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산의 등산 코스는 다양하다. 문사동계곡 등산로에서 첫 갈림길을 맞았다. 계곡을 따라 우이암으로 올라가는 길과 천축사와 마당바위를 지나 신선대로 가는 길이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필자에겐 고민의 여지가 없었다. 도봉산 산행의 목적은 사찰탐방이다. 목적에 충실하게 결정했다. 절 하나라도 더 볼 수 있는 등산로를 선택했다.

천축사 입구에 노상보살 198분이 모셔져 있다.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천축사 입구에 노상보살 198분이 모셔져 있다.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우이암길, 성불사.성도원.구봉사.금강원.녹야원에 천진사까지
국조단군성상 모신 사찰은 천진사 국내 유일’...

우이암으로 올라가는 길에 참 많은 사찰이 있다. 성불사, 성도원, 구봉사, 금강원, 녹야원, 천진사…….

계곡을 따라 우이암으로 올라가는 숲길은 감히 도봉산의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할 수 있는 코스다. 지난 호에도 언급했지만 도봉산은 화강암으로 이뤄진 돌산이다. 등산로를 따라 이어지는 계곡은 비와 식물에 의해 풍화된 바위로 메워져 있다. 계곡의 바위 무더기는 능선의 기암괴석에 못지않다. 돌무더기 사이에서 휘어져 떨어지는 물은 하얀 거품이 된다. 폭포 아래는 어김없이 맑고 시원한 소가 있다. 흘러내리는 거품은 어느새 조용해진다. 물빛은 초록빛으로 변해 있다. 계곡 암벽에는 갖가지 나무가 뿌리를 박고 있다. 마치 산수화 같은 풍경이다. 여름철 명소답게 계곡에는 적지 않은 피서객이 몸을 식히고 있다. 필자도 시원한 계곡을 외면할 수 없었다. 계곡물에 발을 담갔다. 물소리가 더 선명하다. 어느새 갈증을 잊는다.

기암괴석에 시원한 계곡 산수화펼쳐져

휴식을 뒤로 하고 산행을 계속했다. 얼마 오르지 않았는데 작은 사찰이 보였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자그마한 돌다리 끝에 일주문이 서 있다. 일주문에 도봉산 금강암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일주문 좌우로 이끼 낀 석축으로 쌓은 담이 있다. 세월을 잊은 듯한 일주문과 조화를 이룬다. 일주문을 들어가자 대웅전과 삼성각 그리고 요사체(스님이 머무는 공간) 밖에 없다. 대웅전 앞에 석탑과 석등이 나란히 서 있다. 깨끗하고 깔끔하다. 비구니 사찰임을 직감하게 한다.

구봉사 금동의 약사여래살.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구봉사 금동의 약사여래살.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금강암에서 계곡을 따라 7~8분 올라가면 문사동계곡의 백미인 구봉사 계곡이 나온다. 도봉산 계곡 중에서도 피서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구봉사를 끼고 도는 계곡과 함께 구봉사 위쪽 폭포교에서 마주하는 서광폭포는 가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다. 일주문을 지나면 본당인 무량수전과 무량수전 옆에 사찰의 규모와 대비되는 커다란 금동의 약사불(약사여래상)이 있다. 약사불은 질병을 치료하고 수명을 늘려주며 재난을 없애주는 부처다. 구봉사를 돌아 등산로로 접어들자 약사불은 훨씬 크게 보였다.

어떻든 구봉사를 끝으로 문사동계곡과는 이별했다. 다시 산행이다. 오솔길이 시작됐다. 그런데 꽤 많던 등산객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외로운 산행을 얼마나 했을까. ‘폐기된 전신주(?)’에 걸친 나무에 성불사라는 한글 현판이 걸려있다. 임시로 만든 일주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절은 아주 작았다. 마당 한 가운데 본당인 극락전이 있을 뿐이다. 굳이 특이한 점을 꼽으라면 나눔을 상징하는 포대 화상이 극락전 왼편에 버티고 있다. 포대 화상은 중국의 선승이다. 대중에게 기부받은 물건을 부모를 잃고 고아 등 굶주린 이들에게 줬다고 한다.

하지만 이 절의 역사는 깊다.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수행했던 도량이다. 1894년 동학혁명 세력을 이용해 민 씨 일가를 물리치려던 의도가 실패한 뒤 흥선대원군이 이곳에서 권토중래를 꾀했던 유서를 가진 절이다.

