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동구와 이웃한 광진구로 넘어왔다. 1995년 성동구에서 광진구로 떨어져 나왔다. 광진구는 성동구와 한 생활권이다. 두 지역을 비교해보면 공간 사용성에서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한강을 접하고 있다. 강남과 가장 가깝다. 서울에서 가장 자주 물난리를 겪던 낙후 지역이었다. 과거를 떠올리면 무척 낯설다. 광진구와 성동구에서 최고급 한강변 아파트 단지와 잘 꾸며진 수변 공원을 떠올린다. 뚝섬으로 가는 길이다. 목적지는 수도박물관과 뚝섬 전망문화콤플렉스 자벌레. [본문]2호선 지하철을 탔다. 찬찬히 지하철 노선도를 봤다. “, ‘뚝섬유원지’(7호선)이라는 역이 있네.” 방향을 틀었다. 건국대를 둘러보고 뚝섬유원지로 가기로 했다. 7호선 환승역인 건대역에서 내렸다.

건국대에 있는 일감호.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건국대에 있는 일감호.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1908년 박은식·안창호·이동녕 삼북출신 인사 서북학회 흔적
- 유일하게 남은 조선의 잠저(도정궁) 덕흥대원군의 사당 관리소홀

학창 시절부터 꽤 많은 대학 캠퍼스를 다녔다. 몇몇 대학을 빼고는 특색을 찾을 수 없다. 건대에도 큰 기대하지 않았다. 건대병원을 지나 교정에 들어섰다. 역시 그랬다. 삭막한 최신식 건물이 즐비하다. 건물과 건물이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이어주고 있었다. 3월 중순이 지났건만 봄을 느낄 수 없었다.

일감호상춘객 북적, 캠퍼스가 공원으로...

착각이었다. 건물 골목을 빠져나오자 교정 한가운데에 거대한 호수가 있다. 거울처럼 펼쳐져 있다. 일감호다. 1995년 서울캠퍼스를 조성하면서 만든 인공호수라고 한다. 이곳에서 황토를 퍼내 벽돌을 만들고 건축에 이용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거란다. 호수 둑을 따라 벚나무가 늘어서 있다. 둑 밑으로 노란 개나리가 활짝 피어 있다. 짝지어 걷는 한 청춘의 머리에도 벚꽃이 피었다. 부럽다. 시리도록 젊음이 그립다. 그런데 학생처럼 보이지 않는 상춘객이 꽤 많이 보였다. 캠퍼스가 공원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한때 추진됐던 캠퍼스의 공원화의 성공사례처럼 보였다. 벤치에 앉았다. 잠시 넋을 놓고 물을 구경했다. 커피라도 한 잔 들고 왔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걷는 방향으로 왼편에 고풍스러운 붉은색 벽돌 건물이 보였다. ‘상허박물관이다. 옛 서북학회회관이다. 1908년 박은식·안창호·이동녕 선생 등 삼북 출신 인사가 낙원동에 서북학회를 만들어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다. 서북학회회관은 조직적인 한·일 합방 반대운동의 거점이었다. 서북학회는 결국 1910년 강제로 해체됐다. 그 이후 서북학회회관은 오성학교와 보성전문학교로 교사로 사용됐다. 나중에 건국대 설립자인 상허 유석창 박사가 인수했다. ‘건국의숙으로 쓰이다가 198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건대 설립자의 호를 딴 상허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옛 서북학회회관은 현대 ‘100년 시민마루라 불리며 시민 누구든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쉼터로 활용되고 있다. 서북학회회관 터에는 벤치 3개와 타일 15개를 합쳐서 총 660명의 기부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한일합방 반대 거점 서북학회와 상허박물관

삼북지방의 애국계몽운동의 중심지가 됐던 서북학회회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삼북지방의 애국계몽운동의 중심지가 됐던 서북학회회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상허박물관을 둘러보면서 서북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그 이유가 있다. ‘서북은 조선시대에 가장 천대받던 고장이었다. 조선시대에도 지역주의가 있었다. ‘삼남삼북이 갈등하고 대립했다. 삼남은 충청·호남·영남을 뜻한다. 이곳에 기득권층인 양반이 살았다. 유림의 말발이 더 강했던 영남은 산남(山南)’이라고 차별화했다. 삼북은 황해·평안·함경을 가리킨다. 서북과 동의어다. 조선 중기 이후 300년 동안 이 지역에서 정승이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철저히 권력 중심에서 배제됐다.

