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너무 살벌하고 썰렁하다. 대립과 갈등, 증오와 저주, 술수와 책략이 거침없이 횡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목소리가 큰 사람, 얼굴이 두꺼운 사람, 눈치 빠르고 몸놀림이 잽싼 사람들이 윗자리에 앉는 세상이다.

큰 소리로 분위기를 제압하는 사람, 반칙 저지르기를 밥 먹듯 하되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사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끼어들기와 새치기를 잘 하는 사람이 재미를 보는 세상이다. 그리고 위선의 가면이 벗겨질 것 같으면 ‘도둑놈 허접 대듯’ 둘러대다가 여차하면 삼십육계 줄행랑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목에 힘을 주고 행세하는 세상이다.

시와 낭만이 없고 해학과 풍류도 없으니 스산하기 짝이 없다.

이 같은 사회현상을 약간 느끼하고 닭살 돋는 어법으로 말해 본다면 토머스 홉스의 저 유명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헛된 말장난에 지나지 않음을 입증할만한 새로운 시대정신과 세상윤리가 아직 세워지지 않았다는 뜻이리라.

이 시대 21세기의 최고 최대 키워드는 뭐니뭐니해도 ‘변화’와 ‘혁신’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오불관언(吾不關焉) 꿈쩍도 하지 않는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마따나 ‘만물은 변화’하는데 세상사람들의 반응은 ‘잘 났어 정말’이 고작이다. 아니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게 하필 더 나빠지는 쪽이니 그 어깃장 심보는 또 얼마나 심술궂고 고약한가.

‘변화’의 의미를 강조한답시고 가령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라는 말 뿐”이라는 다니엘 벨의 이야기를 인용하면 ‘너나 잘 하세요’ 계열의 냉소적 반응으로 면박 당하기 십상이다.

‘변하지 않으면 망한다’(구자경 LG 그룹 명예회장) 던가 ‘아내와 자식을 빼고 모두 바꿔라’(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는 등 불과 십 수 년 밖에 되지 않는 내력의 예언자적 메시지들이 마치 오래된 격언이나 잠언처럼 그 설득력의 카리스마가 휘황한 빛을 내는 이유다.

거기에 가령 ‘달리는 자동차의 타이어를 바꿔라’는 잭 웰치 (전 GE 회장) 의 섬뜩한 훈계까지 보태지면 ‘변화와 혁신’의 무게는 쉬 감당하기 버거울 만큼 막중한 게 사실이다.

젊은 가수 이정현이 ‘바꿔’라는 노래로 전국을 뒤집어 놓은 적이 있다. 21세기 뉴 밀레니엄의 첫 해였던 2000년의 일이었다.

‘바꿔, 바꿔, 모든 걸 다 바꿔/ 바꿔 바꿔 (사랑을/거짓을/세상을) 다 바꿔’라는 가사가 경쾌하고 박진감 넘치는 테크노 리듬과 함께 하필이면 그 해 4월 총선에서 정치판을 확 바꾸고 싶었던 시민들의 열망과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 때보다 나아진 게 별로 없다. 확실히 좋아진 분야가 적지 않다지만 사회의 전체적인 기본 틀과 분위기는 여전히 ‘글쎄올시다’가 아닌가 한다.

하기야 제 아무리 변화와 혁신을 도모한들 프랑스 대혁명 이나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처럼 피의 혁명을 꾀할 수 없고 보면 그 같은 변화불감증과 혁신 피로
감을 크게 탓할 수 없는 노릇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릴 것은 버리고 바꿀 것은 바꿔야 한다는 게 오늘의 시대정신이요, 흐름이다.

그 단호한 시대정신을 담은 ‘바꿔’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 이정현이 요즘도 앙코르를 받으면 그 노래를 부른다는 데 ‘바꿔’ 대신 ‘됐어!’를 노래할 날이 언젠가는 오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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