천축사 대웅전.​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천축사 대웅전.​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신라시대 원효대사. 흥선대원군이 머문 성불사

다시 길을 재촉했다. 길을 걸으면서 도봉산 사찰은 등산로변에 있음을 깨달았다. 등산로가 모두 사찰로 통한다는 것은 사찰탐방객에게 일종의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시작한 등산로 주변에서 또 하나의 일주문을 만났다. 방문객이 많지 않았는지 절로 들어가는 돌계단에 이끼가 융단처럼 깔려있다. 바로 도봉산 천진사다.

그런데 예사 절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이 들어왔다. 일주문을 지나자마자 거대한 국조단군성상이 서 있다. 불교는 우리나라에 정착하면서 종래에 있는 우리의 토속문화를 수용했다. 이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징표가 사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삼신각과 칠성각이다. 인도, 중국. 티베트 등의 불교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불교의 포용력은 하나의 전통이 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단군상을 모신 사찰은 천진사가 유일하다. 필자도 처음 본다. 어떻든 국조단군성상 비문에는 설립 연도가 단기 4300년으로 명기되어 있다. 그러니깐 55년 전이 1967년에 설립된 것이다. 설립자는 국조 단군상건립회 창설자 국당전흥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주문 왼편에는 국당대종사 탑비가 서 있다. 탑비를 세운 것은 국당대종사가 천지사가 낳은 덕 높은 스님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국당은 국조단군성상 설립자가 아닌가. 이 성상은 바로 국당이라는 큰 스님이 세운 것이다. 이런 추정을 주지 스님에게 전하지 나는 이곳으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잘 모른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천진사의 흰색 부처장.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천진사의 흰색 부처장.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이정표 맨 꼭대기에 표시된 사찰이 천지사였다. 산행의 목적지는 도봉산에서 갈 수 있는 최정상인 신선대다. 주지 스님에게 길을 물었다. 우이암으로 가는 등산로로는 신선대에 갈 수 없단다. 다시 금강암 밑에까지 내려가서 마당바위를 타고 오르는 게 가장 빠른 길이란다. 할 수 없다. 등산로를 따라 사찰이 있다고 좋아했던 게 공허해졌다.

신선대에 오른 뒤 내려가는 길에 천축사, 광륜사 등을 돌아보기로 하고 다시 산을 올랐다. 한 시간은 족히 걸은 것 같다. 마당바위에 다다랐다. 마당바위 도봉서원 뒤편에 있는 거대한 바위다. 모양이 마당처럼 넓어 마당바위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사방으로 펼쳐진 전망이 빼어난 곳으로 오른쪽 아래는 밤골계곡이 백운대로 향하고 왼쪽으로는 효자리 계곡을 건너 상장능선이 이어진다. 정상까지는 800m가 남았다. 이제부터 험난한 산행의 시작이다. 높이 오를수록 길은 호젓해진다. 만나는 등산객도 줄어들었다. 가파른 계단과 돌길로 이어진다. 체중이 120kg은 넘을 듯한 한 서양인이 죽을힘을 다해 산을 오르고 있었다. 매우 피곤해 보였다. 땀도 많이 흘리고 있었다. 더 이상 오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천축사 비로자나삼신불도.  이 탱화는 야외에서 예불을 모실때  모신 괘불도다.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천축사 비로자나삼신불도. 이 탱화는 야외에서 예불을 모실때 모신 괘불도다.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도봉산 3대 봉우리 자운.선인.만장봉 장관

험준한 봉우리를 넘어 신선대 정상에 올랐다. 신선대와 선인봉 암벽 사이를 오르면서 바라보는 도봉산의 3대 봉우리(자운봉 740m, 선인봉 708m, 만장봉 718m)는 도봉산의 참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굽이마다 달라지는 도봉산 3형제 봉우리의 거대함과 웅장함에 절로 숙연해진다.

신선대 정상(726m)에 올랐다. 사방으로 시원한 풍경이 펼쳐진다. 주봉인 자운봉은 산봉우리에 붉은빛의 구름이 걸쳐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그 이름처럼 붉은 노을이 드리운 자운봉을 상상해본다. 선인봉은 신선이 도를 닦는 봉우리다. 당연히 인간계를 벗어난 비경이다. 만장봉은 천장 만장으로 암벽이 흘러내리고 있다. 발아래로는 계곡 따라 짙은 녹음을, 멀리에는 서울 시내와 북한산의 능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아 이런 기분에 산에 오르는구나.

하산 길에 외국인 등산객을 만났다. 신선대에 오르는 순간 그는 고생을 보상받을 것이다. 그의 탄성이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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