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태권도협회 구천서 회장이 지난 12월 5일 구속된데 이어 그간 검찰로부터 후원금 횡령 및 외환관리법위반 혐의 등으로 조사를 받아 온 김운용씨가 9일 국회의원직과 세계태권도연맹(WTF) 총재 그리고 국기원장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김운용씨를 둘러싼 태권도계의 비리와 부패는 태권도계 뿐만 아니라 태권도의 종주국임을 자부했던 국가의 대내외적 이미지에도 큰 손상을 입혔다. 사실 태권도계는 이번 김운용 씨 비리 사건이 터지기 훨씬 이전부터 김운용 독재체제로 굳어진 폐쇄적 관료조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었다. 그 예로 국기원 이사 선출방식을 보면 이사가 이사장을 뽑고, 이사장이 다시 이사를 뽑는 방식이 30년 넘게 이어져왔다. 이는 국기원이 전국과 전세계에서 승급·승단 심사비로 거둬들여지는 돈이 연간 50여억원에 달한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한눈에 비리 여부를 의심케 하는 부분이다.

이에 검찰은 국기원의 경영구조상 회계조작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김 전총재가 2001년 IOC 위원장에 출마할 당시 모금한 후원금 20여억원과 대한체육회장이던 2000년 모금한 시드니올림픽 지원금 20여억원의 출처를 캐기 위해 국기원에 유입되는 각종 입출금 내역을 수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사비리 의혹, 각종 태권도 캐릭터 사업을 둘러싼 금품비리 의혹 그리고 국가대표 선발과정에서의 비리 의혹 등에 대해서도 집중 수사를 펴고 있어 조만간 이 의혹들에 대한 실마리가 잡힐 것으로 보인다.현재까지 밝혀진 사실 가운데 놀라운 것은 태권도계의 간부급 임원들 가운데 상당수가 ‘조폭’인사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태권도 협회의 구천서 회장사건을 담당한 서울지검의 김홍일 강력부장은 구 회장을 구속시키면서 “거물급 폭력배 두목들이 태권도협회의 이권에 개입해 불법적인 수단으로 이득을 챙긴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협회 고문인 이승완씨의 경우, 1987년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으로 유명한 ‘용팔이 사건’을 비롯, 이밖에도 각종 폭력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 적이 있고, 현재 미국으로 도피한 협회 전무 박종석씨는 1970년대 서울 종로에서 ‘번개파’를 조직한 뒤 ‘호남파’와 연합해 1975년 사보이호텔 사건을 일으켜 명동의 ‘신상사파’를 제압한 거물급 두목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번개파에는 1980년대 후반 ‘범서방파’를 조직한 김태촌이 몸담고 있었으며, 호남파에서는 ‘양은이파’를 결성한 조양은이 활동했던 조직이다.

상임 부회장 한용석씨는 이 고문과 함께 1977년 발생한 속리산 카지노 사건으로 처벌 받은 적이 있다. 이들은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협회의 각종 고위직을 차지해 활동해 오다 2001년 일부 태권도인들이 “폭력배들은 태권도계를 떠나라”고 강력히 시위를 벌여 문제가 되자 같은 해 11월 당시 회장인 김운용씨가 임시 이사회를 열어 문제의 폭력배 인사 1명을 해임하려 했으나 이들의 방해로 결국 무산되었다.그간 태권도는 한국을 전세계에 알리고 우리문화를 전파한 중요 수단이었다. 또 88년 서울올림픽에서 시범종목으로 채택된 이후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는 쾌거를 올렸고, 올림픽 등 각종 세계대회에서 금메달을 휩쓰는 효자종목으로 국위선양에 지대한 이바지를 해왔다. 세계인들은 코리아를 알기 전에 태권도를 먼저 알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태권도의 파워와 현란한 기교 그리고 태권도의 정신 등에 매료된 세계인은 태권도에 경외감마저 느꼈다.

