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우남 이승만 건국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 논란이 재현되고 있다. 3월 26일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135회 탄신일이다. 서울 정동교회에서 탄신기념 학술 발표회만 열린다. 다른 행사는 없다. 이 전 대통령의 탄신일을 맞아 역사적 재평가를 통해 올바른 국가관과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높아지고 있다. 현재 박정희, DJ, 盧 전 대통령에 대한 기념관이 준비되고 있다. 하지만 건국 대통령인 이 전 대통령의 업적을 기린 기념관 건립에 대해선 무관심하다. [일요서울]은 지난 3월 16일, 서울 종로구에 있는 이화동 이화장을 방문해 이 전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 박사와의 특별인터뷰를 가졌다.

-왜 정체성의 위기라고 하는가.
▲ 대한민국 건국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바른 국가관과 정체성확립의 중요성이 결여되고 있다.

- 독립정신 실천방안은.
▲ 첫째, 우리는 세계에 대해 개방해야 한다. 둘째, 새로운 문물을 자신과 집안과 나라를 보전하는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셋째, 외교를 잘해야 한다. 넷째, 나라의 주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다섯째, 도덕적 의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여섯째, 자유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 이승만 대통령의 독립정신의 핵심은.
▲ 민주적 공화주의, 점진적 개혁주의, 개방적 국제주의, 개인적 자유주의, 자율(自律)과 자치(自治)주의다.

-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과정에서 미국의 친소주의자가 방해했는데.
▲ 알제 히스(Alger Hiss)라는 국무성 고위관리가 있었다. 히스는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하는 일에 사사건건 방해했다. 뿐만 아니라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성 서류접수도 깔아뭉겠다. 무엇보다 38선으로 한반도를 두쪽으로 만들었다. 1948년 쏘련 공산당 스탈린 첩자로 체포되어 옥중생활을 하다가 1996년 사망했다. 그는 장개석 정부를 망치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승만 박사는 이같은 사실을 뒤늦게 알고 윌슨 대통령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탄원했으나 미 국무성의 완강한 방해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 세계 3대 반공주의자는.
▲ 첫째, 이승만 둘째, 장개석, 셋째, 처칠이다.

-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이승만대통령의 업적은?
▲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12년간 집권하면서 해방 전후에 미리 준비했던 건국 구상에 의거해 정치, 외교, 군사, 경제, 교육, 사회, 문화·종교 등 여러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달성했다. 양반제도의 근절 및 남녀평등을 구현했다. 1950년 6월 1일 전 국민을 대상으로 6년 의무교육을 시행해 1959년까지 전국 학령아동의 취학률을 95.3%로 높였다. 1952년에는 제1차 개헌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했으며 1954년 제2차 개헌을 통해 국무총리제를 폐지했다. 성인을 대상으로 문맹퇴치 운동을 전개, 해방 당시 80%에 달하였던 문맹률을 22%(남 11%, 여 33%)로 낮추었다. 또 경제 성장의 원동력인 교육 분야에서 획기적인 발전의 기반을 구축했다.

- 오늘날 원자력 시대를 연 원자력과 관련해 벌인 사업내역은.
▲ 우리나라의 원자력 50년사를 되돌아볼 때 이승만 대통령이 선구자 역할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6년 2월 원자력 원천기술을 개발했던 유일한 국가인 미국과 원자력협정을 체결, 미국으로부터 기술원조의 물꼬를 텄다. 1956년 4월 문교부 원자력과장을 맡고 있던 윤세원·김희규·이창건 박사를 미국 아르곤국립연구소 국제원자력학교에 첫 국비 원자력 연구요원으로 파견했다. 1957년 8월 유엔(UN) 회원국이 아니었지만 이 대통령의 결단으로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가입했다. 1958년 3월 9일 문교부 기술교육국에 원자력과를 신설하고 원자력법을 제정·공표했다. 1959년에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원자력 기구인 원자력원과 최초의 원자력 연구기관인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했다. 국내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Ⅱ’를 미국에서 수입했다. 이 대통령은 서울대 물리학과 1기생들이 주축이 된 127명을 뽑아 미국 아르곤 원자력연구소에 유학 보냈다. 1960년 150여명의 원자력 장학생을 해외로 파견했다.

- 이승만 라인(평화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인접해양에 대한 주권에 관한 선언’(관보 호외)을 국무원고시 제14호로 발표했다. 한반도와 주변 도서지역의 해안으로부터 20∼200해리에 달하는 수역을 포함하는 경계선을 설정하고,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분명히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해안에서 50∼100 마일에 이르는 해상에 선을 긋고 우리 영토로 선언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 어민 1명이 숨지기도 했으며 어선 300척 이상을 나포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독도를 확실하게 한국 땅으로 재확인하게 된 것이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은 ‘이승만 라인(평화선)선언’에 관한 기록을 1월 ‘이달의 기록’으로 선정해 포털(http://contents.archives. go.kr)을 통해 제공하고 있다. 국가기록원은 ‘이승만 라인(평화선) 선언’과 관련, 대통령의 선언에 관한 외무부의 국무회의상정 안건 기록, 관보 고시 기록, 평화선에 대한 각국의 반응 등 문서기록 7건을 서비스하고 있다.

