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정현 국제전문 기자의 대탐험
세계속의 유대인<2>

캐서린 그레이엄(Catherine Graham)


현 국내외 정세가 예사롭지 않다. 저 멀리 중동에서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갈등과 대립이 상시적인 가운데, 이스라엘의 대 레바논 전격 침공은 국제사회의 생생한 공분을 일으켰다. 또한 미국이 장악한 이라크 내에서는 연일 테러 정국이 가열되고 있는 가운데, 북핵 파문을 둘러싸고 한국과 미국의 혈맹관계에 급속한 균열이 가해지고 있는 형국에 있다.
여기에서 우리의 국제정세 진단 시각은 동서냉전 종식 이후 미국이 세계 유일의 패권자라는 인식하에 반미 중심축이 팽배해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것 하나가 있으니 옥상옥 즉 미국 위에 군림할 뿐 아니라 세계 전반에 걸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다국적 초국적 지배세력에 대한 통찰 부재가 지구촌 흐름을 조망하는데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모든 분야에서 막강 위력을 과시하면서 독보적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소수민족 유대인에 대한 면밀한 미시적 조망이라 할 것이다. 이에 일요서울에서는 기획특집으로 ‘세계 속의 유대인’ 시리즈를 기획했다. 독자 제현들의 많은 관심과 호응을 기대한다.
<편집자 주>

발행부수 적지만 영향력은 세계적

“저는 워싱턴 포스트(Washington Post) 한국판이 한국 독자들에게 세계를 열어주는 새로운 창구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는 한국인들이 복잡한 세계 정세에 대한 더 나은 지식과 이해를 위해 한국이나 미국의 시각이 아닌 국제적 시각에서 뉴스위크 한국판을 찾게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캐서린 그레이엄 1991년 11월 6일 뉴스위크 한국판 창간 기념사>
2001년 7월 17일 향년 84세로 미국 ‘워싱턴포스트’지(紙) 사주 캐서린 그레이엄 여사가 유명을 달리해 아쉬움을 남겼었다. 평범한 가정주부에서 세계 정상의 언론사 사주가 된 캐서린 그레이엄. 그녀의 죽음 앞에 현직 대통령이 애도사를 읽는 진풍경이 빚어졌다. 부시 대통령은 애도사에서 그녀를 “수줍음이 있지만 강철 같고,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겸손하며 우아한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세계 신문계의 여왕으로 군림했던 ‘워싱턴포스트’지(紙) 사주 캐서린!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이 신문의 발행부수는 그리 많지 않다. 인구 규모만을 따진다 해도 우리 메이저 신문들에 비해 발행 부수는 훨씬 떨어진다. 지난 1998년 5월 발행부수 기준으로 미국 유력지들을 살펴보면 월스트리트 저널(182만부), USA 투데이(172만부), 뉴욕 타임스(111만부), LA 타임스(110만부), 워싱턴 포스트(80만부)에 그치고 있다. 100만부에도 못 미치는 발행 부수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캐서린의 영향력은 단지 언론 업종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결코 ‘평범한 여성’이 아니었다. 전속 프랑스 요리사가 있었고, 그녀가 세계 각국 지도자를 만나러 다닐 때 에스코트하던 워싱턴 포스트 특파원들은 미용사와 운전기사가 제시간에 맞춰 오도록 연신 식은땀을 흘려야만 했다.
또한 사교계에서 그녀에게 통과의례를 거치지 않는 한 워싱턴에서 어깨에 힘을 줄 수 없을 정도였다.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폴 볼커는 “캐서린에게 초대받아야만 진짜 신고식을 치르는 것이다.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1987년 그레이엄의 고희 축하연에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조지 슐츠 국무장관, 그리고 헨리 키신저 등이 참석해 축배를 들었을 정도였다.