때문에 세계 어디서나 한국이 태권도 종주국이라는 이유로 한국인을 높이 샀다. 이는 한국인이 해외로 나가 자리잡는데도 큰 도움을 주었음은 물론이다. 이 모든 것들을 이룩하기까지 80년대와 90년대 당시 한국체육계를 위해 활약했던 김운용씨의 공로는 지대한 것이었다.그러나 김씨가 국내 태권도계에 싹틔운 비리와 부패는 그가 이룩한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IOC가 내년 2월 올림픽 종목의 입·퇴출을 놓고 전면적인 평가를 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져 올림픽 정식종목 유지 여부도 불투명한 상태다. 이 기회에 일본은 가라데를, 중국은 우슈를 정식종목으로 채택하게 하기 위해 ‘태권도 퇴출’을 적극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운용 독단체제가 낳은 폐쇄성은 국내 태권도계뿐 아니라 태권도의 국제화에도 커다란 걸림돌이 되어오고 있다. 한국 태권도계에 대한 비판은 시드니 올림픽에서부터 외국 태권도 관계자들 사이에서 가시화되었다.

불만의 출발은 한국 선수들의 태권도인 답지 못한 플레이에서 비롯되었다. 시드니 올림픽 당시 태권도 경기가 벌어졌던 경기장은 여느 인기종목 못지 않게 많은 관람객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태권도 특유의 화끈하고 경쾌한 플레이를 즐기려는 관람객들은 종주국인 한국 선수들의 플레이에 거는 기대감이 상당히 뜨거웠다. 그러나 한국 선수들의 플레이는 여기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스포츠경기이기 이전에 무도대련성격을 지닌 태권도 시합에서 한국 선수들은 상대의 공격에 거의 응수하지 않고 피하기만 하다가 상대의 점수 포인트 부분만을 발로 살짝 건드리고 빠지며 점수 올리기에 급급한 치졸한 모습을 보이기 일쑤였다. 이에 대해 남아공의 태권도인인 엔드류 톰슨은 “아무리 전략상 그렇다고 해도 한국선수들의 경기는 종주국으로서 세계무대에 진정한 태권도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혹평했다. 이런 식의 비판은 국내에서도 있었지만 금메달의 그늘에 가려지는 바람에 자성의 여지를 없애 버렸다.

지난 9월에는 독일에서 제16회 세계 태권도 선수권대회가 열렸었다. 여기서 한국은 다시 한번 전세계 태권도인들의 ‘태권도 종주국’에 대한 지지와 신망을 저버렸다. 그 징후는 대회장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한국이 승리할 때마다 관중석에서는 박수보다 시끄러운 야유와 각종 쓰레기 등을 경기장으로 날렸던 것. 이런 속에서 급기야 이란이 심판의 판정에 항의하며 소동을 벌이는 사태까지 벌어졌고, 주동자인 팀닥터와 코치가 ID카드를 뺏긴 채 경기장에서 쫓겨나면서 소동이 마무리되는 해프닝을 연출했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남자팀이 16연속 종합우승을 차지했고, 여자팀이 1995년 개최 이래 지금까지 9연패를 달성했다. 하지만 세계인들의 따가운 시선으로 말미암아 그다지 달갑지 않은 우승이었다.

한국 대표팀을 지낸 J모씨는 이에 대해 “전부 한국인으로 구성된 세계태권도연맹 수뇌부에서 심판들을 조종해 한국에 유리한 판결을 이끌어낸 적이 많았다. 한국이 각종 세계 태권도 대회에서 장난친 것은 이제 세계가 다 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 드러난 김운용씨의 태권도계 총채적 부패는 체육계에서 태권도의 흥망을 논할 만큼 중요한 사건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간 김씨는 WTF에서 독자적 영향력을 행사해왔기 때문에 체육계에서는 이번 김씨의 불명예 퇴진은 WTF의 국제적 영향력을 상당히 위축시킬 것으로 보고 있다. 또 김 씨는 자신에 대한 견제를 없애기 위해 그 동안 국내 태권도계에 2인자를 양성하지 않았다. 이렇게 철저한 독재체제를 구축해온 덕에 향후 WTF를 이끌 지도력을 가진 지도자 또한 현재로선 모호한 상태다. 따라서 체육계 인사들은 앞으로 태권도계의 혼란이 더욱 가중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