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 "
서울 강북의 성수동과 강남의 압구정동을 잇는 성수대교가 붕괴됐다. 다리 북단 5번째와 6번째 교각 사이의 상판 48m가 한강으로 내려앉은 것이다. 어이없는 다리 붕괴로 버스와 승용차를 타고 가던 출근길의 시민과 학생 32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 끊긴 다리와 휴지처럼 구겨진 채 뒤집힌 버스로 인해 발생한 사망자와 부상자들, 사고현장의 처참한 모습에 온 국민은 경악했다. 다리의 미관을 고려해 트러스 공법으로 건설된 성수대교는 부실시공과 관리부실로 개통된 지 15년만에 무너져 버려 ‘건설한국’의 자존심은 큰 상처를 입게 됐다. 고도성장과정에서 잉태된 총체적 부실의 현장이 된 성수대교는 전면 재 시공돼 붕괴사고가 일어난 지 3년 뒤인 97년 7월 재개통됐다.

1986년 10월 21일 "금강산댐 착공 발표 "
내외통신은 북한이 금강산 수력발전소댐을 착공했다고 평양방송을 인용해 보도했다. 며칠 뒤 5공 정부는 금강산 댐의 규모가 높이 215m, 저수용량 2백억톤으로 북한이 순수 군사목적으로 댐을 건설했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금강산댐이 88서울 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한 것으로 댐의 물을 방류하면 서울과 중부지역이 물바다가 된다고 밝혔다. 이어 11월 26일에는 국방, 문공, 건설, 통일원 장관 등 금강산댐과 관련된 4부 장관이 평화의 댐으로 불리는 대응댐 건설을 발표했다. 이런 정부 발표에 따라 금강산댐 규탄대회에 평화의 댐 건설을 위해 전 국민을 대상으로 성금 모금이 이어졌다. 그러나 온 국민을 흥분시킨 금강산 댐의 가공할 위력은 1993년 감사원의 특별감사 결과 크게 과장된 것으로 나타났다. 댐의 규모가 3배 이상 과장됐고, 수공 가능성도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1986년 당시 5공 정부 고위층이 금강산 댐의 실체를 제대로 알고 있었으면서도 정권유지를 위해 국민을 속인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1967년 10월 22일 "미국, 베트남전 반대시위 "
베트남전 참전을 반대하는 수천명의 시위대가 미국 국방부 앞으로 몰려가 시위를 벌였다. 일부 시위자들은 베트콩의 깃발을 흔들기도 했다.무장한 군인과 연방경찰의 저지선으로 뛰어들며 육탄전을 벌이는 시위대는 진압과정에서 시위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했다. 베트남전 종식을 위한 국가동원위원회의장 대이빗 델링커를 포함해 시위대 250여명이 체포됐다. 1967년부터 본격화된 미국내의 배트남전 반대시위는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했던 히피문화와 맞물려 배트남전 반대시위는 반전평화운동으로 확대됐다. 베트남전 참전을 결정했던 미국 의회와 정부는 베트남에서의 전쟁과 함께 전쟁을 반대하는 여론과 또 하나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더욱 확산된 베트남전 반대시위는 1973년 1월27일 미국과 북배트남의 휴전으로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할 때까지 계속됐다.

1996년 10월 23일 "김구선생 암살범 안두희 피살 "
백범 김구선생을 암살했던 안두희가 1996년 이날 47년에 걸친 잠적과 피신생활의 종지부를 찍었다. 안두희는 새벽에 인천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 침입한 박기서씨에 의해 살해됐다. 당시 부천 소신여객에 운전기사로 일하고 있던 박기서씨는 안씨를 방망이로 내리쳐 살해했다. 박씨가 안씨를 살해할 때 사용한 나무 방망이에는 ‘정의봉’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경찰에 자수한 박씨는 평소 김구선생을 존경해왔으며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 안씨를 살해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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