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을 방문하는 길에 한국을 들렀던 낸시 펠로시는 미국에서 아르마니 좌파로 유명하다. ‘아르마니 좌파란 좌파를 자처하면서도 부르주아적 생활을 하는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비슷한 말로 리무진 좌파’, ‘구찌 막시스트’, ‘샴페인 사회주의자’, ‘캐비어 좌파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강남좌파라는 말이 비슷하게 쓰인다. ’강남에 살 정도로 잘 사는 놈들이 어울리지 않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는 척하면서 진보적인척 한다는 정도의 비난이 담겨있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지난 2006년에 낸 저서 한국생활문화사전에서 강남 좌파를 이렇게 정의했다. “강남좌파는 생각은 좌파적인데 생활수준은 강남 사람 못지않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서 강남은 실제 거주지역이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생활수준을 향유하는 계층을 뜻한다강준만을 비롯한 몇몇이 당시 여당이던 열린우리당을 비롯한 개혁진영 인물들의 모순적 행태를 비꼬기 위한 것으로 썼고, 지금도 비슷한 용도로 쓰인다.

문재인 정부를 수렁으로 몰아넣은 조국 사태당시에도 이 단어는 조국 전 장관을 비난하는 데 동원됐다. 일부 언론에서는 조국사태를 계기로 강남 좌파가 반쯤 죽었다고 선언했다. 조국은 세상에서 저를 강남좌파라고 부르는 걸 잘 알고 있다면서도 강남에 살면 부를 축적해야 하고, 진보를 얘기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자신을 변호해야 했다. 하지만 자신을 둘러싼 논란이 강남좌파를 거쳐 내로남불 확전되고 정권을 내주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힘 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민족자주화운동 세력은 80년대에 이 말을 금과옥조로 여겼다. 통일전선론에서 비롯된 구호인데, 민족자주세력이 민주화운동의 주류가 되고, 세상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가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강남좌파들이 나타났다. ‘강남좌파들은 자신의 사회적 위치, 계급을 배반하고 흙수저 청년, 장애인, 여성, 노인, 노동자 편에 서서 우리사회의 진보에 기여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낸시 펠로시가 아르마니 좌파라서 만나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펠로시는 단순히 좌파로 치부하고 외면할만한 가벼운 인물은 아니다. 이 정부가 많은 분야에서 무능함을 노출하고 있지만, 외교안보 중대 사안이 얽힌 문제를 얼치기 유투브 진행자의 주장대로 따를 정도는 아닐 것으로 믿는다.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의 갈등 속에서 곤혹스러운 처지일 수밖에 없다. 정부 입장에선 대통령 휴가를 핑계로 불편한 자리를 피하려 했을 수도 있다.

이 사태의 핵심은 누가 의전을 나가야 하느냐, 대통령이 방한한 미국 하원의장을 꼭 만나야 하느냐가 아니다. 국민들은 대통령이 만난다고 했다가, 휴가라서 안 만난다고 했다가 결국 전화통화를 하는 정부의 행태를 보고 혀를 찼다. 무능하다고 생각한다. 취임 3달 동안 보여준 윤석열 정부의 다양한 무능 행태 중에 하나를 더한 것이다. 정부가 할 일을 국회와 야당 국회의장이 하게하고, 민주당이 공을 가져가게 하는 초무능정부.

윤석열 정부는 출범 3개월 만에 20% 대 지지율로 주저앉았다. 커다란 과오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단지 국민들에게 무능하다고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펠로시 방한은 20%대 마저 무너뜨리는 기폭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무능해도 정도가 있지, 대통령이 휴가 핑계로 혈맹인 미국의 하원의장을 피해 다니고, 정부는 의전 책임을 국회에 떠넘기고 나몰라라 했다. 펠로시는 떠났지만 과거 정권에서 일어났던 게이트에 준하는 사태가 목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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