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시대마다 국가가 처한 상황은 달랐다. 각각의 시대를 살아온 국민이 겪어야 하는 환경 또한 천차만별(千差萬別)이었다. 우리와 북한처럼, 같은 시대를 살아도 어떤 체제를 가진 국가에서 사느냐에 따라 삶의 모습 또한 천양지차(天壤之差). 어떤 세대는 평생 전란(戰亂)에 시달렸고, 어떤 세대는 일제(日帝)에 시달리다 겨우 해방되고 나서 곧바로 동족상잔(同族相殘)을 겪었고, 지독한 가난과 배고픔에 시달렸다. 자식을 많이 낳아도 굶주리고 병들어 죽는 아이가 부지기수였고, 죽도록 노동해도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운 참혹한 시대를 살기도 했다. 반면 어떤 세대는 앞선 시대를 살아온 국민의 헌신적 희생과 노력의 덕분에 풍요를 물려받았다. 시대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선택하게 한 복불복(福不福)인 셈이다.

복이든 불복이든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것은 그 시대 사람들의 몫이다. 그런데 자신이 살아온 지난 시대 또는 자기 조상들이 살아온 시대에 대한 보상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길게는 일제 동학농민운동 때 피해를 입거나 희생당한 분들의 후손까지 보상을 요구한다. 짧게는 반세기 전의 조부모 세대의 삶까지 보상하라고 악을 쓴다. 보상을 요구받는 주체는 그 시대의 정부가 아니라 지금의 정부다. 명예 회복이 아닌 물질적 보상은 국가라는 이름으로 이뤄지지만, 엄밀히 말해 현세대나 미래세대가 부담해야 하는 몫이다. 이게 과연 온당한가. 과거의 법관들이 내린 잘못된 판결에 대해 후세대 법관들이 그것을 배상하라고 판결한다면, 그 책임은 법관에게 없는 것인가. 앞선 시대를 산 법관의 잘못된 판결에 대해 왜 수십 년 뒤의 국민이 피땀 흘려 보상해야 한단 말인가. 지금은 이 세상에 살지도 않는 조상들의 몫까지 내놓으라고 현세대의 멱살을 잡는 행위를, 정녕 탐욕을 빼고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조상과 부모 세대의 희생에 대한 보답은 명예회복으로 족해야 한다. 그때의 정부는 이 세상에 없다. 특히 피해자나 희생당한 세대가 거의 사망한 상태에서, 그 후손에게 국가가 대대손손 보상하라는 요구는 스스로 그들 조상의 명예에 먹칠하는 행위다.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분들이 지하에서라도 그런 요구를 할 리가 없다.

그런데도 그 후손들이 변호사들을 앞에서 국가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하고 보상금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조상의 상처를 내세워 대가를 요구하는 불명예일 뿐이다. 더러는 법을 앞세워 겁박한다. 내 아버지, 내 할아버지가 이렇게 저렇게 희생했으니 그 대가를 후손들에게라도 지급하라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 법안 한 줄에 현세대나 미래세대가 부담해야 할 비용이 수조 원에 이르는 법안들이 수두룩하다. 정치인들이 표를 얻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참으로 수치스러운 행태다. 우리는 누구나 주어진 시대의 한복판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존재다. 당연히 그 시대가 부여하는 운명도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몫이다. 더 이상 조상 팔아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 하지 마라. 그것은 의로운 조상들을 욕보이는 것이다. 명예를 잃어버리면 전부를 잃는 것이다.

요즘은 또 다른 탐욕의 모습을 본다. 문재인 정권의 부동산정책 실패로 집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다. 그렇게 올랐던 집값들이 세계적인 경기침체와 금리 인상, 공급 확대 등의 여파로 조금씩 내려가고 있다. 집값이 최고조에 올랐을 때 집을 산 사람들이 아니라면, 누구나 반겨야 할 소식이다. 그런데 수도권의 집값이 전반적으로 하락하자 어떤 자치단체 주민들은 공급 확대 정책으로 집값 떨어졌다며 분노하고 있다. 그러나 떨어졌다는 그 집값은 여전히 불과 몇 년 전에 비해 엄청나게 올라 있는 가격이다. 집이 없는 서민들은 엄두도 못 낼 무지막지한 금액이다. 평생을 벌어도 수도권 아파트를 사기도 힘든 젊은 세대의 눈에, 자기 집값 떨어진다며 아우성치는 군상(群像)들의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생각해야만 한다. 나이를 조금이라도 더 먹은 어른들이 제 집값 떨어진다며 악다구니 치는 이면에는 넘사벽이 되어버린 집값을 보며 한탄하고 울부짖는 서민과 젊은이들의 절망과 좌절이 있음을 생각해야만 한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파렴치한 세대가 되었나. 개탄스러운 모습이다.

정치인들도 갈수록 탐욕스럽게 변하고 있다. 보궐선거에 당선되어 반쪽짜리 국회의원이 되고 한 번 더하면 6, 여기다 한 번 더 당선되면 7년도 안 되어 3선 의원이 된다. 어찌어찌 3년 정도 더하면 4선도 된다. 이런 정치인들이 불과 10여 년의 정치경력으로 호기롭게 당 대표 선거에, 국회부의장 선거에 나가려는 게 지금 우리 정치판의 모습이다. 아예 국회의원 경험이 전무(全無)한 사람도 당 대표 선거에 나간다. 우리 정치판이 아무리 형편없는 곳이라지만 이래서야 되겠는가. 왜 우리 국회는 국회의장만 지내면 집으로 가도록 만들었는가. 왜 우리는 7, 8선이 1/3을 차지하고 청년이 1/3을 차지하는 노장청(老壯靑)이 조화로운 국회를 만들지 못하는가. 나만이 선()이요 정의라는 착각으로 자리를 독식하고, 공천을 전횡(專橫)하며 얻을 우리 정치와 국회의 미래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탐욕의 정치판에서 미래세대가 무엇을 배울지를 우리는 늘 두려워해야만 한다.

우리는 늘 지금을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 존재지만, 지금 이 세상을 힘겹게 살아가는 젊은 세대와, 앞으로 살아갈 세대에게 무거운 짐을 남겨주는 세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현재의 세대가 당연히 지켜야 할 가치이지, 선택의 영역이 아니다. 어려운 시대를 살다 가신 분들과, 지금도 어렵게 살아가는 분들에겐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그분들을 존경하고 존중해야만 한다. 그것으로 되는 것이다. 그런 조상과 어른들의 희생에 물질적 보상을 요구하며 소송을 불사하거나, 법을 고쳐서라도 더 받아 챙기려는 행태는 몰염치하고 수치스러운 일이고, 미래세대를 생각라도 해서는 안된다. 그 돈이 누구 돈인가? 정치라고 다를 것인가. 나만 잘할 수 있다는 오만과 탐욕을 드러내기 전에, 다른 사람이 더 잘할 것이라고 추천하는 어른이 많아야 한다, 우리가 수치심을 잃지 않아야만 비로소 건강한 공동체가 가능해진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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