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독일 월드컵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전국민들은 또한번의 ‘신화창조’를 기대하면서 눈과 귀를 독일쪽으로 열어놓고 있다.G조에 속해있는 우리나라는 아트사커로 세계 최강의 자리를 넘보고 있는 프랑스, 압박축구의 대명사인 스위스와 상대해야 한다.물론 토고도 만만하지 않지만 16강 진출을 위해서는 유럽축구를 넘어야 한다. 따라서 본지는 유럽축구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축구전문 칼럼니스트인 서형욱씨의 <유럽축구기행·살림출판사>을 연재한다. <편집자주>

마드리드의 첫 인상은 따뜻하고 여유롭다. 관문인 바라하스 공항의 입국심사관도 이방인에게 애써 많은 걸 묻지 않는다. 마드리드 공항에서라면 번번이 아시아인들을 붙들어 엑스레이 촬영대에 올려 세우는 런던 히드로 공항의 쌀쌀맞은 접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덕분에 초행길인 마드리드에 닿는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마드리드는 지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스페인의 온전한 중심지다. 다양한 민족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킨 스페인에서 마드리드는 단순한 수도지 이상이다. 아랍 세력을 몰아낸 11세기와 스페인 통합이 시작된 15세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는 동안 스페인을 대표하는 도시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카탈루냐, 바스크를 비롯한 다른 지역민들에게 마드리드가 상징하는 카스티야 지방은 여전히 증오의 대상이다. 오랜 시간 쌓여왔던 반감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완화되고는 있지만 이들 사이에는 여전히 긴장감이 감돈다.

아인트호벤과 ‘한판승부’

마드리드는 거대하다. 물론 여느 유럽 국가의 수도지와 마찬가지로 축구에 관해서도 단연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서울과 달리 인구밀도는 높지 않지만, 역시 서울과는 다르게 세 개의 1부 리그 축구팀을 거느리고 있다. 레알 마드리드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그리고 레알 바예카노. 이들은 모두 각각의 스타디움을 거느리고 각기 다른 팬들을 위해 그라운드를 질주한다.마드리드의 9월은 너무 뜨겁다. 한국의 7,8월 못지않게 타오르는 태양은 멀리서 날아온 여행객을 쉬 지치게 한다. 일단 주저 없이 숙소에 여장을 푼 뒤 경로를 정하기로 한다. 이번 마드리드 방문의 주된 목적은 레알 마드리드와 올림피크 마르세유의 챔피언스리그 경기를 관전하는 일이다.

지난 시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스페인 최고 팀 레알 마드리드는 영국의 슈퍼스타 데이비드 베컴을 영입하면서 의욕적인 새 출발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난 시즌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낸 레알 마드리드 입장에서는 리그보다 챔피언스리그에 거는 기대가 더 높을 것이다. 경기장은 시내 중심가에 위치해 있다. 마드리드에서도 가장 땅값이 비싼 이곳은 레알 마드리드가 역사적으로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동명의 지하철역에 내려 몇 걸음을 옮기면 고급 빌딩 틈새에 우뚝 선 그 웅장한 외관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 외곽에 지어진 대부분의 경기장과 달리 주변의 대형 빌딩, 대로와 어우러져 있어 한눈에 전체를 담을 수 없지만 마천루 틈에서 위용을 잃지 않는 당당함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매혹적이다.

파파라치 ‘드글 드글’

축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마드리드가 아니라 하더라도 방문한 도시의 축구팀을 찾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무작정 떠난 여행길에 그저 여행안내서가 지시하는 대로 떠도는 것에 비하면 의미 있는 선택이 될 것이다. 낯선 도시에서 축구를 통해 지역민과 말문을 터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고개를 끄덕이리라. 그렇기에 굳이 축구팬이 아니라 하더라도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를 빼놓은 채 마드리드를 다녀가는 것은 두고두고 아쉬워해야 할 일이다. 그 이름에서 1950년대 레알 마드리드의 전성기를 상징하고 있는 이 경기장은 존재 자체가 프랑코 시대의 철권통치를 떠오르게 한다. 철저하게 마드리드 중심의 타 민족 억제 정책을 편 프랑코는 레알 마드리드에 대한 노골적인 지지와 후원을 통해 이 팀을 유럽 정상에 올려놓는다. 이 과정에서 다른 지역의 적대감은 절정에 달했고 지금도 카탈루냐, 바스크와 같은 지방에서는 그들의 팀이 레알 마드리드를 꺾을 때마다 도시 전체가 축제 분위기로 뒤덮인다.

정권은 바뀌어도 축구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남는다. 시대를 관통하는 축구의 놀라운 생명력. 그 중심에는 오늘도 마드리드가 우뚝 서 있다. 마드리드에는 자존을, 다른 지역에는 적의를! 스페인에서, 그리고 마드리드에서 축구를 외면한 여행이 피상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공사 중인 경기장 주변을 둘러보는데 낯선 라틴계 남자가 접근한다. 비밀임무를 띤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다가온 그는 경기장 옆 건물을 가리키며 “저곳에 호나우두가 묵고 있으니 함께 기다립시다”라고 제의한다. 심상치 않은 인상에 목에 카메라까지 둘러맨 것이 영락없는 ‘파파라치’다. 이처럼 유럽에서는 스타들의 사생활을 사진으로 찍어 팔아먹는 일로 연명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다. 레알 마드리드의 스타 데이비드 베컴의 경우, 심야에 개인 비서와 호텔을 들락거리는 장면이 대중일간지에 공개되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만큼 유럽 파파라치들의 극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문득 사생활을 즐길 수 없는 스타 선수들이 측은하게 느껴진다.

