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선생 묘비(유한 단주 선생 유림지묘)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유림선생 묘비(유한 단주 선생 유림지묘)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일요서울ㅣ박종평 객원기자] 북한산 독립운동가 묘역에 대한 마지막 탐방기이다. 이 코스에는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인 유림 선생,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 선생, 중국에서 활동한 광복군합동묘소, 김병로·이준·이명룡·신익희·조병옥 선생 묘소가 있다. 또 독립운동가라고 할 수는 없으나 안중근 의사의 딸 안현생 여사 묘소와 시인 오상순의 묘소가 있다.

 출발지는 2편의 김창숙·양일동 선생 묘소이다. 이정표를 따라 첫 목적지인 유림(柳林, 1894~1961) 선생 묘소로 간다. 내리막길이라 편리하다.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가다 보면 황당한 내용의 현수막을 보게 된다. 누군가 지리산 천왕봉 등 국립공원을 돌아다니며 정상 표지석에 기름 같은 것을 부어 놓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 행동을 한 사람을 신고하거나, 붓는 것을 목격한 사람의 제보를 기다린다는 내용이다.

 세상에 사람이 많아서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 산 정상에다 기름 붓는 정성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이룰 수 있을 텐데 안타까울 뿐이다.

 북한산 둘레길에서는 크고 작은 운동 시설을 유난히 많다. 지금껏 다닌 서울 주변 여러 곳 중에서 운동 시설이 가장 많은 듯하다. 주택가가 가까워서라고도 할 수 있지만, 북한산 기운을 맞으며 운동하러 오는 사람이 많기 때문인 듯하다.

 양일동 선생 묘소 근처에도 운동 시설이 있고, 유림 선생 묘소 가는 길에도 탁구장과 배드민턴장이 있다. 북적거리는 도심 공원이나 체육관에서 벗어나 이런 곳에서 운동한다면 신선과 다름없을 듯하다.

 조국의 해방과 인간 해방을 꿈꾼 아나키스트, 유림 선생

 유림 선생은 일제강점기 ‘아나키즘(Anarchism, 무정부주의)’을 이념으로 삼고 독립운동을 했던 대표적 아나키스트이다. 3·1운동 이전부터 독립운동을 했고, 이후 만주에서 활동했다. 북경으로 가서 신채호 선생 등과 순한문 잡지 『천고(天鼓)』를 발행했다. 1921년 상해에서 여운형·김규식 등이 주도한 신한청년당에 가입했다.

 1921년 전후 중국에서 아나키즘을 공부하고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1931년 중국 봉천에서 체포되어 1933년 5년형을 받았고,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다가 1937년 10월 만기 출소했다. 감옥에서 고문과 전향 요구를 받았으나 거부했다. 

 출소 뒤 다시 만주에서 활동하다가 1942년 중경에 있던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1945년 12월 2일, 임정 요인인 홍진·조성환·조소앙·신익희 선생 등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선생은 ‘해방된 조국’만 꿈꾼 사람이 아니다. 인류 해방의 꿈을 꾸었다. 다음은 아나키스트였던 선생의 생각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나의 이상은 강제권력을 배격하고 전민족, 나아가서는 전인류가 최대한의 민주주의하에서 다같이 노동하고 다같이 자유롭게 사상하는 세계를 창조하는데 있다.”(1945년 환국 기자회견)

근대사기념관 옆 '독립군가'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근대사기념관 옆 '독립군가'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서거 뒤 김창숙 선생은 “그대 있어 대한(大韓)이 무거웠는데(君在大韓重), 그대가 가니 대한이 비었구나(君去大韓空)”라고 추모했다. 선생의 호는 단주(旦洲)이다. 선생의 묘비 앞면 제자는 김창숙 선생이 썼다. 2편에서 소개했던 김창숙 선생의 묘비처럼, “유한(有韓) 단주(旦洲) 선생(先生) 유림(柳林) 지묘(之墓)”로 되어 있다. ‘대한 독립’과 ‘한민족 통일’을 염원한 표현이다. 묘비는 묘와 20여 미터 떨어져 세워져 있다.

 유림 선생 묘역에서 개울을 건너면 근처에 ‘근현대사기념관’이 있음 알리는 표석이 있다. 표석의 화살표를 따라 위를 보면, 건물 하나가 보인다. ‘근현대사기념관’이다. 근현대 우리 역사와 피어린 투쟁의 모습을 알고 싶다면 필수 코스이다. 독립운동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이 있다.

 독립운동가 묘역과 관계없이 ‘기념관’만을 간다면 대중교통편으로는 4호선 수유역 4번 출구로 나와 ‘강북01’마을버스를 타면 편히 도착한다. 전시내용 등 자세한 정보는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근대사기념관 옆 독립운동가들의 흉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근대사기념관 옆 독립운동가들의 흉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이름은 있으나, 무명이나 다름없는 독립운동가들과 저명한 독립운동가

 유림 선생 묘역에서 ‘기념관’을 들리지 않고 이시영 부통령 묘소로 곧바로 갈 수도 있다. 가다 보면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이시영 선생 묘소와 이준 열사 묘소로 가는 길이다. 5분 거리에 있는 이시영 선생 묘소 먼저 간다. 묘소 앞 왼쪽에는 ‘광복군합동묘역’이 따로 있다.

