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10월 19일 "군사혁명정부, 이정재 사형 집행"

이천의 씨름선수 출신으로 알려진 이정재는 김두한의 부하였다. 김두한은 자기 밑에 들어와 뛰어난 머리를 보여준 그를 의제라고 불렀다.그러나 6·25이후 동대문 지역 패권을 장악, 이기붕과 손을 잡고 주먹계의 일인자로 부상했다. 이정재의 등장으로 1세대 낭만파 주먹이 가고 2세대 조직주먹이 형성됐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동시에 그는 정치깡패의 1세대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정치에 너무 깊이 개입했던 탓에 5·16직후 혁명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1920년 10월 20일 "김좌진 장군 휘하 독립군, 청산리대첩 거둠"

청산리 전투는 1920년 10월 21일 단 하루만에 끝난 전투가 아니었다. 21일 아침 8시에 시작되어 26일 저녁까지 6일간을 꼬박 밤까지 새우며 싸운 6일 전쟁이었다. 10월 21일의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 전투, 천수평 전투, 어랑촌 전투 그리고 맹개골, 만기구, 쉬구, 천보산, 고동하 전투 등 6일간에 걸친 일련의 접전을 통틀어서 청산리 전투라 한다. 만주의 독립군을 추격하여 청산리로 들어오는 일본군의 소식을 들은 김좌진은 이범석 장군과 공격계획을 세웠다. 부대를 둘로 나누어 매복하고 있다가 청산리 골짜기로 행진해 오는 일본군을 독립군이 일제히 공격,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김좌진장군 휘하의 북로군정서 독립군과 홍범도장군의 부대원 3,000여명은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서 편성된 일본군 동지대(東支隊) 5,000여명과의 전투에서 3,000여명을 살상(일본측 자료 812명)하였다.

1994년 10월 21일 "서울 성수대교 붕괴"

지난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40분경에 성수대교붕괴사고로 32명이 숨지고 17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때 버스 한대도 떨어졌다. 사고로 결국 폐차가 된 이 버스는 서울대공원에서 번동방면으로 가던 중에 사고가 발생하였다.성수대교의 붕괴원인은 들은 바로는 부실공사가 한 원인이었다. 거기에다가 평소 차량들이 많이 다녀서 성수대교가 하중을 못 견뎌 무너졌다.그로부터 5년후 딸을 잃은 아버지가 이를 비관해서 성수대교에서 몸을 던져 자살한 사건도 발생하였다. 성수대교는 붕괴사고가 일어난 지 2년 9개월만에 재개통되었다.

1962년 10월 22일 "존 F. 케네디, 쿠바 해역 봉쇄 명령"

케네디 대통령은 이날 소련의 핵 미사일이 쿠바에 배치되고 있다고 TV를 통해 발표했다.케네디는 이날 저녁 연설에서 소련이 스스로의 약속을 어기고 미국에 거짓말을 하면서 쿠바에 공격용 핵미사일과 폭격기 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고 밝히고 이들 기지들은 서방의 대부분 도시들을 공격할 수 있는 중거리 미사일 배치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케네디는 더 이상의 소련의 공격용 군사장비의 쿠바 반입을 막기 위해 해군과 공군을 통한 봉쇄조치를 취하겠다고 발표했다.그는 실제로 카리브연안에 함정과 군용기들을 대거 배치하고 핵전략공군사령부에 비상체제를 명령하여 해상봉쇄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했다.

2002년 10월 23일 "러시아 모스크바 극장에서 인질극 "

탄띠와 폭약을 상반신에 두르고 소총과 수류탄으로 중무장한 괴한들은 “우리는 체첸 사람들이다”라고 외치며 돔 꿀뜨르이 극장안으로 들이닥쳤다.인질극 소식을 접한 러시아 당국은 즉각 저격부대를 포함한 병력을 현장에 출동시켰다. 유리 루슈코프 모스크바 시장의 진두 지휘 아래 특수부대 ‘오몬’과 대(對)테러 ‘알파’ 진압부대 1천여명이 극장 주변을 에워쌌다. 인질범들은 출동한 경찰을 향해 소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지며 저항했다. 러시아 특수부대가 26일 아침(현지시간) 체첸 분리주의자 무장괴한들이 700여명의 인질을 억류하고 있던 모스크바 극장에 진입, 상황을 완전 장악하고 인질을 전원 석방했다.그러나 러시아는 진압과정에서 독가스를 살포, 수백명에 달하는 인질들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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