韓)’의 ‘한’이다. 김창숙 선생의 시대는 물론 조선 시대와는 다르다. 그럼에도 ‘有韓(유한)’이라는 두 글자에는 오랜 사대관계를 던져버리고 당당히 자주독립국가임을 선언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하다.

 ‘유(有)대한민국’이라고 하지 않았던 것은 이유는 무엇일까? 김창숙 선생의 삶을 보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마도 선생이 염원했던 통일된 나라 때문인 듯하다. 그의 생전에는 나라가 망했고, 나라가 해방되었으나 분단이 되었다.

 해방된 나라를 꿈꾼 독립운동가였으나, 해방된 나라는 두 개로 잘렸다. ‘하나의 민족’, ‘한민족(韓民族)’임에도 두 개의 ‘한(韓)’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대한민국’만을 그의 묘비에 새겨 넣을 수 없었던 듯하다. 그는 묘비로나마 ‘하나의 한(韓)나라’를 염원하는 마음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다음은 그의 「통일은 어느 때에」란 시(詩)이다. 왜 묘비에 ‘유한(有韓)’이라고 썼는지 상상할 수 있을 듯하다. 

  “천하는 지금
   어느 세상인가
   사람과 짐승이 서로들 얽혔네
   붉은 바람, 미친 듯
   땅을 휘말고
   태평양 밀물, 넘쳐서
   하늘까지 닿았네

   아아, 조국의 슬픈 운명이여.
   모두가 돌아갔네
   한 사람 손아귀에,
   아아, 겨레의 슬픈 운명이여
   전부가 돌아갔네
   반역자의 주먹에

   평화는 어느 때나
   실현되려는가
   통일은 어느 때에
   이루어지려는가
   밝은 하늘 정녕
   다시 안 오면
   차라리 죽음이여
   빨리 오려무나.”

(『김창숙 문존』, 성균관대출판부, 2001년)

 김창숙 선생은 ‘조선의 마지막 선비’라고 불린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붓을 던지고, 총과 칼을 잡았던 진짜 선비이다.

 “성인의 글을 읽고도 성인이 세상을 구제한 뜻을 깨닫지 못하면 그는 가짜 선비이다. 지금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이따위 가짜 선비들을 제거해야만 비로소 치국평천하의 도를 논하는데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항일과 친일의 역사 따라 현충원 한바퀴』, 김종훈, 이케이북, 2020년)

 그는 해방 후에도 선비 정신을 지켰다.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고, 1951년에는 이승만에 대해 「하야경고문」을 작성해 부산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1952년 6월. 2·4정치파동 때는 ‘반독재호헌 구국선언대회’ 개최해 다시 투옥되었다. 해방된 조국에서도 감옥에 갇혀야 했던 선비가 김창숙 선생이었다.

 ‘김창숙 선생 묘소’에서 5분 거리에 양일동(梁一東, 1912~1980) 선생의 묘소가 있다. 묘소는 가파른 화강암 계단 위에 있다. 양일동 선생은 1930년 광주학생 사건에 참여했다. 임시정부에 참여했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일본 감옥에서 2년 8개월을 보냈다. 해방후 정치에 투신했다. 이승만 정권 때는 반독재운동을 했다.

 3편에서는 유림 선생부터 공초 오상순 선생까지 소개한다.

* 천도교종학대학원·천도교의창수도원 : 강북구 우이동 255
* 봉황각 : 강북구 우이동 254
* 손병희 선생 묘소 : 강북구 우이동 산28-1
* 여운형 선생 묘소 : 강북구 우이동 106-1
* 솔밭근린공원 : 강북구 우이동 80
* 메리츠화재연수원(안국동별궁 정화당) : 강북구 우이동 92
* 박을복자수박물관 : 강북구 우이동 86-4
* 이용문장군 묘소 : 강북구 우이동 산 65-2
* 국립4·19민주묘지 : 강북구 수유동 580-1
* 보광사 : 강북구 우이동 76-24
* 인수재 : 강북구 수유동 산 127-1
* 김도연·신숙 선생 묘소 : 강북구 수유동 산 127-1
* 김창숙·양일동·서상일 선생 묘소 : 강북구 수유동 산 127-4
* 조선중앙일보 사옥 : 종로구 견지동 111 (농협종로지점)
* 여운형 선생 집터 : 종로구 계동 140-8
* 천도교 중앙대교당 : 종로구 경운동 88
* 나석주 의사 동상(하나금융그룹 명동사옥 오른쪽 모퉁이) : 중구 을지로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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