 안내판에 따르면, 총 17분의 광복군이 모셔진 합동 묘역이다. 당연히 먼저 들려야 할 곳이다.

 안내판에 써 있는 이름들을 나지막하게 불러본다. 북한산 독립운동가 묘역의 주인공들은 세상이 다 아는 분들이나, 지금 이곳의 합동 묘역에 있는 분들은 누구도 그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도, 널리 불릴 일도 없기 때문이다. 누구든 그분들의 이름을 불러 그분들이 잊혀지지 않았음을 그분들의 영혼에게라도 알리고자 함이다.

 “김성률·김순근·김운백·김유신·김찬원·동방석·문학준·백정현·안일용·이도순·이한기·이해순·전일묵·정상섭·조대균·한휘·현이평.”

 처음 합동묘를 세운 뒤 추가로 안장한 분을 포함해 모두 19분이 있었다. 그 뒤 두 분(김천성·한성수)이 현충원으로 이장되면서 현재는 17분이 남아있다.

 1940~45년 중국의 여러 지역에서 활약하다가 전사하거나 순국했다. 17분 중 김순근 선생 정도만이 조금 알려져 있다고 한다. 『항일과 친일의 역사 따라 현충원 한바퀴』(김종훈, 이케이북, 2020년)에 따르면, 김순근 선생은 1944년 광복군에 입대해 광복군 3지대 화북지구 소속이었다. 김학규(金學奎, 1900~1967) 장군의 명령으로 천진에서 동지를 모으는 임무를 수행하다가 1945년 체포된 뒤 조직과 동지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결했다고 한다.

광복군 합동묘역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광복군 합동묘역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한국광복군동지회에서 건립한 묘비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추모시가 새겨져 있다.

 “비바람도 찼어라
  나라 잃은 나그네야.
  바친 길 비록 광복군이었으나
  가시밭길 더욱 한(恨)이었다.

  순국하고도 못 잊었을
  조국이여 꽃동산에
  뼈나마 여기 묻히었으니
  동지들아 편히 잠드시라”

 고국에 살아서 돌아온 광복군만이 쓸 수 있는 묘비이다. 아름다운 시도, 멋진 시도 아니다. 그저 독립을 위해 광복군으로 살았던 그 삶을 있는 그대로 썼다. 가장 뜨거운 시를 가장 슬프게 썼다.

 17인의 합동묘소를 뒤로 하고 이시영((李始榮, 1869~1953) 선생 묘소로 간다. 묘비는 광복군 합동묘소 입구 오른쪽에 있다. 계단길을 오르면 묘소가 나타난다. 이시영 선생은 해방된 뒤 초대 부통령을 역임하시는 등 수많은 일을 하셨다. 동생 이회영 선생을 비롯해 전체 가문이 독립운동을 했다.

 이시영 선생의 가장 큰 공로를 꼽자면, 1919년 상해 임시정부에서 ‘대한민국 헌법’을 만들 때 조소앙 선생과 함께 한 역할이다. 지금의 헌법 “제1조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 그 때 이시영 선생과 조소앙 선생이 명문화한 것이다. 당시 만든 10조의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보면, 오늘날 헌법의 기초를 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 ……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 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종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통신, 주소 이전, 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누린다. 제5조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 자격이 있는 자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다. 제6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 납세 및 병역의 의무가 있다.”

 이시영 선생 묘소에서 내려와 이준 열사와 민족 변호사·초대 대법원장 김병로 선생 묘소 방향으로 간다.

 가인 김병로(金炳魯, 1887~1964) 선생 묘소까지는 10분 거리이다. 묘비 5미터 위에 묘소가 있다. 묘비 옆 묘소 축대에 툭 튀어나온 바위에는 누군가 ‘김’이라는 글자를 새겨놓았다. 위인을 존경하는 마음이라도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다. 답사를 다니다 보면 가끔씩 이런 즐겁지 않은 장면들을 보게 된다.

 극소수 자신의 이름을 새겨야만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다수의 아름다운 사람들도 만난다.

이번 탐방 때는 김병로 선생 묘소 상석에 누군가 가져다 놓은 꽃다발이 있었다. 꽃다발 모양으로 보면 집안 사람이나 어느 단체에서 바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김병로 선생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분이 찾아와 올린 소박한 마음이 엿보인다.

 묘소에서 왼쪽 길을 따라가면 계곡에 걸쳐있는 다리가 있다. 그 다리를 건너가자마자 오른쪽에 이준 열사의 묘소가 나온다. 5분 정도 거리다. 정문으로 가는 길은 아니다. 묘소로 직접 가는 샛길이다.