스타플레이어 ‘전시장’

흔히 레알 마드리드를 일컬어 ‘지구방위대’라 부른다. 과장된 표현이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말도 안되는 별명일지 모르지만 레알 마드리드의 위상을 설명하기에는 꽤나 적절한 비유다. 만일, 지구 침공을 노리는 외계인들과 축구로 승부를 결정지어야 하는 때가 온다면 이들을 중심으로 팀을 짤 수밖에 없을 테니까. 피구, 지단, 호나우두, 베컴. 매년 세계 최고의 선수들을 한 명씩 영입한 레알 마드리드는 기존의 스타플레이어 라울까지 더해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스쿼드(squad)를 구축했다. ‘앞으로 또 이런 팀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선수들의 명성만큼은 어떤 팀도 비교 불가다. 이 같은 명성은 팀 운영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때론 자존심이 도를 지나쳐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한다.

2002~2003시즌 우승을 차지한 직후 델 보스케 감독을 해임한 것이나 팀 전술의 핵인 수비형 미드필더 끌로드 마케렐레가 급여 인상을 요구하며 태업한다는 이유로 아무런 대책 없이 첼시로 이적시켜버린 것은 대표적인 ‘자만’의 사례라 하겠다. 재미있는 것은 팀 전체가 스타로 구성된 탓에 훈련장까지 수많은 팬들이 몰려든다는 사실이다. 마드리드 중앙역 근처에 자리잡은 레알 마드리드의 훈련장은 훈련시간만 되면 팬들로 넘쳐난다. 특히 데이비드 베컴 입단 이후에는 중국과 일본 여성들의 방문 숫자가 크게 늘어났다는게 훈련장 관리인의 설명. 상황이 이러니 구단 측은 영리하게도 ‘훈련 유료 관람제’를 착안했다. 훈련장에 나서는 선수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입장객 수를 통제하겠다는 것이 이유지만 그렇다고 속내를 감출 수야 없는 노릇. 스타들 덕에 적잖은 부수입을 거둘 수 있으니 참으로 쓸만한 마케팅 전략인 셈이다.

커다란 경기장에서 선수들의 기량을 확인하는 일도 즐거운 일이지만 베컴, 지단, 호나우두 등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몸 푸는 모습을 코앞에서 지켜보는 일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일 테니 축구팬들에게는 분명 매혹적인 방문지가 될 것이다. 3유로(약 4,500원) 안팎으로 그리 비싼 가격은 아니지만 미리 시간을 확인한 뒤 방문하지 않으면 인원 초과로 입장이 거절될 수도 있으니 베컴의 금발과 지단의 섹시한 뒤통수가 그리운 여성팬들이라면 부지런해야 할 것이다.이처럼 값비싼 선수들이 함께 뛰는 경기를 본다는 건 생각만 해도 가슴 떨리는 일이다.

게다가 그것이 유럽 최고의 팀을 가리는 챔피언스리그라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환상적인 경험이 되지 않을까. 지단과 피구의 연결을 받은 라울과 호나우두의 득점, 베컴의 오른발과 카를로스의 왼발이 뿜어내는 환상적인 프리킥(free kick)의 조화는 킥오프 이전부터 잔뜩 기대감을 갖게 하는 요소다. 더군다나 자국 리그에 비해 선수들이 거머쥘 수 있는 승리수당의 액수가 훨씬 크다는 사실은 선수들의 최선을 유도하는 효과적인 장치. 경기장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레알 마드리드의 하얀색 유니폼을 입은 팬들과 맞닥뜨릴 때마다 기대감은 조금씩 부풀어 오른다.

선제골 먹어도 ‘느긋’

경기장에 들어서는 기분 역시 남다르다. 나중에 찾은 누 캄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의 웅장함 역시 아쉬움 없이 매혹적이다. 관객이 중요한 구성요소인 것은 연극이나 스포츠나 크게 다를 바 없다.객관적인 전력에서는 큰 차이를 보이는 양 팀이지만 두 팀 모두 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거머쥔 경험이 있는 내로라하는 명문팀답게 초반 탐색전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선제골은 예상 외로 마르세유의 차지. 경기장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수백 명 규모의 마르세유 응원단은 흥분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정작 홈팬들의 반응은 이상하리만치 무덤덤하다.

이유는 자기 팀에 대한 믿음. 잠시 후, 몸 풀린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은 팬들의 기대에 걸 맞는 화려한 플레이를 선보이며 연이어 상대의 골망을 흔든다. 스타들의 발을 차례로 거친 작은 공은 끊임없이 마르세유 골망을 뒤흔든다. 최종 스코어는 4-2. 완벽한 홈팀의 승리다. 이날 경기는 스타군단의 진면목을 보여준 한판이었다. 특히 지단의 활약은 출중했다. 주춤하던 초반을 풀어준 것은 카를로스와 피구, 베컴이었지만 이후 경기를 지배한 것은 지네딘 지단이었다. 그의 활약은 매우 인상적이어서 이전까지 ‘라울 마드리드’라 불리던 라울 중심의 경기 진행이 온전하게 지단의 것으로 바뀌었음을 확실하게 보여줬다. 그라운드 위에서 공을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아는 이 알제리계 프랑스인의 기량은 그야말로 절정에 달한 상태. 지구상의 그 누구도 감히 지단과 견줄 수 없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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