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 출범 이후 장안의 내로라하는 고급식당에 정치인들의 발걸음이 ‘뚝’ 끊겼다는 말이 돈다. 정치자금도 넉넉지 않은 데다, 주변의 시선도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이다. ‘OO’에서 식사를 했다는 소문이 돌기라도 하면, 국회 내에서부터 주위의 눈빛이 달라진다. 장비까지 갖춰 정치인들의 대화를 도청했던, 이른바 ‘요정 정치’도 옛말이 된 것이다. 그래도 거를 수 없는 게 있다면 ‘밥’이다. 저가이든 중저가이든, 어디서든 허기를 채워야 ‘국민을 대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민의 배를 확실히 채워주겠다”며, 차기 대권을 노리는 정치인들은 어디서 허기를 채울까. ‘요정 정치’는 옛말이라도 고향 따라 식성 따라 애용하는 단골집은 따로 있다.2004년 9월 문을 연 국회 앞 아크로폴리스빌딩에 위치한 ‘들뫼바다’는 정치인들의 모임 장소로 급부상한 곳이다. ‘유기농 레스토랑’이기 때문이다. 들뫼바다는 ‘국내 최초 유기농 전문식당’이라는 슬로건을 전면에 내세운다. 유기농 쌈 버섯 샤브샤브 등. 샤브샤브가 대표음식이지만 낙지볶음 제육초 등의 특별메뉴도 선보인다.

건강 따져 ‘유기농 음식’선호

이곳 메뉴판에는 “들뫼바다의 순이익금 50%는 백혈병, 소아암 어린이 돕기에 쓰여집니다”라는 문구가 선명하다. 장난삼아 “정말로 쓰여지느냐”고 묻자, 이홍재 사장은 영수증까지 보여준다. 한편, 들뫼바다의 이 사장은 조계종 부총장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해 종교와 관련 있는 정치인들이 자주 찾는다는 소문도 무성하다. 지난 3일 점시시간, 다수의 국회의원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김애실 박재완 진수희 한나라당 의원과 윤원호 홍미영 이경숙 열린우리당 의원 등이 그들이다. 홀에서 식사를 할 수도 있지만 방이 마련돼 있어 기자간담회를 겸한 자리로도 활용된다.

요즘 들어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김근태 열린우리당 고문을 비롯해 김원기 국회의장, 남궁석 사무총장, 강재섭 한나라당 의원 등도 자주 찾는다. 박근혜 대표를 비롯해 여성의원들이 자주 찾는 곳은 깔끔한 한정식집이 대부분이다. 레스토랑 분위기를 낼 수 있는 곳이면 더욱 좋다. 여의도 주변, 대표적인 곳은 CCMM빌딩 지하 ‘운산(雲山)’이다. 80년에 문을 열어 정치인들이 많이 찾는 개성 한정식집‘용수산’ 직영점이기도 한 운산은 2003년 문을 열었다. 오랫동안 내로라하는 정치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탓인지 운산은 단골 유명인사의 ‘공개’도 꺼린다.

출신학교 인근도 ‘북적’

김근태 고문의 단골집도 역시 한정식집이다.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건너편 ‘남원집’은 쫄깃한 낙지와 밥을 버무린 매콤한 낙지돌솥밥이 유명하다. 특히 이곳 사장의 구수한 입담은 낙지돌솥밥 못지않게 담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재동엔 김 고문의 단골집이 또 있다. 퓨전 한정식집 ‘달개비’다. 대표음식은 막걸리와 대나무밥. 김 고문이 자주 찾는 이유는 음식맛과 식당 분위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손맛이 느껴지면서도, 양이 많은 다른 한정식집과 달리 순서대로 조금씩 담겨 나오는 일종의 퓨전 한식. 식당 내부도 레스토랑처럼 정갈하다.

김 고문이 졸업한 경기고등학교의 옛터가 이 식당과 가까운 이유도 있다. 달개비 앞 골목길이 바로 김 고문이 고교 시절 거닐던 그 길이다. 여의도 대산빌딩에 전당대회를 준비하기 위한 선거캠프를 마련한 김 고문이 참모들과 함께 요즘 들어 자주 찾는 곳은 렉싱턴 호텔 앞 ‘어선가’와 여의도역에서 가까운 ‘삼보청국장’이다.한편, 달개비는 정동영 고문의 단골집이기도 하다. 맛의 고장 ‘전주’가 고향임에도 특별히 음식을 가리지 않는다는 정 고문의 단골집은 교육부총리에 내정된 김우식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단골집이기도 하다. 한편, 정고문은 요즘 들어 선거캠프와 가까운 여의도 민주노동당 앞 ‘봄샘’도 즐겨 찾는다.