경향신문 1949년 2월 11일 헤이그에 있는 최초의 이준 열사 묘비와 묘소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경향신문 1949년 2월 11일 헤이그에 있는 최초의 이준 열사 묘비와 묘소 

 이준 열사는 할복 자결했나, 병으로 돌아가셨나?

 이준(李儁, 1859~1907) 열사는 1907년, 고종에 의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 대한제국 특사로 이상설(李相卨, 1870~1917)·이위종(李瑋鍾, 1887~?) 선생과 함께 파견되었다가 헤이그에서 7월 14일 순국했다. 열사의 순국 이후 오랫동안 독살설 또는 할복자결설이 있었다.

 『공립신보』(1907년 7월 19일)에서는 회의에 참석하지 못해 “기가 막혀 지난 밤에 갑자기” 사망했다고 했다. 일종의 의로운 분노에 따른 사망, 즉 ‘분사(憤死)’했다는 기사이다.

 같은 날 『대한매일신보』(1907년 7월 19일)에서는 세 편의 기사가 나온다. 첫째는 ‘독살 의심설’ 기사, 둘째는 “평화회의석에서 자결하였다는 전보가 어느 집에 왔다고 모신문에 게재하였으니 장하다. 만국이 회의하는 자리에 피를 한번 뿌린 자는 대한 의사 이준씨가 제일일세”라는 기사이다. ‘자결설’이다. 셋째는 “충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이에 자결해 만국 사신 앞에 피를 뿌려서 만국을 경동케 하였다”이다. 기사 원문에서는 한글 ‘충분’이나 이는 ‘충성스럽고 정의로운 분노’를 뜻하는 한문 표현 ‘忠奮’ 혹은 ‘忠憤’인 듯하다. 세 번째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것에 대한 정의에 따른 분노로 자결을 했다는 기사이다.

 그 뒤로 이준 열사의 죽음은 수십 년 동안 ‘자결’한 것이 사실로 여겨졌다. 또 ‘자결설’이 변형되어 ‘할복 자결설’로 변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서부터 자결설에 대한 논란이 생겼다. 1962년 11월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고 이준 열사 사인(死因) 심의회’를 열고 국내외 문헌조사 등을 통해 병사(病死)로 판단하고 1963년도 교과서부터 사인을 기존의 자결설의 표현인 ‘분사(憤死)’ 대신 ‘순국(殉國)’으로 고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헤이그에서 사망한 이준 열사가 ‘독살’된 것도, 또 널리 퍼져 있던 ‘할복 자결’도 아니라, 병으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열사가 그동안 알려진 것처럼 할복자결한 것이 아니라 병으로 순국했어도 그의 삶이나 죽음의 가치가 결코 폄하될 수는 없다. 목숨을 걸고 머나먼 헤이그까지 가서 조국을 위해 헌신한 것은 사실이고, 또 임무 수행 중에 돌아가셨기에 그것만으로도 존중받고 크게 평가되어야 한다.

조선일보 1962년 8월 25일 이준 열사와 화란에 있는 그의 묘소(1954년 재건 묘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조선일보 1962년 8월 25일 이준 열사와 화란에 있는 그의 묘소(1954년 재건 묘비)

 수유리 이준 열사 묘역의 비밀

 이준 열사의 묘소를 대강 둘러보면 그저 그런 묘소일 뿐이다. 그러나 묘소의 역사를 살펴보면, 열사의 죽음 이후 오랜 시간 동안 묘소 자체에 많은 역사의 나이테가 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준 열사 묘소에 갔을 때 가장 먼저 의아한 모습은 다른 독립운동가 묘역과 달리 봉분이 없다는 점이다. 늘 보던 우리 전통의 묘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이그에 안장되었다가 이장해 온 열사 유해는 분명히 묘소에 안치되어 있다. 어디에 그것이 있을까? 봉분이 없으니 애매하다.

 열사의 모습을 새긴 조형물 아래에 한문으로 새긴 “一醒(일성)李儁(이준)烈士(열사)之墓(지묘)”란 글이 있다. 전통 방식의 봉분은 없으나 묘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조형물이 있는 그 화강암 벽 자체가 ‘묘’인가? ‘묘’는 바로 그 조형물 아래 바닥에 태극기가 새겨진 돌 부분이다. 혹시라도 자세히 보겠다고 그 태극기를 밟지 않기를 바란다. 그 태극기 아래 열사가 쉬고 계신다. 이 묘소는 1963년, 헤이그에 있던 열사 유해만을 모셔와 10월 3일 이곳에 안치하면서 만들었다.

1963년 헤이그에서 이준 열사 유해를 옮겨와 만든 이준 열사 묘비와 묘소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1963년 헤이그에서 이준 열사 유해를 옮겨와 만든 이준 열사 묘비와 묘소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정면의 조형물 옆에는 또 다른 이국적인 장식물이 있다. 그 장식물은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다. 1954년, 네덜란드에서 재건한 묘와 묘비이다. 헤이그에 있던 유해를 옮겨올 때에는 이 묘와 묘비는 옮겨오지 않았다. 십여 년이 지난 1978년 8월에 헤이그에서 이곳 묘역으로 이전·설치했다. 그 때문에 이 묘역에는 두 개의 묘비와 묘가 있는 셈이다.

