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11월 2일 "영국 BBC, 세계 최초로 TV방송 실시"

영국 BBC방송이 베어드가 발명한 텔레바이저를 이용해 세계 최초로 TV방송을 실시했다. 영국의 사업가 존 로지 베어드(1888~1946년)는 1925년 아버지와 친구로부터 250파운드를 꿔 다락방에서 닙코프의 원판을 단 기계식 텔레비전 시스템을 제작했다. 1926년 1월 26일 텔레비전은 마침내 대중 앞에 섰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비록 화면은 작고 어두워서 영상이 겨우 보일 정도였으나, 하루 3번 전시되는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 사람들은 백화점 앞에 줄을 섰다. 당시 최초의 텔레비전 스타는 ‘빌’이라고 하는 인형이었다. 그러나 텔레비전이 인기를 끌자 베어드는 출연료를 지급하고 조수였던 윌리엄 테인턴을 모델로 썼다. 베어드는 텔레비전의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연극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개발했다. 특히 경마 중계방송은 세상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트럭에 거대한 카메라를 싣고 말들이 뛰어달리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줬다. 그러나 베어드의 성공도 잠시. 화질이 좋지 않은 기계식 텔레비전은 오래가지 못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의거 발생 "

11월 3일은 개천절(開天節)이며, 일본 메이지 천황[明治天皇]의 생일인 메이지절[明治節]이기도 하였다. 광주학생의거의 사건 발단은 이렇다. 10월 30일 오후에 광주를 떠난 통학열차가 나주역(羅州驛)에 도착했을 때 광주중학 3학년인 후쿠다 슈조(福田修三) 등의 일본인 학생이 광주여고보 3학년인 박기옥(朴己玉) 등을 희롱하는 것을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 동생 박준채(朴準埰) 등이 후쿠다를 후려치자 학생들 사이에 편싸움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개인간의 감정적 충돌이던 것이 학교와 학교 사이의 충돌로 확대되었고, 나아가 전호남일대의 한국인과 일본인 학생간의 충돌로 발전하였다. 광주의 학생들은 서슴없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쳤으며, 독서회의 지도자들은 학생들의 항일투쟁을 격려하고 후원하였다. 전국 각지의 거의 모든 학교가 참가한 이 운동에는 194개교의 학교와 5만 4,000여 명의 학생이 참여하였으며, 그 중 580여 명이 퇴학처분과 함께 최고 5년의 체형(體刑)을, 2,330여 명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광주학생운동은 1919년 3·1운동 이후, 젊은 학생들을 통하여 항일독립정신이 다시 한번 분출된 독립운동사상 격렬하고 힘찬 운동이었다.

1993년 11월 4일 "불교 조계종 성철(性澈) 스님 입적 "

성철스님은 1912년(임자) 2월 19일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출생했다. 우연히 영가 대사의 증도가를 얻어 읽게 되었는데 그 책을 읽은 후 크게 깨닫고 1935년, 24세에 입산 출가를 결심하고 가야산 해인사로 떠났다.해인사 백련암에 하동산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해인사에서 수계 득도, 이로부터 10년간을 천하 제방선원에 안거하면서 생식과 벽곡과 담식, 그리고 장좌 불와로 인역 고행 정진을 감행했다. 29세에는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다시 자신의 내면세계에 눈을 뜬다.깨달음이 단박에 이루어지면 닦음도 또한 담박에 이루어지는 ‘돈오돈수’가 참으로 견성의 경지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1947년에는 문경의 희양산 봉암사에 공주규약을 설정하고, 청담,우봉,보문,향곡,일도,자운,월산,성수,도우,법전 등 대덕 스님들과 더불어 불조의 정법을 발양함으로써 여기에서 교단 정화의 기초를 다졌다. 1993년 11월 4일 새벽, 거처인 해인사 퇴설당에서 상좌들을 부르고, 후사를 부촉하며 “때가 되었다”고 말한 뒤 일필휘지로 임종게를 수서했다. 그리고 열반에 들었다. 세수로는 82세, 법랍은 59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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