워싱턴포스트의 선장이 되다
원래 워싱턴포스트는 1877년 12월 6일 스틸슨 허친스(Stilson Hutchins)가 민주당계 기관지로 창간하였다. 거듭 재정난에 봉착한 워싱턴포스트는 1889년 해튼(F.Hatton)과 윌킨스(B.Wilkins)에게 매각되었다. 다시 1905년 신시내티 인콰이어러(Cincinnati Enquirer)의 발행인이었던 매클린(John R. McLean)에게 권리가 넘어갔다. 최종적으로 1933년 캐서린의 부친 되는 유진 마이어(Eugene Meyer)에게 경영권이 양도된다.
캐서린 메이어(그레이엄의 결혼 전 이름)는 부친이 바로 ‘유진 마이어’인바, 1917년 6월 16일 유대인 핏줄을 숨긴 부유한 은행가의 넷째 딸로 태어났다. 모친은 독일 루터교 목사의 딸인 애그니스 언스트이다.
먼저, 그녀의 부친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본다. 유진 마이어는 1895년 예일대학교를 졸업한 직후 유럽 여러 도시에서 2년간 은행 업무에 전념했다. 미국에 돌아온 뒤 뉴욕에서 미국 최초로 증권연구·분석팀을 둔 투자전문회사를 차려 거부가 되었다.
1917년에 우드로 윌슨 대통령으로부터 비철금속 분야에 관한 정부자문역으로 지명 받았을 때 그는 이미 영향력 있는 금융가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후 윌슨 정부의 전비조달위원회 실무이사를 맡았으며, 그 뒤 6명의 대통령 아래에서 고위직을 두루 역임했다.
허버트 후버 대통령을 위해 부흥금융회사(1932) 설립에 관한 법안을 기초하고 초대 의장을 맡았다. 1946년에 창설된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세계은행)의 초대 총재를 지냈다.
유진 마이어는 1910년 ‘애그니스 언스트’와 결혼했고 1933년에 워싱턴포스트지를 인수하면서 아내를 부회장으로 앉혔다. 캐서린의 어머니 애그니스는 당시 전위 예술가이자 영향력 있는 저술가·언론인으로서 보건·교육·사회 환경 등의 분야에 관한 저작으로 주목받고 있었다. 독일어·프랑스어·라틴어뿐만 아니라 중국어까지 구사하는 등 팔방미인이었던 것이다.
부귀를 손에 거머쥔 환경에서 유복하게 성장한 캐서린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명문 여자 대학인 바사르(Vassar)대에 입학하여 2년을 다니다가 시카고대학 3학년으로 편입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캐서린은 워싱턴 포스트에서 들어오라는 아버지의 제의를 일단 접고, 샌프란시스코로 옮겨가 ‘샌프란시스코 뉴스’ 기자로 입사한다. 그녀는 주당 24달러를 받으면서 부두 노조에 대한 기사를 자주 썼다.
이런 연유로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부모의 성향에 따라 공화당 지지자였던 그녀는 민주당 지지자로 정치적 견해를 수정한다. 그곳에서 반년의 시간을 보낸 후 1939년 워싱턴 포스트의 보금자리로 돌아왔다. 처음 맡은 일은 독자란이었다.
1940년은 캐서린의 운명이 획기적 분기점을 맞는 해였다. 필립 그레이엄을 만나 6월 5일에 결혼에 골인한 것. 필립은 하버드대 법대를 졸업한 변호사로 후일 대통령이 되는 케네디와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그레이엄은 솔직하게 고백한다. “처음에 필립의 아버지 어니는 우리 결혼에 반대해 필을 화나게 했다. 내가 유대인이라는 점이 문제가 됐다."
하버드 ‘로 리뷰’의 편집장으로 활동하고 대법관 펠릭스 프랑크푸르터의 서기로 일할 만큼 뛰어난 플로리다주 출신의 가난한 청년 필립의 역량은 장인의 능력을 압도할 정도로 정말 대단했다.
필립의 역량에 탄복한 나머지 마이어는 사위에게 워싱턴 포스트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위임한다. 마이어에게는 아들이 있었지만 의사로서 신문 경영엔 흥미가 없어 사위인 필 그레이엄을 후계자로 점찍은 것이었다.
필립은 1947년 워싱턴 포스트의 발행인으로 취임한다. 발행인으로서 상당히 성공적 길을 걸었다. 특히 1954년 3월에는 조간 경쟁지였던 ‘워싱턴 타임스 헤럴드(Washington Times Herald)’를 합병하였다. ‘헤럴드’를 인수·합병함으로써 워싱턴 5개 신문사 중 만년 4등의 꼬리표를 떼고 선두 ‘이브닝스타’를 앞지르게 되었다. 플로리다 TV방송국도 인수해 경영 다각화를 시도했다.
이런 일취월장에도 불구하고 필립은 늘 조울증에 시달렸고, 자사 여기자와 사랑에 빠져 이혼을 요구하면서 캐서린을 무척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결국 필립은 1963년 8월 3일 권총자살로 48세의 삶을 비극적으로 마감했다.
캐서린은 지엄한 남편의 사별로 “워싱턴 포스트를 매각하든지, 대리 경영인을 내세우든지 또는 자신이 직접 참여하는 것" 중 한 가지를 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된다. 드디어 1963년 9월 20일 워싱턴 포스트의 발행인으로 취임한다.