 1963년에 세운 수유리 이 묘비도 현재와는 차이가 있다. 그동안 여러 일이 있었다. 1965년과 66년에는 도둑들이 비명(碑銘)에 장식된 ‘해와 갈대’ 조각 청동판 2개를 톱으로 잘라 가져갔다. 심지어는 흉상을 훔치려고 흉상에 망치질을 하기도 했다. 묘 앞에 조성한 관상목 3그루도 훔쳐갔다. 그 시기에는 근처에 있던 신익희 선생 묘소의 철조망과 이시영·김병로 선생 묘소에 있던 관상목이 도난되기도 했다.

1976년에는 흉상 아래 구리로 만든 ‘李儁烈士之墓’ 비문 글자 중 ‘준’·‘열’·‘지’자의 글자 획 일부를 떼어 가져 가기도 했다. 그런 사연이 있어서인지 현재는 대리석에 새겨 벽에 넣어놓았다. 아무리 도둑이라도 훔쳐 가서는 안될 물건들을 훔쳐갔다. 천벌을 받을 일이다.

 또 이 묘비에도 변화가 있었다. 화강암 벽면 오른쪽을 보면, ‘殉國大節(순국대절)’, 고종의 친필 밀지가 새겨져 있고, 왼쪽에는 열사에 감동한 중국 원세개(袁世凱, 1859~1916)가 쓴 ‘만장시(輓章詩)’가 1976년에 새로이 새겨져 부착되었다. ‘순국대절’은 박정희 대통령이 쓴 글씨이다.

1978년 헤이그에서 옮겨온 1954년 재건 묘비와 1972년 덧붙인 '이준 열사 순국 추념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1978년 헤이그에서 옮겨온 1954년 재건 묘비와 1972년 덧붙인 '이준 열사 순국 추념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던 열사의 최초 묘비는 열사가 순국한 1907년에 세워졌다. 그러다 1954년에 헤이그에서 재건한 묘비가 지금 수유리 이곳에 있는 묘비다.

 이 묘비에도 사연이 있다. 6·25때 파병 온 유엔군 소속 네덜란드 부대가 1954년 고국으로 돌아가 세웠다. 네덜란드 부대가 열사 묘비를 세운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다.

 실제 주역은 네덜란드 부대에 배속된 국군 서재성 대위와 장병들이다. 그들은 이준 열사를 존경해 헤이그에 있던 열사의 묘소 재건을 위해 몇 달 동안 봉급에서 성금을 모았다. 그렇게 모은 돈을 귀국하는 네덜란드 부대에 주고, 열사 묘소 재건을 부탁해 만들어진 것이 1954년 재건 묘비이다.

 몇 년 뒤 독일 유학 중이던 윤이상 선생은 1957년 5월 1일,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던 이준 열사의 묘소를 찾아갔다.

 “나는 어저께 헤이그의 이준 열사의 묘지에서 몇 시간을 지냈소. 이준 열사의 묘는 너무 초라했소. 3등 묘지에 시멘트로 조그맣게 세운 묘석, 그러나 누가 갖다 놨는지 꽃이 몇 포기가 아직 시들지 않고 있으며 묘석의 주위에는 이름 모를 노랑꽃이 그의 조국애의 영원한 애수를 위로하듯 둘러싸고 있었소. 이 북구의 땅 공동묘지에서 이름 모를 죽은 풀과 머리 맞대고 나란히 누운 이 영세(永世)의 애국자의 고혼은 그의 비원이 이루지 못했음에 또한 그의 혼조차 돌아가지 못하고 이국의 하늘 아래 이슬을 받고 천추를 호흡하는 것이오. 나는 그 묘석 앞에 눈물지는 수 시간을, 모든 인생사의 헛됨을 다시금 느끼고, 죽음 앞에 사람들은 무력함을 깨달을 때 한없이 외로움을 느꼈소.”(『여보, 나의 마누라, 나의 애인 1956~1961 윤이상이 아내에게 쓴 편지』, 윤이상, 남해의봄날, 2019년)

 재건되었다고는 하나 윤이상 선생이 본 것처럼 헤이그에 있던 열사의 묘는 여전히 초라했다. 그러나 선생처럼 열사를 찾아가는 사람이 있고, 꽃을 놓아둔 사람이 있는 곳이 열사의 묘였다. 열사를 이방인으로, 또 선생의 편지글처럼 꿈을 이루지 못한 외로운 혼이나 인생사의 헛됨, 죽음 앞의 무력감처럼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선생이 열사를 잊지 않고 찾아간 것을 보면, 열사의 삶을 통해 배우고 교훈을 얻으려는 사람들로 인해 결코 외롭지 않았을 듯하다. 또 열사의 묘 주변에 핀 노란 꽃들도 열사의 고귀한 삶을 따뜻하게 위로하고 있지 않은가.