- 이화장(梨花莊)에 대해 소개해 달라.
▲ 이승만 대통령이 1947년 10월부터 1948년 8월까지, 4.19 혁명으로 하야한 직후인 1960년 4월28일부터 하와이 망명길에 오른 같은 해 5월29일까지 거주하신 사저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8월 이곳에서 대한민국 초대 정부의 내각을 구성하는 조각(組閣) 본부로 활용했다. 내무장관 윤치영, 문교장관 안호상 등 초대정부 장관 전원을 결정해 발표했다. 1919년 6월 세계 각국에 독립을 통보한 외교문서, 김구 선생과 오갔던 서신의 원본, 김규식 선생에게 내린 지령문 등 실증자료 10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이화장은 지난 1982년 12월 28일 서울기념물 제6호로 지정됐고 2009년 4월28일 문화재청 고시로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제497호로 승격됐다. 서울시는 올해 이화장의 정비 종합계획을 수립해 내부에 이 전 대통령의 유품을 전시하는 기념관을 건립하고 인근 도로를 확장하는 등 2013년까지 정비 작업을 완료할 계획이다.

-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한 과정은.
▲ 조선 3대 임금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의 16대손인 이승만 대통령께서는 양녕대군 17대손, 대학원생, 영어 능통, 미혼이라는 점을 높게 평가해 나를 양자 적격자로 뽑았다. 1961년 11월 13일 양자로 입적했으며 그해 12월 13일 하와이로 가서 이승만 대통령과 처음 상봉했다. 수시로 하와이를 오가며 부자간의 정을 나누었으며 임종도 함께 했다.

- 미국에서 추진하고 있는 이승만 박사 기념사업회 창립 현황은.
▲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기리는 기념사업회가 미국 각지에서 활발하게 만들어지고 있다. 지난해 12월 18일 덴버, 12월 14일 애틀랜타에서 이승만 박사 기념사업회가 창립됐다. 창립 추진위원은 김대기 목사 죠지아 선교대학원장, 김문철 장로 애틀랜타 배재고등학교 동문회장, 김인기 집사 Americas Best Value Inn 사장, 박점식 부회장 애틀랜타 노인회부회장, 박헌일 회장 미주한인회 서남부연합회장, 서삼정 목사 세계복음화 협의회 미주총본부 총재, 오금석 박사 콜로라도주지사 아시안 자문위원장, 이윤태 장로 크리스찬타임스 사장, 이흥렬 장로 고향집 사장, 정일화 사장 Vox Korea 사장이다. 9월 21일 필라델피아에서 황준석 큰 믿음 제일침례교회 담임 목사 주도로 이승만 박사 기념사업회가 창립됐다. 9월 18일 덴버에서 정일화 덴버 한인회장이 이승만 박사 기념사업회가 창립됐다. 덴버시는 이승만 대통령이 1908년 미 전국 애국 동지대회를 개최했던 도시이다. 하와이, 로스엔젤레스, 뉴욕, 시카고, 시애틀에 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가 이미 조직되어 있다.

- 3월 26일 발간되는 ‘풀어쓴 독립정신’ 저서를 구체적으로 소개해 달라.
▲ ‘풀어쓴 독립정신’은 이승만 대통령이 1899년 1월 9일 박영효 일파의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한성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옥중 집필한 역사서이자 한국인 최초의 외교사 저술서이다. 국가의 자유와 독립을 지키는 것이 목숨보다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 쓴 국민 계몽도서이다.

[사진 : 맹철영 기자] photo@dailypot.co.kr


#이승만대통령 어록>>

●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1945. 10. 16 귀국 후)
● 나는 항상 우리 민족의 자유를 얻고자 애써왔으며 어떻게 하면 자유롭게 여러나라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오늘까지 싸워온 것입니다. (1945. 10. 20)
● 공산분자와 협동을 이루지 못하고는 통일이 될 수 없다 하는 이가 있다면 이는 곧 집에 불붙는 자와 함께 일하라는 말과 같으니 불붙는 사람이 주의(主義)를 그치기 전에는 합동할 수 없으며 그들이 그 주의를 고집할 동안에는 평안히 살 수 없는 터이다. (1946. 3. 4)
● 민주정체의 요소는 개인의 근본적 근본적 자유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국민이나 정부는 항상 주의해서 개인의 언론과 집회 그리고 종교와 사상 등 자유를 극력 보호하는 것입니다. (1948. 8. 15)
● 한국은 자유민주국가인 만큼 언론자유는 완전 보장되어야 한다. 우리는 솔직한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언론자유는 대한민국이 수립된 기본정신의 하나인 동시에 본인이 친히 존경하는 원칙이다. (1952.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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