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을 지낸 자들은 하나같이 불행한 말년을 맞았고, 우리 역대 대통령들의 불운한 말로(末路)로 인해 청와대 터에 대한 ‘흉지설(凶地說)’이 회자되었다. 이런 연유로 김영삼 대통령 시절부터 청와대 이전 문제가 거론되다가 김대중-노무현-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이전 공약을 발표했지만 추진하지 못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사연구초>에서 묘청의 평양천도운동이 좌절된 것을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으로 규정했다. 이처럼 청와대를 옮기는 일은 천도(遷都)에 버금가는 큰일이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으로 ‘용산 시대’가 열렸다. 조선 경복궁 창건 이후 600여 년, 고려 남경 행궁(行宮) 이후 1000년 가까이 지속된 ‘청와대 시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청와대 개방 이후 주말에는 평균 2만여 명, 평일에는 1만여 명이 관람객들이 방문했다.

지난 10월 30일. 남영희 민주연구원 부원장은 이태원 참사를 “청와대 이전 때문에 일어난 인재”라고 했다. 하지만 대통령 경호에 투입되는 경찰력과 다른 분야의 경찰은 임무가 다르다. 국가적 비극을 정치공세로 악용하는 ‘정치장사’는 용서 받을 수 없다.

지난 11월 4일. 경북 봉화군 아연광산 매몰사고로 고립됐던 노동자 2명이 221시간 만에 살아 돌아왔다. 이태원 참사로 깊은 슬픔에 잠긴 국민들에게 한 줄기 빛과 희망을 준 ‘봉화의 기적’이 일어났다.

윤 대통령은 10일 취임 6개월을 맞았다. 남은 4년 반 동안 ‘용산 시대’ 성공을 위해 분골쇄신(粉骨碎身)해야 한다. 이제 애도와 추모의 마음을 새출발의 동력으로 삼길 바란다.

윤 대통령은 참사를 부른 관행과 제도를 확 뜯어고친 후 책임을 규명해야 한다. 또한 북한의 간단없는 도발과 안보 리스크에 대비한 ‘민방위 재정립’이 시급하다. 아울러 여당에서는 국민의식의 재정립과 체제안정을 위해 핵심 당원교육을 거당적으로 실시할 필요가 있다.

경기도 관찰사 하륜(河崙,1347~1416)은 피를 부르며 권좌에 오른 태종이 조선의 기틀을 세운 실질적인 창업군주가 될 수 있도록 보좌한 책사요, 명재상이다. 본관은 진주, 자는 대림(大臨), 호는 호정(浩亭),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조선의 근간이 된 통치체제, 신분·인재선발·사회운영제도 등은 모두 하륜의 손을 거쳤다. 정도전이 설계한 ‘신권 우위’의 질서와 하륜이 추구한 ‘왕권 중심’의 질서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조선은 27대 518년간 이어졌다.

하륜은 ‘경사자집(經史子集)’에 통달했으며, 도참사상의 ‘3대 대가(권중화·무학대사·하륜)’로 거명될 정도로 천문지리와 음양오행에 밝았다. 또한 강직한 성품으로 간언을 서슴지 않아 고려 말 조정에서 세 번이나 쫓겨났다. 하륜은 온건 개혁 노선을 견지했으며, 급진개혁 정책에 대해서는 어김없이 반기를 들었고 그 시련을 묵묵히 감수했다.

1400년 11월. 하륜은 정종의 양위를 이끌어내어 이방원을 조선 3대 국왕으로 등극시켰다. 정종 때는 정사공신(定社功臣)에 올랐고, 태종 때는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올랐다.

명나라가 조선이 올린 표문(表文)에 무례한 내용이 있다면서 그 책임자로 정도전을 지목해 소환을 요구했을 때, 하륜은 계품사(計稟使)가 되어 정도전을 대신해 명에 가서 홍무제의 오해를 푼 탁월한 외교력을 발휘하였다.

1416년(태종16) 11월 6일. 하륜은 함남 정평(定平)에서 제왕들의 능침을 돌아보다가 향년 70세로 순직했다. 태종은 하륜을 자신의 ‘장자방(張子房, 장량)’이라 불렀다.

보수 정권에서 하륜 같은 ‘미래예측의 리더십’을 갖춘 경륜 있는 책사들의 활동을 기대하며, 호정(浩亭) 선생을 경모하는 필자의 자작 한시를 소개한다.

麗朝三罷諫言謀(여조삼파간언모) 고려왕조에서 간언을 해서 세 번 파직된 책사였고

華國雄文足上侯(화국웅문족상후) 나라를 빛낸 뛰어난 글로 명 홍무제를 만족시켰네

明主賢臣無誤謬(명주현신무오류) 명군의 어진 신하로 이치에 어긋남이 없었고

新邦柱石有宏猷(신방주석유굉유) 새로운 나라의 기둥으로 큰 계책을 많이 폈네

經書諸子全通達(경서제자전통달) 경서와 제자백가 등에 막힘없이 통달했으며

地理天文博自修(지리천문박자수) 풍수지리와 천문 등을 널리 스스로 닦았네

一德格天驚殉國(일덕격천경순국) 변함없는 덕이 하늘에 이를 놀라운 순국을 했는데

何時定社子房求(하시정사자방구) 어느 때 사직을 세운 자방(하륜)을 찾을 수 있을까

일요서울 논설주간 우 종 철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