 수정되지 않고 있는 오자가 있는 묘비

 재건 묘비에는 오류가 있다. 「‘개각(改刻)’을 추진. 이준 열사 묘비에 잘못된 영문 비문」(『동아일보』, 1961년 11월 25일)에 따르면, 1954년 12월 29일에 새로 만들어 세운 비석에 새겨진 영문(英文)에 오기가 발견되어 수정할 것을 헤이그 현지 책임자에게 연락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즉 오른쪽 날개에 있는 ‘WHOM’은 ‘WHO’의 잘못이고, 왼쪽 날개에 있는 ‘KOREAN’은 ‘KOREA’의 잘못이라고 한다.

 재건 묘비를 1972년에 우리 정부가 다시 미화 작업을 했다. 현재 보이는 묘비 양쪽 맨 끝 날개가 바로 그 결과이다. 덧붙인 두 날개는 ‘이준 열사 순국 추념비’로 불린다.

 1978년, 그 전체가 다시 고국으로 옮겨와 이 묘역에 그대로 설치되었다. 현재 수유리에 있는 1954년 묘비를 자세히 살펴보면, 『동아일보』의 지적처럼 오기가 그대로 있다. 수정이 되지 않았다.

 1961년에 수정 요청을 했음에도 수정이 되지 않았고, 또 1972년에 미화 작업을 했음에도 오류는 그대로 였다. 1978년에 그 전체가 수유리로 돌아와 설치되었음에도 그 오류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은 듯 지금까지도 그대로 있다.

 오류도 역사이나 지금이라도 이왕이면 수정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요즘에는 초등생도 잘못된 것이라고 알 수 있는 “WHOM”과 “THE REPUBLIC OF KOREAN”이기 때문이다. 비석의 글자가 보이지 않아서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비석을 누구도 유심히 보지 않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이제라도 고치자.

 옛 비석 앞의 넓은 돌판은 열사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던 공간이다. 이 역시 그저 그런 돌로만 보고 밟아서는 안된다. 글자가 새겨져 있으나 잘 보이지 않는다. 탁본이라도 해서 내용을 안내판으로 보여주면 어떨까.

 또한 정면의 태극기 묘와 이 1954년 묘에는 작은 울타리라도 쳐놓은 것이 좋을 듯하다. 그것이 묘인지 어떤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테니 말이다. 우리와 문화가 다른 묘이기에 묘를 밟는 사람을 탓할 것이 아니라, 밟지 않도록 조치를 하는게 표를 보호하는 방법으로 볼 수 있다.

 묘역 안에는 열사의 부인 이일정 여사의 묘비도 있다. 별도의 봉분이 없고, 비문을 보면 비석 그 자체가 묘인 듯하다. 이준 선생의 장남 이용(李鏞) 선생도 독립운동을 했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에도 참전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지 못했다. 남북 분단의 결과이다. 이용 선생은 소련군과 함께 활동하기도 했고, 해방 후 남한에서 활동하다가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 참가하기 위해 월북한 뒤 북한에 잔류했다. 북한에서 도시행정상·사법상 등을 역임하면서 북한 정권 수립에 공로를 세웠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묘역에서 정문이 있는 홍살문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어록비들이 있다.

 “땅이 크고 사람이 많은 나라가 큰나라가 아니고 위대한 인물이 많은 나라가 위대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죽는다하며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을 산다 하는가. 죽어도 죽지 아니함이 있고 살아도 살지 아니함이 있다. 그릇 살면 죽음만 같지 못하고 잘 죽으면 도리어 영생한다. 살고 죽는 것이 다 나에게 있나니 모름지기 죽고 삶을 힘써 알지어다”

 죽어서도 민주주의 불꽃을 지핀 신익희 묘소

 정문인 홍살문에서 나와 아카데미하우스호텔 방향으로 내려가다 보면 왼쪽에 해공 신익희(申翼熙, 1894~1956) 선생과 장남 신하균(申河均, 1918~1975) 선생 묘소가 있다.

 신익희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에서 내무차장·외무차장 등을 역임했다. 해방후 국민대를 설립했다. 195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가 호남 지방 유세 가던 중 열차 안에서 서거했다.

 신익희 선생 묘역에는 「4월 혁명 예고장 된 격문, 삐라 여기서 인쇄」라는 안내판과 「4·19혁명 사적비」가 있다. 이 안내판과 사적비는 4월 혁명의 기폭제가 된 활동이 이 묘역에서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즉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정권이 관권 부정선거를 추진하자 ‘공명선거추진 전국학생투쟁위원회’ 학생들이 서울운동장 3·1절 기념식장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유인물을 배포했다. 이 사건은 2·28 대구학생의거와 함께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 때의 유인물을 제작한 장소가 바로 당시에 이곳에 있던 신익희 선생의 제실이었다. 신익희 선생은 죽어서도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항거하고 민주주의에 공헌을 했다.

