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파트의 전기기사로 근무할때 생겼던 일이다. 점심 즈음에 전화벨이 울렸다.

“여기 a동 000혼데요, 우리집에 형광등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아요.”

장비를 챙겨서 a동 000호로 갔다. 안으로 들어서니 아줌마들이 한 8명 정도 모여서 계를 하는지 웃고 떠들고 있었다.
얼른 형광등을 고쳐주고 도망치듯 빠져나오려는데 주인 아줌마가 불러 말했다.

“아이고 고맙심니데이. 근데요, 우리집 비디오가 지금 고장났거던요. 그것도 함 봐주이소.”

바빴지만 차마 거절할 수 없어서 손을 보고 있는데 아줌마들이 다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참, 요번에 우리 순정이 장학금 탔다 아이가. 가스나가 공부 밖에 모르는기라. 요즘 세상에 대학생 쯤되면 다 남자친구 안 있나. 아가 너무 순진하고 공부 밖에 몰라가 남자친구도 없다.”
“좋겠다. 그래도 순정이는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이쁘니까 시집 잘 갈끼다.”
“공부만 잘하면 뭐하노. 아가 너무 순진하고 완전쑥맥인데.”

옆에선 주인아줌마가 딸 자랑에 정신이 없었다.

“저기요, 수리 다했는데요. 확인 해보게 테이프 하나 주실래요?”
“기사님 감사합니데이. 잠깐만 기다리 보이소.”

그러더니 옆방으로 달려가 000영어회화테입을 들고 왔다. 화질도 좋고 소리도 잘 나왔다. 주인아줌마는 다른 아줌마들을 보면서 자랑을 시작했다.

“우리 순정이가 영어회화 공부한다고 케가 십오만원주고 이거 사줏다 아이가. 아가 순진하고 공부밖에 몰라가꼬 걱정이다.”

자랑이 참 유난하다는 생각을 하며 일어나려는 순간 갑자기 비디오화면에 노이즈가 생기면서 화면이 엉키는게 아닌가.
고장이 났나 싶어 다시 앉는 순간 서양 남녀들이 홀라당 벗고 ‘아! 아~~!’
그 시끄럽던 아줌마들 전부 다 입을 딱 벌리고 넋이 나간체 비디오만 바라봤다. 그 침묵 속에서 들리는 소리라곤 오직 비디오에서 나오는 ‘오예~ 오예~’ ‘아~~! 예스! !~ 예스!!~’ 소리 뿐….

“이기 뭐꼬! 빨리 끄소 빨리 끄소.”
“와요, 야들도 영어하구만요.”

아줌마들은 전부 웃느라 뒤집어졌고 약 한달이 지나자 순진하고(?) 공부 밖에 모르는(?) 딸과 엄마가 사는 A동 305호는 조용히 이사를 갔다.
아마 그날의 그 멋진 영어회화테이프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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