‘포항’ 냄새 물씬 나는 ‘어부가’

경북 포항이 고향인 이명박 서울시장이 자주 찾는 곳은 바다냄새가 물씬 풍기는 일식전문점 ‘어부가(漁夫家)’. 광화문의 금호아트홀을 지나 맛집이 즐비한 세종로거리에 위치한 이곳의 대표음식은 회와 고래고기 수육이다. 이 시장이 자주 찾는 데는 사장이 동향이라는 이유도 있다고 한 측근은 전했다. 지난 연말 서울시장에 도전장을 낸 한나라당 모 의원은 이곳에서 기자간담회를 겸한 자리를 마련했다. 2002년 지방선거 당시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캠프에서 ‘이명박 당선’을 도운 모 의원은 이 시장과의 인연에서부터 시작해 예비 후보로서 서울시의 청사진을 제시하며 열변을 토했다. 자리가 무르익자 한 기자가 물었다.

“이 시장의 단골집이라 일부러 ‘어부가’를 선택한 게 아닙니까?” 모 의원은 너털웃음과 함께 “나의 단골집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서울시청과 가까운 프레스센터 19층도 이 시장이 자주 찾는 곳 중의 하나다. 손학규 경기도지사의 단골집은 경기도청이 자리한 수원에 있다. 수원역 앞 허름한 순대국집과 수원월드컵경기장 인근의 ‘고향맛청국장’. 한편, ‘사람 잘 챙기기’로 유명한 손 지사는 98년부터 정치적 고락을 함께 한 140여명의 참모 및 인사들과 매년 신년모임을 가져왔다. 이들이 모이는 곳은 안국동에 위치한 ‘호반’. 대표음식은 역시 순대국이다.

단골이 아니면 찾기도 힘들다

고건 전국무총리의 단골집은 소박한 출입문으로 알려진 설렁탕집 ‘우미옥’. 총리직에서 물러난 직후 기자가 여전도회관 사무실을 찾았을 때는 점심시간이 지날 무렵이었다. “식사는 하셨느냐”고 물었다. 고 전총리는 “사무실 근처에 자주 가는 설렁탕집이 있다”면서 “오늘도 지인들과 함께 그곳을 찾았다”고 말했다. 종로 이화동 사거리에서 길 오른편을 따라 동대문 방향으로 어찌어찌 걷다보면 나온다는 그곳. 골목 구석에 있어 단골이 아니라면 찾기도 힘들다고. 고 전총리가 91년부터 찾는다는 그곳의 대표음식은 설렁탕과 수육이다.


# 정권의 진퇴와 함께 한 ‘대통령의 단골집’

노무현 대통령의 단골집은 서울 효자동에 자리한 ‘토속촌’이다. 각종 견과류와 30여 가지의 약재를 넣고 끓인 삼계탕이 대표음식. 참여정부 들어 노 대통령이 직접 방문한 적은 한번이지만, 직원을 통해 ‘포장’한 삼계탕을 공수할 정도로 토속촌에 대한 대통령의 애정이 남다른 것으로 알려진다. 한 때 노 대통령이 참모들에게 토속촌 분점을 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서울 마포 공덕5거리 인근에 있는 노 대통령의 단골 보신탕집 ‘대교’도 유명하다.

96년 김원기 국회의장, 유인태 열린우리당 의원 등 참여정부의 핵심 인사들이 모여 ‘통추’(국민통합추진회의)를 결성했던 곳으로도 알려진 곳. 정객들은 대교가 참여정부의 산실이라고 말한다. 대교는 정치적 굴곡을 겪으며 여야로 엇갈리기도 했던, 물론 현재도 진행중인 통추와 애환을 함께 했다. 지금도 통추 멤버들의 아지트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노 대통령 당선 후의 일화는 더욱 유명하다. 통추는 축하연을 대교에서 하려고 했다. 내부에선 “그래도 대통령 당선자인데, 개고기집은 좀 그렇지 않느냐”는 반론도 나왔다. 결국 당선 축하연은 여의도 중식당에서 치렀다.

국민의 정부 시절에는 서울시교육청 인근의 한정식집 ‘수정’과 신문로 ‘미당’이 유명했다. 물론 당시부터 정치를 했던 현역 의원들에겐 요즘도 단골집이다. 당시 두 집은 ‘국민의 정부 구내식당’으로 불리기도 했다.특히 수정은 정권의 퇴진과 함께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김대중 전대통령 퇴임 후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 대한 검찰수사로 인해 사장이 검찰에 불려간 것이다. 이 때문에 한 때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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