 신하균 선생도 부친 신익희 선생과 더불어 독립운동을 했고, 광복군 총사령부에서 활약했다. 신하균 선생에 대한 안내판에서는 1915년생으로 나온다. 그러나 비석에는 1918년생으로 되어 있다. 인터넷에도 1915년 혹은 1918년으로 나오기도 한다. 신하균 선생은 서예가로도 이름이 높다. 우리나라 최초로 고대 중국의 해서체(楷書體)인 ‘학보자비체(學寶子碑體)’를 소개했다고 한다.

 신익희 선생 묘역 안에는 ‘분청사기 가마터’를 안내하는 이정표가 있기도 하다. 70미터 가면 나온다. 가는 도중에는 ‘금표(禁標)’란 글자가 새겨진 바위를 만날 수 있다. 안내문에 따르면,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의 능인 사릉(思陵)을 조성할 때 이곳에서 돌을 채취하면서 민간의 돌 채취를 금지하기 위해 표시한 것이라고 한다. 몇 걸음 더 가면 조선 초기 분청사기 가마터가 나온다. 작은 철책으로 둘러쌓여 있다. 지금은 잔디가 입혀져 겉으로 보기에는 가마터인지 알 수는 없다.

 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하고 있는 안중근 의사의 딸, 안현생 여사

 가마터에서 다시 신익희 선생 묘소를 거쳐 아카데미하우스호텔 앞으로 내려간다. 아카데미하우스는 현재 유치권 행사 관계로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그 안에는 특별한 한 사람의 묘소가 있다. 들어갈 수 없는 관계로 묘소를 둘러볼 수도 없었지만, 그 주인공은 안중근 의사의 2남 1녀 중 장녀인 안현생(1902~1959) 여사이다.

 『안중근家 사람들』(정운현·정창현, 역사인, 2017년)에 따르면 아카데미하우스 본관 우측 언덕에 묘소가 있다고 한다. 선생의 남편 황일청은 해방 직후 중국에서 광복군과 학병의 갈등으로 광복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광복군들이 학병 출신들을 친일파로 여기면서 이들을 보호했던 황일청의 비극이 일어났다고 한다.

 안현생·황일청 부부가 1941년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인 박문사에 참배를 했다고 비판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의 딸로 온갖 고난을 겪으며 살았던 안현생 여사에게 단편적인 몇몇 사례로 돌을 던지거나 삶을 재단한다면 당시 식민지 조선에 살던 모든 사람이 친일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안중근 의사 가문이 겪었던 고난은 상상 그 이상이다. 그 무거운 삶의 무게를 감당하기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을까. 안 의사의 딸이라는 이유로 여사의 희생을 당연히 여기는 것도 무책임한 말장난일 뿐이다. 여사는 최소한 적극적인 친일파가 아니다. 안 의사의 딸이었기에 하루도 마음 편히 숨 쉴 수 없을 정도로 불우했던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돌을 던지기 전에 여사의 삶이 어땠을지 상상이라도 해보고, 또 여사의 고통을 얼마나 심했을지 한번이라도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그런 안현생 여사의 묘소는 지금은 아카데미하우스의 문제로 찾아가기 어려운 형편이다. 죽어서조차 평안히 쉴 수 없는 여사의 비극에 한숨과 분노가 인다.

 강북구는 독립운동가 묘역 정비는 물론 근현대사기념관도 운영에도 열심이다. 안현생 여사의 묘소는 강북구 제작 지도 등에도 나온다. 지도에만 표시해 놓으면 무슨 의미가 있나. 강북구에서 관심을 갖고 여사의 묘역을 시민들이 찾으면서 안중근 의사의 삶과 역사의 교훈을 배울 수 있도록 적극적인 조치를 취해야 할 때이다.

 말로만, 행사로만, 형식으로만, 안중근 의사를 존경한다고 하지 말자. 그의 후손들을 이제라도 제대로 확인해 그 처절한 삶, 안타까운 삶들을 복원시켜 주어야 한다. 그 역시 살아있는 교훈이기 때문이다.

통일교육원 안 훼손된 이명룡 선생 안내판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통일교육원 안 훼손된 이명룡 선생 안내판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훼손된 통일교육원 안 이명룡 선생 안내판, 조병옥 선생 묘소

 10분 정도 내려오면, 통일교육원이 있다. 그 안에는 3·1운동 33인 중의 한 분인 이명룡(李明龍, 1872~1956) 선생의 묘소가 있다. 묘소는 잘 단장되어 있다. 그러나 통일교육원 안에 있는 선생에 대한 안내판은 절반은 찢겨 있다. 남북통일을 위한 교육기관에서 관리하는 안내판이 이런 상태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게다가 이명룡 선생은 평안도 출신이다. 통일교육원은 외북인의 출입이 통제가 된다. 그런 곳에 외부인이 들어와서 일부러 찢었다고 보기도 힘들다. 교육원을 오가는 교육생들이 했다면 더 큰 문제이다. 통일을 반대하는 사람, 독립운동을 부정하는 사람이 저질렀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또 찢어진 상태를 보면, 이미 시간이 많이 흐른 듯하다. 통일교육원측 무관심이 지나치다. 방치되다시피 된 이 안내판 사례를 보면, 교육 역시 그저 형식적 교육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명룡 선생의 묘비는 전통적인 비석 모양이 아니라,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서 볼 수 있는 오벨리스크 형태이다.

