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LG씨름단이 전격 해체되면서 민속씨름이 붕괴위기에 놓였다. 사진은 지난 11월29일 LG씨름단 선수들이 팀해체에 대한 대책을 요구하며 씨름연맹 본부에서 단식 농성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만기, 이봉걸, 강호동, 최홍만에 이르기까지 연맹 사무실 복도에 걸려있는 역대 씨름판 스타들의 사진이 을씨년스럽다.LG투자증권 씨름단이 지난 6일 결국 해체됐다. LG씨름단을 운영해왔던 LG 투자증권 측은 팀 해체에 대해 ‘기업이미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하지만 그동안 LG가 씨름에 보인 관심을 감안하면 설득력이 부족하다. 사회적 비난은 물론 민족 전통 스포츠의 존폐라는 위기상황까지 감수하며 LG가 씨름단을 해체한 전모를 살펴봤다.

이번 사태는 지난 5월 LG투자증권의 경영권이 우리금융지주로 넘어가면서 비롯됐다. 우리금융측은 인수조건에서 LG씨름단을 배제할 것을 요구했고, 씨름단을 인수할 다른 기업 찾기에 실패한 LG는 결국 지난 6일자로 씨름단을 해체하기에 이른 것. LG그룹 역시 LG와 GS로 분리되면서 LG투자증권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지게 되자 씨름단을 외면했고 상황은 파국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씨름단 해체와 관련해 LG 측 관계자는 “경영난 악화로 인한 재정난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LG씨름단의 지난해 운영비는 23억원 정도. 연간 200억원대가 소요되는 야구단 운영비에 비하면 대기업의 씨름단 1년 운영비 20억원은 그리 큰돈은 아니다. LG씨름단 최홍만 선수가 인터뷰 도중 “프로야구 삼성의 심정수 몸값 60억원이면 씨름단 3년을 운영할 수 있다”고 울분을 토한 것도 이해가 가는 대목.

특히 LG는 IMF 경제위기 속에서도 씨름단 운영을 계속해왔을 정도로 애착을 보여 왔던 터라 ‘재정문제’를 이유로 삼기에는 변명이 충분하지 않다. LG측이 내세운 또 다른 이유는 바로 ‘기업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는 것. 최첨단 디지털 트렌드를 추구하는 LG 기업 이미지에 지루하고 촌스러운 스포츠라는 인식을 가진 씨름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테크노 골리앗’ 최홍만 같은 인기선수가 등장하면서 체육관이 꽉 차는 것은 물론 젊은이들의 관심도 높아진 것을 보면 이마저 설득력이 부족하다. 특히 씨름이라는 종목이 ‘반짝’하고 마는 유행 스포츠가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면 LG가 씨름단 해체이유로 그나마 내세운 것들은 지극히 궁색한 수준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그렇다면 LG가 씨름단을 포기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일각에서는 프로스포츠계를 휘어잡고 있는 3대 그룹간 자존심 싸움에 LG씨름단이 최대 희생양이 됐다는 해석이 무게를 얻고 있다. 최근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계열사 사장단 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 ‘1등주의’를 언급했다.

모든 부문에서 1등을 해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정글의 법칙이 존재하는 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 요지다. 이 같은 1등주의는 당장 모든 계열사에 상당한 파급효과를 불렀다. 물론 야구 농구 등 스포츠 팀을 거느리고 있는 LG스포츠단에도 그 불똥이 떨어졌다. 구 회장은 1등주의 지향을 위해 그동안 프로스포츠를 위해 쏟아 부은 돈 이상을 투자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수익성이 좋은, 또는 성공가능성이 있는 굵직한 것에만 집중투자 해 확실한 결실을 얻어내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이것은 결국 그동안의 모토였던 ‘인화주의’를 철저히 배제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LG그룹 계열사들이 LG투자증권 민속씨름 해체를 방관하는 모습은 이를 정확하게 뒷받침 해준다. 결국 대기업간 자존심 경쟁이 민족씨름을 존폐위기까지 몰고 가며, 애꿎은 선수들을 백수로 전락시킨 셈이다. 더욱 참담한 것은 그나마 남아있던 민속씨름단 2팀 중 현대중공업마저 내년 초 삼호중공업에 넘기겠다는 뜻을 밝혔다는 사실.

현재 한국씨름연맹측은 약 60여개 기업에 대해 인수 의향서를 보냈지만 신통치 않은 반응만 얻고 있는 상태다. 주무관청인 문화관광부도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못한 채 속앓이 하기는 마찬가지. 이 같은 사실에 씨름연맹 홈페이지와 각종 인터넷 게시판 등에는 대기업의 행태에 대해 비난의 글들이 쇄도하고 있다. 이번 LG씨름단 해체 사태와 관련, 프로스포츠계 한 관계자는 “씨름이 시대 흐름에 맞는 획기적 변화를 시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통을 유지해 나갈 수 있도록 정부와 기업차원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지적하며 “지금처럼 대기업들이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 경영이 계속된다면 민족전통이니 혼이니 하는 따위의 종목들은 오래지 않아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라고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다.

선수들, LG측 아닌 연맹 항의 방문 ‘이상’

“선수들 앞세워 총재 교체하려는 속셈일 수도”이번 LG씨름단 해체 사태와 관련해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혹이 있다. LG씨름단 해체 소식이 발표된 후 선수들은 왜 LG측에 항의방문을 하지 않았느냐는 것. 일반적인 상식으로 생각하자면 자신들이 몸담았던 소속 구단을 방문해 항의해야 했던 것이 당연. 하지만 최홍만을 비롯한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는 곧바로 연맹측을 방문, 연맹측의 운영능력 부재를 비난하며 총재 사퇴까지 요구하고 나섰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 ‘선수들을 이용해 총재를 교체하려는 목적’이라는 ‘설’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다. LG씨름단이 팀 인수와 관련해서 GS그룹과 어떤 교감이나 암약이 오갔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

사실 씨름 관계자들은 그동안 연맹 측에서 LG씨름단을 인수할 기업을 찾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을 앞세워 총재 사퇴를 요구하는 것은 결코 행정력 부재에 따른 책임성 문책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씨름계 한 관계자는 “이번 사태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새 인물을 천거하기 위한 수순에 불과하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며 “선수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그 뒷면에서는 치밀한 머리싸움을 하고 있을지 누가 아나. 사태가 악화되다가 만약 총재가 사퇴하고 새 인물로 교체되기라도 한다면 그동안 LG씨름단에 자금을 대왔던 GS그룹에서 씨름단을 못이기는 척 인수해 갈지도 모를 일”이라고 조심스럽게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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