펜타곤 사건과 워터게이트로 명성
행정부의 수장을 대통령 혹은 수상이라고 부른다면, 언론의 수장은 응당 발행인일 것이다. 워싱턴 포스트의 수장이자 여장부인 캐서린의 담력과 용기는 전설적인 두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다. 20세기 최악의 전쟁 중 하나인 베트남 전쟁에 대한 국방부 기밀 ‘펜타곤 문서(Pentagon Papers)’의 보도와 미국 대통령 닉슨을 물러나게 한 ‘워터게이트(Watergate) 사건’ 보도다.
‘펜타곤 문서’ 기사화에 고문 변호사들은 강한 반발을 보이고 있었다. 후일 ‘워싱턴 포스트’의 이사장을 맡은 고문 변호사 프리츠 비비는 기사화가 3,500만 달러에 달하는 ‘워싱턴 포스트’의 증자 계획에 영향을 미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로 캐서린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또 하나는 워터게이트 대특종이다. 워싱턴 포스트의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의 집념 어린 집요함이 워터게이트의 진실을 밝혀 역사적인 사건으로 남게 했다. 당시 우드워드는 닉슨의 선거본부장이자 나중에 법무장관이 된 존 미첼로부터 “보도하면 캐서린의 젖가슴을 큰 세탁기에 넣고 짜버리겠다"는 협박과 욕설까지 듣는다. 이후 워터게이트 보도로 퓰리처상을 탄 우드워드는 캐서린에게 10달러짜리 빨래 짜는 건조기를 선물했고, 캐서린은 그것을 자기 사무실에 전시해 두었다.

경영인으로서도 탁월한 역량
캐서린은 워싱턴 포스트를 ‘포천’지가 선정한 ‘미국의 500대 기업’으로 만든 여성 기업가이기도 하다. 워싱턴 포스트 컴퍼니는 매출액이 24억달러(약 3조 1,200억원)가 넘는 ‘고도로 다각화된 미디어 기업’으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캐서린의 이런 성취는 무풍지대에서 달성된 것이 절대 아니었다. 워싱턴 포스트는 1975년 노조의 방화 및 사보타주로 최악의 위기에 직면했다. 일부 기자들이 노조원들의 폭력에 쓰러지는가 하면 139일 동안 계속된 파업으로 회사는 만신창이가 됐다.
캐서린은 이때를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그녀는 절대 나약하지 않았다. 폭력에 가담한 노조원을 단호하게 해고하고, 최신 기계들을 구입하고, 인력을 대체하는 등 강공으로 사태를 수습했다. 이 위기를 넘기면서 워싱턴 포스트는 탄탄대로를 걷게 됐다.
캐서린은 1998년 퓰리처상을 받은 자서전 ‘퍼스널 히스토리(Personal History)’에서 "저널리즘의 우수성을 따질 때 영업 이익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해 뛰어난 사업가로서의 면모를 입증한다. ‘먼저 신문이 살아야 공익도 있다’는 그녀의 경영철학은 언론도 비즈니스 영역에서 철두철미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레이엄 가족이 소유하고 있는 매체는 비단 워싱턴 포스트뿐만이 아니다. 대표신문인 워싱턴 포스트 외에 워싱턴 주와 메릴랜드 주에서 신문을 발행하고, 6개 지방 TV방송국과 19개 주에 영업망을 가진 케이블 네트워크 군단을 거느리고 있다.
또한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를 비롯 여러 잡지, 교육 자회사 ‘카플란’ 과 인터넷 자회사 WPNI 등을 소유하고 있다. 파리에서 발행되는 세계적 신문인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을 뉴욕 타임스와 공동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특히 워싱턴 포스트의 자매지이기도 한 시사주간지 뉴스위크! 1933년 타임(Time)지의 외신부 편집장이었던 영국의 저널리스트 토머스 ‘JC 마틴’이 뉴스위크(Newsweek)라는 이름으로 창간하였다.
발행부수가 약 440만부로서 세계 각지에서 약 2,500만 명이 구독하는 등 세계적 권위와 명성을 한 몸에 얻고 있는 뉴스위크는 영어로 된 본국판(本國版) 외에 스페인어·일본어·러시아어·한국어 등 5개 국어로 발행되고 있다.
캐서린은 1명의 딸과 3명의 아들, 10명의 손자와 손녀들을 두었다. 장남 도널드는 워싱턴 포스트사의 최고경영자이며, 장녀 랠리 웨이머스는 뉴스위크 객원기자 겸 포스트지# 칼럼니스트다. 둘째 아들 윌리엄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사업투자가로, 막내 아들 스티븐은 영문학자이자 자선사업가로 활동 중이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