비주류였다. 이중환의 택리지는 이를 방증한다. “평안과 함경 두 도에는 300년 동안 높은 벼슬한 자가 없다. 나라 습속이 문벌을 중시 여겨 서울 사대부는 서북 사람과 혼인하거나 벗으로 사귀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평안도와 황해도는 상대적으로 상인이 많았다. 평안도 출신의 성공한 상인이 많았다. 황해도는 말할 필요도 없다. ‘개성상인이라는 단어에서도 알 수 있다. 당시는 계급사회였다. 사농공상이 다른 대우를 받았다. 상인은 농민보다 더 천시됐다.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뒤 삼북 출신의 인사는 계몽운동에 헌신한 사람이 많았다. 계몽사상의 밑바탕에는 기독교가 있었다. 도산 안창호, 우남 이승만, 백범 김구, 안중근(가톨릭) 등 상당수 민족지도자는 기독교와 인연을 맺었다. 그들은 교육을 통해 문화의 힘을 배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국권 회복과 인권신장을 통하여 근대 문명국가를 만들 수 있는 길이라고 여겼다. 애국계몽운동에 전념한 이유도 그것이다. 애국계몽운동은 삼북지역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일본의 무단통치로 국권회복운동이 더욱 어려워졌다. 황해도와 평안도에 근거를 둔 서우학회와 함경도에 뿌리내린 한북흥학회를 통합, 서북학회를 만들었다. 1908년 그 근거지도 한양 낙원동으로 옮겼다. 그게 바로 서북학회회관의 전신인 한북의숙이다.

서북학회의 전신 한북의 숙

건대 홍예교.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건대 홍예교.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옛 서북학회회관은 국가등록문화재(53). 그만큼 건물의 역사적, 건축학적 가치가 있다는 얘기다. 상허박물관은 청나라와 레오 르네상스식 양식이 혼재하는 독특한 구조다. 입구는 마치 정자각처럼 튀어나온 포치를 뒀다. 이는 청나라식 건축법이다. 아치형 유리창, 쐐기돌 장식과 모서리의 코너스톤 등은 건물의 윤곽을 또렷이 드러내는 르네상스식 양식이다.

상허박물관에는 국보인 동국정운(142)와 보물인 율곡 선생 일가의 분재기(477) 등이 있다.

다시 일감호 둑길을 따라 걸었다. 한 쌍의 흰 오리가 호수를 벗어나 양지바른 물가에서 쉬고 있다. 한 마리는 열심히 털을 고른다. 물질에 지친 것일까. 일감호의 가장 깊은 곳에는 홍예교(虹霓橋)가 있다. 상허 박사는 건국대를 꿈의 산실로 만들겠다는 마음을 담을 다리라고 한다. 그런데 표지석에는 은 숫무지개, ‘는 암무지개를 뜻한다고 쓰여 있다. 무지개에도 암수를 두었던 조상의 상상력에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건국대 캠퍼스 안에는 조선 왕가의 마지막 잠저(왕이 등극하기 전에 살던 집)가 있다. ‘도정궁 경원당이다. 그런데 캠퍼스 안내도에 경원당은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건국대 재킷을 입은 학생에게 위치를 물었다. 모른단다. 무작정 한옥을 찾아 나섰다. 한쪽 구석에 숨어 있었다. 아직 코로나를 앓고 있었다. 대문에 코로나 팬데믹으로 개방되지 않는다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유일하게 남은 조선의 잠저라고 보기에는 초라했다.

왕 등극하기전 살던 집 도정궁 경원당
 

도정궁 경원당.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도정궁 경원당.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사직동에 있던 도정궁은 선조의 잠저이자 그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의 사당이다. 이곳에 사당을 지키는 후손이 살았다. 당초 도정궁은 200여 필지에 이를 만큼 커다란 궁터로 알려져 있다. 일제가 한민족 말살을 위해 도정궁을 여러 필지로 쪼갰다.

그럼 경원당은 무엇인가? 도정궁 안에 있던 부속건물이다. ‘경원당1979년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당시 소유주인 정재문(전 국회의원) 씨가 건대에 기증했다. 건국대가 이곳으로 옮겨 보전하고 있다. 담 너머로 본 경원당은 자형 개량한옥이었다.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을 두고 있다. 큰 방 옆에 낸 부엌 앞으로 마루와 방, 누마루가 있다. 처마와 마루 사이에는 유리 창문이 있다. 현관은 돌출 형태를 취했다. 일제강점기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입간판에는 “1913년 화재로 도정궁 건물 대부분이 없어져 1914년 전후해 다시 지었다라고 적혀있다. 입간판은 현재의 경원당에 대해서도 이때 만들어진 건물로 보이나 1920년대에 지었다는 의견도 있다라고 부연하고 있다. 지금 남아 있는 경원당은 사랑채 일부일 뿐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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