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전적으로 지금 정권 담당자들의 태도에 달린 것입니다.” 
“정권이 설사 당신들한테 넘어간다고 할지라도 당신이 무고한 해군장관의 부인을 살해한 죄과는 그냥 넘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성유 국장의 목소리가 갑자기 격해졌다.

“그건 우리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당신들의 책임이지요. 어쨌던 정부측 제안은 이제 더 없나요?” 
“인질들과 전화 통화가 안 된다면 가족들이 한번 만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가족들 모두가 안 된다면 몇 사람이라도 대표가 가서 만나도록 해 주십시오. 장소를 비밀로 한다면 그 일에도 협조하겠습니다.” 

성국장의 태도가 갑자기 부드러워졌다.
“그건 가서 협의를 해보겠습니다. 이제 우리의 제안을 이야기하겠습니다.” 
백장군은 한참 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 24시간 여유를 주겠습니다. 24시간 이내에 행동을 취하십시오.”
“어떤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까?” 

백 장군은 한참동안 성유국장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24시간 이내에 당신들의 자가 비판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당신들 말대로 어느 날 느닷없이 정권이 총사퇴를 한다면 국민들이 우선 어리둥절해 할뿐 아니라 납득하기 어려운 문제가 발생 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실정, 독재, 인권유린 등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퇴하기 위한 명분을 축적하는 것입니다.” 

“실정, 인권유린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그런 사레가 별로 없어서 비판 할 것이 없는데요...”  성유국장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소리!”
백 장군이 갑자기 목청을 높였다가 주위를 의식했는지 다시 목소리를 낮추고 이야기했다.

“저기 나하고 같이 온 여성동지가 당신들이 비판받을 자료를 가지고 왔어요. 그걸 가지고 가서 이래도 할 말이 없는지 반성해 보시요. 24시간 이내에 시작해서 매일 한 두건씩 당신들의 비정(秕政)을 폭로하는 거요. 만약에 24시간 이내에 이일이 시작되지 않으면 국무위원 부인은 스무 명으로 줄어들지도 모릅니다.” 

“이제 제발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짓밟는 일은 제발 그만 둡시다. 여자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성유 국장이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관들과 정치인은 죄가 없다고요? 뇌물로 엄청난 부자가 되었고, 사모님들은 그 재산으로 놀아나며 남편 친구, 사기군, 심지어 운전사까지 안방에 끌어들여 마약과 섹스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더군요. 그뿐 입니까? 세상의 온갖 음탕한 짓과 부도덕한 짓을 하지 않은 사모님이 한 사람도 없더군요.”

“당신들이 무고한 사모님들을 고문해서 허위 자백을 받아 낸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 국무위원들은 모범적인 이 나라의 숙녀들입니다.”
“숙녀라고요? 숙녀가 운전사하고 한강 둔치에서 카섹스하며 괴성을 지르다가 순찰 경찰한테 들켜 꿇어앉아 사과 했나요?”
“그런 가짜뉴스는 그만합니다.”  

“믿지 않으시겠지요. 소위 국무위원 부인들도 그들이 스스로 밝힌 자기들의 죄를 보면 백번 죽어도 할 말 없는 여자들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민초들을 우롱하고 양심 파는 일을 예사롭게
저지를 수 있단 말입니까?” 
백장군의 음성은 나직했으나 단호하게 들렸다.

“그 분들을 심문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빨리 풀어주고 우리 이야기합시다.”
“그건 글쎄 당신들의 태도에 달린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않고 서로 딴 곳만 쳐다보고 앉아 있었다.
배는 다시 떠났던 선착장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자 그럼 자리로 다시 돌아갑시다.”  
백 장군이 일어서서 걸었다.
“다음 연락은 어떻게 합니까?” 
성유 국장이 물었다.

“당신들의 회답이 어떻게 나오는지 내일 아침 신문과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있겠소. 다시 한 번 경고하지만 부인들의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십시오.” 
백 장군은 그 말을 남기고 자기자리로 돌아가 빨간 모자를 쓴 여인한테서 서류 봉투 같은 것을 받아 성유국장에게 전달했다.

배는 곧 선착장에 닿고 장내 안내 방송도 마지막 인사를 하고 그쳤다.
곽 경감은 배 밖을 내다보았다. 선착장 근방에 허수룩하게 차린 사람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는데 그게 모두 위장한 수사, 경호 요원들 같았다.
곽 경감이 다시 선내 좌석으로 눈을 돌리자 백 장군 일행이 보이지 않았다.
곽 경감은 벌떡 일어서 사방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눈에 얼른 띠어야할 빨간 모자가 보이지 않았다.

“이봐요. 어떻게 되었어요? 그자들이 어디로 갔어요?” 
곽 경감은 곁에 있는 짝인 여자를 보고 물었다.
“저기 계단위로 올라가고 있어요.” 
여자가 턱으로 바깥을 가리키며 말했다. 곽 경감이 계단을 오르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으나 백 장군이나 빨간 모자의 여인이 보이지 않았다.

“빨간 모자가 안 보이는데?” 
“빨간 모자요? 그게 뭐 머리카락처럼 머리에 붙어있나요? 남의 눈을 피하려는 사람이 그렇게 표적이 되는 차림을 그대로 하고 다닐 것 같아요?”
여자의 말을 듣고서야 곽 경감은 멍청한 자신을 나무랐다.
“그들은 가버렸으니 우리도 내려요.” 

곽 경감은 하는 수없이 그녀와 함께 배에서 내렸다.
“우리 어려운 커플 해냈으니 차나 한잔해요.” 
여자가 곽 경감의 팔을 끌었다. 경감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여자를 따라 여의도의 어느 찻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테이블 앞에 마주 앉은 그녀를 보고 곽 경감은 깜짝 놀랐다.
“아니?” 
지금까지 같이 있던 늙은 여자는 온 데 간 데 없고 젊고 발랄한 여자가 미소를 띠며 앉아 있지 않는가?
“전 전미숙이라고 해요. 주제넘게 경감님 사모님 노릇을 해서 미안해요.”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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