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6월 16일 "시인 노천명 별세"

1957년 6월 16일 ‘사슴 시인’이라는 애칭이 따라붙는 시인 노천명씨가 세상을 떠났다.이화 여전 출신인 그녀는 대학 재학시절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 졸업 후에는 조선일보, 매일신보사에서 기자생활을 했다. 일제시대 대동아전쟁을 찬양하는 친일적 작품들을 써,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시작활동을 보면 이화여전 재학 때인 1932년에 시 ‘밤의 찬미’, ‘포구의 밤’ 등을 발표하였고, 그 후 ‘눈 오는 밤’ ‘사슴처럼’ ‘망향’ 등 주로 애틋한 향수를 노래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45년 두 번째 시집 ‘창변’을, 1953년 세번째 ‘별을 쳐다보며’를 출간했다. 시 외에도 수필을 적지 않게 발표하여 48년 수필집 ‘산딸기’등을 출간했다.

1988년 6월 17일 "대학생 전방입소교육 폐지"

1988년 6월 17일 대학생 전방입소교육이 폐지됐다. 지금 대학생들에게는 낯선 ‘전방입소교육’. 하지만 80년대 대학생들은 교련 과목이 필수였고, 대학 입학하자마자 ‘문무대(학생중앙군사학교)’에 입소하여 군사훈련을 받아야했다.또 2학년때는 ‘전방입소교육’을 받았었다. 전방입소 교육에서 한 가지 장점이라면 처음 대학에 들어오는 새내기들이 전방입소 교육기간 동안 서로 몸을 부대끼면서 친해지고 또 왜 그런 훈련을 자신들이 받아야만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면서 국가와 이데올로기에 대해, 대학생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자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교육은 군사독재정권의 순수하지 못한 의도에 따른 것으로 학생들의 많은 비판을 받았었다. 특히 전방입소교육 문제로 일부 학생들이 분신하는 사태까지 발생하기도 했다.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 반공포로 석방 "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 협정에 반대하며, 지난 53년 6월 18일 반공포로 2만5,000여명을 석방, 세계를 경악케했다. 2년여간 한국전쟁 휴전회담이 진행되다, 1953년 6월에 접어들어서 휴전 회담의 핵심적인 쟁점이었던 포로교환문제가 6월 8일 타결됐다. 양측 대표가 합의서에 서명함으로써 휴전협정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반대와 통일을 주장했다. 그리고 독단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하기로 결심하고 한국군에 밀명을 내렸다. 군은 1953년 6월 18일 자정을 전후하여 비밀리에 작전을 전개, 유엔군이 관리하는 부산, 마산, 대구, 영천, 논산, 광주, 부평 등지의 반공포로 수용소에서 2만5,000여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1977년 6월 19일 " 고리 원자력발전소 1호기 점화"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고리 원자력발전소 1호기가 지난 77년 6월 19일 점화됐다. 부산 기장군 장안읍 고리에 있는 고리 원자력발전소는 1971년 11월에 착공하여 1977년 6월에 19일 초임계(원자로의 점화)를 한 다음, 각종 시험을 거친 후 1978년 4월부터 본격적인 상업가동에 들어갔다. 총 공사비는 외자 1억 5,700만 달러를 포함하여 약 1,428억 원이 소요되었다.이 원자력발전소의 가동으로 한국은 세계에서 20번째, 아시아에서는 일본·인도에 이어 3번째의 원자력발전국이 됐다. 한편, 원자력발전소의 가동은 수입 에너지원의 다원화에 의한 안정된 장기 에너지 확보의 길을 열었으며, 또 관련된 원자력산업의 육성을 위한 기술축적 및 고급기술인력 양성 등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1963년 6월 20일 "태풍 셜리호 남해안 강타 "

1963년 6월 20일 태풍 ‘셜리’가 남해안를 덮쳐 수십만의 수재민들이 발생했다. 셜리호로 인한 인명피해는 사망 49명, 실종 11명, 이재민 1만 7,861명, 건물피해 6,842호, 경작지가 57,861정보 유실됐다. 태풍 피해로 그해 가을 쌀농사는 대흉년이 됐고, 서민들의 민심은 흉흉했다.

1966년 6월 4일 "장면 전국무총리 별세"

제 2공화국의 실권자였던 장면 전 국무총리가 66년 6월 4일 사망했다. 제헌국회의원을 지낸 장면은 지난 1949년 초대 주미한국대사가 되어 한미국교를 위하여 공헌했다. 또 6·25전쟁 때는 주미대사로 있으면서 유엔과 미국의 지원을 얻어내는 데 크게 기여하였고, 1951년 국무총리가 됐다. 이후 야당의 지도자로서 자유당 독재정권과의 투쟁에 앞장섰으며, 1955년 신익희 등과 민주당을 조직, 최고위원이 되고 1956년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4·19혁명 후 제5대 민의원을 거쳐 내각책임제하의 제2공화국 국무총리로 선출되어 정권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총리 취임 9개월 만에 실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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