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기대와 희망을 갖고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미국으로 떠나는 날 북한외무성은 폭탄선언을 했다. “자위를 위해 핵무기를 만들었으며, 북핵문제가 다루어지는 북경회담에도 참가를 무기한 중단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2005년 2월 10일은 북핵문제의 분수령을 만드는 역사적인 날로 기록될 것이다. 정부는 그동안 북한의 핵보유에 대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해왔다. 핵에 대한 북한의 일방적인 주장을 받아들이고,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한 북한에 핵이 존재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고, 북한이 자위의 수단으로 핵개발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까지 극언을 하면서 북한의 입장을 두둔해 왔다. 그러한 북한이 드디어 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핵보유를 공식적으로 국제사회에 선언한 것이다. 하루 아침에 핵보유국가로 등장한 것이다. 지극히 우려했던 일이 현실화됐다. 대화를 통한 핵문제 해결방식도 중단됐다. 북한은 최악의 시나리오로 치닫고 있다. 북한의 핵개발 역사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60년대 초부터 시작된다. 식량난을 격고 있으면서 500만~600만명이 굶어죽는 참혹한 현실에는 눈을 감고, 북한은 정치적 생명을 걸고 광신도처럼 핵개발에 40여년의 시간과 돈과 정열을 쏟아 온 것이다. 1차 북한 핵 위기가 오고 1994년 제네바합의가 이루어졌을 때도 북한은 이미 25~27kg의 플루토늄을 추출하고 있었고, 지금은 1994년에 봉인되었던 8,000개의 폐연료봉을 재처리하여 15~17kg의 또 다른 플루토늄을 보유하는 국가가 된 것이다. 거기에다 제네바합의가 이루어진 2년 후인 1996년부터 북한은 우라늄 핵폭탄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1996년부터 1999년 중반까지 북한의 식량사정은 최악의 단계로 들어가고, 공식적으로 UN이 확인한 것만도 350만 명이 굶어 죽은 것이다. 급박한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북한정부는 단 1달러의 식량도 해외에서 사들인 흔적이 없다. 그러면서도 파키스탄의 핵폭탄의 아버지라 불리는 A.Q.칸 박사를 13번 이상 북한에 불러들여 농축우라늄 핵개발 프로그램을 추진해 온 것이다. 2003년 12월 19일 리비아의 카다피는 가히 세기적인 결단을 내린다. 핵무기를 포함한 대량살상무기(WMD) 개발을 포기하고 관련설비와 핵개발 물질을 공개하고 국제사찰을 받겠다고 미국은 물론 영국과도 합의했다. 미국이 리비아에서 넘겨받은 무기급 우라늄인 이른바 6불화우라늄(UF6) 은 정확히 1.7t 이었는데, 미국 테네시주 ‘오크리치 국립핵연구소’에 보내 원산지 역추적을 한 결과 북한에서 구입한것이라고 뉴욕타임스는 밝히고 있다. 2001년 초에 북한이 리비아에 직접 반출한 것이거나 또는 파키스탄의 A.Q.칸 박사가 운영해온 국제암시장을 통해서 사들인 것일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 과학적 근거까지도 있다. 리비아에서 발견된 핵무기용 용기의 표면에 남은 플루토늄의 흔적 역시 북한 영변핵시설의 플루토늄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플루토늄은 ‘지문’과 같은 독특한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다. 북한 핵을 평화 외교적으로 해결 할 수 있고, 그것도 한국이 주도해가겠다는 이 나라 외교의 설자리는 이제 어디에 있는가? 완성된 핵무기를 들고 벼랑 끝에서 줄타기 하는 김정일의 모습만 감탄하며 지켜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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