 이명룡 선생은 3·1운동 직전 자신은 민족대표로 참가하면서, 둘째 아들에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서울에서는 민족운동인 독립운동을 하기 위한 모임이 비밀리에 조직되고 있다. 그러나 너도 평양으로 가서 숭실전문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해서 3·1독립운동에 참여해라.”

 다음 코스는 조병옥 선생 묘소이다. 이명룡 선생 묘소에서 나와 교육원 바로 아래에 있는 서울둘레길 중 ‘흰구름길’ 구간을 거쳐 사찰인 본원정사(本愿精寺)를 들려 쉬었다가 간다. 본원정사까지는 25분 정도 걸린다. 본원정사에는 서울시 유형문화재인 ‘목(木) 보살좌상(지장보살)’이 있다. 북한산 태고사에 봉안되어 있다가 6·25 이후에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지장보살은 지옥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이다.

 본원정사는 세종의 둘째 딸 정의공주와 남편 안맹담이 도성암을 세운 것에서 유래한 절이다. 사람이 많지 않아 잠시 쉬었다 가기 좋다.

 본원정사에서 내려오면 버스 종점 위쪽에 둘레길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계단으로 오르면 연리지(連理枝)가 있다. 이 연리지는 한쪽 소나무의 뿌리가 뻗어 다른 소나무와 연결된 연리근(連理根) 형태이다.

 둘레길을 따라 걸을 때 갈래길이 나오면 모두 오른쪽 길을 택해 걷다가 영락기도원 앞에서는 왼쪽 길을 따라 걷는다. 계곡을 건너는 다리 앞에 조선 시대 양반 묘소에 있는 문인상과 운동 시설이 보인다. 조병옥(趙炳玉, 1894~1960) 선생 묘소와 북한산 대동문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본원정사에서 잠시 쉬었다 가면 1시간 정도 걸린다.

 묘소 아래 왼쪽에는 조병옥 선생 부인 노정면 여사의 묘가 있다. 조병옥 선생은 1918년 미국으로 유학간 뒤 미국에서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25년 귀국한 뒤에도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했고, 1929년에는 광주학생 운동과 관련해 한용운 선생과 함께 배후조종 혐의로 3년형을 받았다. 1937년에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2년을 복역했다.

 1959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되었으나, 병으로 미국에서 치료 중에 사망했다. 정치인으로는 공과가 있다.

독성 기도처 삼성암과 흐름 위에 보금자리를 친 시인

 다음 코스는 시인 공초 오상순(吳相淳, 1894~1963)의 묘소이다. 조병옥 선생 묘소에서 1시간 20분 정도 걸린다. 조병옥 선생 묘소가 신익희 선생의 묘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듯 오상순 시인 묘소는 훨씬 더 멀리 떨어져 있다. 또 독립운동가 묘역과는 관계 없다.

 조병옥 선생 묘소에서 시인의 묘소로 곧바로 가는 것은 길은 있으나 이정표가 없어 불편하다. 차라리 시인 묘소만 별도로 찾아가는 것도 방법이다. 그 경우 수유역에서 마을버스 ‘강북03’번을 타고 종점인 빨래골에 내려서 찾아가면 금방이다.

 필자는 이미 나선 길이었기에 조병옥 선생 묘소에서 시인 묘소로 직행했다. 영락기도원 입구를 지나 ‘화계사·용봉배드민턴장·빨래꼴공원지킴터’ 방향 둘레길을 탔다. 가다 보면 ‘둘레길 우회 안내’ 표지판이 나온다. 기존의 둘레길 구간이 사유지이기에 폐쇄되고 우회로를 통해 가라는 안내판이다.

 우회로를 따라가면 이번에는 ‘무속행위 금지 안내’ 표지판이 나온다. 그 왼쪽을 보면, 바위에 누군가가 어떤 신(神)을 양각해 놓았다. 새긴 사람들의 이름과 “관세음보살”이라는 글도 새겨져 있다. 이 바위에 새겨져 있는 관세음보살을 대상으로 무속인들이 무속 행위를 하기 때문에 그런 안내판이 세워졌나 보다. 그럼에도 최근에도 제를 지낸 듯, 제사에 사용하는 잔이 놓여져 있다. 그 조각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안내판은 없다. 최근에 만든 것이거나 특별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인지 어떤지 알 수 없다.

삼성암 산문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삼성암 산문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조금 더 가면 이번에는 ‘사유지(화계사) 전통사찰 보존구역’이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빨래골공원지킴터’ 방향으로 길을 따라가면 ‘삼각산(三角山) 삼성사(三聖寺)’에 도착한다. ‘삼성암’이라고도 한다. 안내판에 따르면, 삼성암은 “운문사 사리암, 묘향산 중비로암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3대 독성 기도 도량 중의 하나로 유명하다”고 한다. 절 안에는 상궁(尙宮) 윤씨가 답을 헌납했다는 기념비도 한쪽에 세워져 있다.

