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2월 17일 <세종기지 준공>

1988년 2월 17일 우리나라 최초의 남극과학기지인 ‘세종기지’가 준공됐다. 세종기지는 남극 반도와 거의 평행하게 발달해 있는 사우스쉐틀랜드 군도의 여러 섬 중 가장 큰 섬인 킹조지 섬의 바톤 반도(남위 62°13’23”, 서경 58°47’21”)의 해안가에 자리잡고 있다. 세종기지는 준공 당시에는 본관동, 연구동, 하계동, 거주동 및 장비지원동 등 6개의 건물과 2개의 전문관측소 등 420평의 규모였다. 하지만 1990∼1991년 하계 기간 중 창고동, 장비보관동 및 발전동의 증축 공사를 완료하여 현재 713평의 건물면적을 갖추고 있다. 현재 45명 이내의 연구 및 지원인력이 상주하고 있다. 건물 중 본관동, 거주동, 연구동, 하계연구동은 단열효과 및 눈의 침투를 막기 위하여 고상식으로 지상 1.7m 높이에 설치되었으며 그밖의 발전동, 장비보관동, 창고동은 평상식으로 설치돼 있다.세종기지의 설립목적은 남극의 무한한 자원개발에 참여할 수 있는 연고권 획득에 있다. 또 주요업무로는 해저지형 및 지층탐사, 저서생물·해양생물 채취, 육상지질 및 암석표본 채취, 육상 동식물 분포조사 등이다.

1997년 2월 19일 <등소평 별세>

중국의 주요 정치가 중 한 사람인 등소평이 지난 97년 2월 19일 사망했다. 중국 쓰촨성 출신인 등소평은 1920년대 공산주의운동에 투신, 1930년대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大長征)에도 참여했다. 또 1949년 장강(長江) 도하작전과 난징 점령을 지도하여 중화인민공화국(중국) 수립에 공을 세웠다. 중앙인민 공화국 건립 후, 중앙인민정부위원, 서남 군정위원의 부주석, 서남 군구정치 위원등을 역임했다. 문화대혁명 당시에는 당 내의 모든 직무가 면직되어 공개비판을 받기도 하고, 1969년∼1973년 사이에는 강서성의 한 공장에서 육체 노동을 하기도 했으며, 1973년에 복권됐다. 복권 이후 중국 공산당 군사위 주석과 중국 인민 해방군 총참모장 등을 역임하며 중국 최고 지도자로 급부상했다. 80년대부터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한 등소평은 이때부터 실용주의노선에 입각하여 과감한 개혁조치들을 단행하였다. 그의 집권 후 기업가와 농민의 이윤보장, 지방분권적 경제운영, 엘리트 양성, 외국인투자 허용 등으로 중국경제가 크게 성장하였다. 1989년 4월 천안문 사건으로 그의 정치적 입지가 불안해 보였으나 위기를 수습하고, 중국 정계의 최고 실권자로서 개혁과 개방정책을 추진했다.

1985년 2월 21일 <국제그룹 해체>

국내 고무화학공업을 개척했던 국제그룹이 지난 85년 2월 경영부실을 이유로 해체당했다.1947년 고무신 공장으로 출발한 국제그룹은 지난 62년 국내 최초로 아메리카 대륙에 신발을 수출하기 시작한 이래 계속 수출확대와 해외시장을 개척하며 급성장했다. 지난 1975년 모회사인 국제상사(주)가 종합상사로 지정을 받은 이래, 수출실적은 1981년에 8억 6,000만 달러를 기록하기도 했다.계열기업으로 국제상사(주)·연합철강공업(주)·국제종합기계(주)·풍국화학(주)·국제방직(주)·원풍산업(주)·조광무역(주)·성창섬유(주)·국제제지(주)·연합물산(주)·국제종합건설(주)·국제종합엔지니어링(주)·국제토건(주)·국제통운(주)·동서증권(주) 등의 21개 회사를 거느리며 운영되다 1985년 정부의 부실기업정리의 일환으로 해체당했다.하지만 해체 이후 ‘군사정권의 미움을 사, 강제적으로 해체 당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1985년 제5공화국 정권하에서 국제그룹의 주거래 은행인 주식회사 제일은행이 국제그룹의 해체방침을 발표하고 그에 따른 일련의 후속조치로 국제그룹이 해체되었는데 국제그룹의 해체는 헌법상의 자유민주적 경제질서에 대한 관치행정의 표본으로 회자되어 왔으며 그 순수성 및 정당성이 의심되어 왔다.

1998년 2월 13일 <검찰, DJ비자금 무혐의 처리>

지난 98년 2월 13일 검찰이 DJ비자금에 대해 무혐의 처리했다. 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지난 97년 말. 당시 여당이었던 신한국당은 불쑥 ‘DJ의 비자금 의혹’을 제기했고 검찰은 수사착수 발표 하루만에 수사 유보 결정을 내렸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김태정 당시 검찰총장이 “수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이후 김대중씨가 대선에서 승리, 대통령에 당선된다. DJ 당선 후, 검찰은 국민화합 차원에서 시효가 만료된 부분은 ‘공소권 없음’으로, 나머지는 ‘무혐의’ 처리했다.이유야 어찌 됐든 이 사건은 정치검찰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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