 『전통사찰총서 4 : 서울』(사찰문화연구원, 사찰문화원 출판국, 1994년)에 따르면, 삼성암은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상주처로 이름난 절”이라고 한다. 독성은 “부처님으로부터 혼자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수기를 받고 남인도 천태산에서 홀로 수행 하는 분”이다.

 삼성암에서는 독성을 섬기는 독성각을 별도로 두고 있다. 삼성암에서 소원을 빌어 소원을 성취하고 난치병을 완치한 영험담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답사하는 날에도 무언가를 열심히 비는 분이 있었다.

 삼성암을 나와 왼쪽 길을 택해 다시 걸어가면 ‘삼성암 밑 약수터’가 나온다. 물맛이 시원하다. 다시 왼쪽길로 올라가 30여 미터 올라가면 계곡에 설치된 약수터가 있다. 계곡을 건너 아래로 내려가면 ‘빨래골공원지킴터’ 방향 이정표가 나온다.

 그 방향으로 30 미터 정도 내려가면 최종 목적지를 알리는 “공초(空超) 선생의 묘소”라고 새겨진 검은돌로 된 이정표가 맞아준다. 이정표를 따가면 “이곳을 찾아 주신 분들게”라는 제목의 흰색 안내판이 서 있다. “선생은 이 나라 현대시의 선구자이셨을 뿐 아니라 이승에서부터 영원을 사신 도인(道人)이셨습니다”라고 시인의 삶을 압축해 표현해 놓았다. 철문이 있으나, 잠금장치가 없어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다.

 묘 왼쪽에는 ‘공초’를 상징하는 듯한 직사각형의 조형물이 있다. 상단 부분은 네면에 둥근 구멍이 뚫려 있다. 오른쪽에는 그의 대표작으로 1935년에 지은 시 「방랑의 마음 1」 중 첫 부분인 다음 구절이 새겨져 있다.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오!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나의 혼(魂) …….”

 비의 뒷면에는 아주 간결한 시인의 약력이 새겨져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몹시 담배를 사랑하다”는 구절이다. 하루에 2백 개비를 필 정도였다고 한다. 시인은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평생 방랑하며 살았다. 시비를 만드는데 기여한 함동선 시인에 따르면, 공초는 “자유가 좋다지만 그 자유가 나를 구속한다”고 유언했다고 한다.

오상순 시인 묘소 가는길에 만난 관음세음보살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오상순 시인 묘소 가는길에 만난 관음세음보살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일제강점기 시인의 활동에 대해 『친일파는 살아있다』(정운현, 책보세, 2011년)에서는 “오상순은 친일 문장이 아니라 단체 활동이 문제이다. 그는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 졸업후 일본조합기독교회 전도사로 활동했다. 이 교회는 3·1만세의거 당시 조선 전역을 다니며 만세를 부르지 못하도록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시인이 그런 활동에 얼마나 참여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또 일제강점기 중 적극적이거나 소극적이거나 친일 활동을 한 흔적이 없다.

 임종국 선생은 『친일문학론』에서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단 한 편의 친일 문장을 남지 않은 ’영광된 작가‘들도 적지 않았다”면서 윤동주·변영로·오상순·조지훈·박목월·박두진 등을 꼽기도 했다. 시인의 경우, 한때 활동했던 단체가 문제가 있을 수 있으나, 단체에서의 구체적인 친일 활동 내용이 확실치 않고, 또 대다수 문인들이 변절해 친일 작품을 쓸 때 단 한 편의 친일 작품을 쓰지 않았다는 점에서 친일단체 활동을 문제 삼는 것은 과도한 평가라고 여겨진다.

공초 오상순 시인 묘소와 묘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공초 오상순 시인 묘소와 묘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최남선 옛 집터에서부터 독립운동가 묘역을 거쳐 오상순 시인 묘소까지 6시간 정도 걸린다. 홀로 간 답사였기에 빠른 걸음으로 다녔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과 함께 가거나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걷는다면 최소 8시간은 잡아야 할 코스이다. 오상순 시인 묘소에서는 집으로 가는 방법은 빨래골 마을버스 종점에서 버스를 타고 수유역으로 가거나, 30여 분 정도 걸어서 삼양역으로 가서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

* 근현대사기념관 : 강북구 수유동 산 73-23
* 아카데미하우스호텔 : 강북구 수유동 산 76
* 본원정사 : 강북구 수유동 산 125
* 삼성암 : 강북구 수유동 486-8
* 유림 묘소 : 강북구 수유동 산 127-3
* 이시영·광복군합동묘소·이준·신익희·조병옥·오상순 묘소 : 강북구 수유동 산 127-1. 같은 번지나 위치 차이가 많음
* 빨래골지킴터 : 강북구 수유동 산 12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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