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 다니다 끝나는 태권도?

김정길 태권도협회장은 8일 올림픽 성과 보고 및 경기 대중화 방안에 관한 기자 간담회에서 “올림픽을 치르며 태권도가 너무 재미없다는 비판을 많이 들었다”며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K1보다 더 박진감 있고 재미있는 경기로 만들기 위해 경기 규칙을 바꾸겠다”고 밝혔다. 이는 팬들로부터 외면 받는 스포츠는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다는 위기의식 때문. 사실 2004 아테네올림픽에서 보여준 태권도의 모습은 실망 그 자체였다. 실제 선수들은 경기의 절반 이상을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며 탐색전을 벌였다. 게다가 선취점이라도 따면 점수를 지키려고 방어만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올림픽에서 금메달과 동메달 각각 2개씩을 안겨주며 효자종목 노릇을 톡톡히 했지만, 경기내용은 기대에 못 미쳤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게 협회 측 설명이다. 현행 태권도의 경기 득점방식이 단조롭기 때문. 몸통 부위 가격은 1점, 얼굴 · 목 부위는 2점을 주는 득점방식 때문에 태권도 특유의 박진감을 연출하기 쉽지 않다는 것.태권도협회의 한 관계자는 “득점방식이 다소 단조로워 팬들이 경기를 지루해하는 것 같다”면서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들이 오로지 메달을 따기 위해 경기를 치르다보니 진정한 승부보다는 점수 따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주요 득점 포인트만 살짝 가격해 점수를 올리면 우승하는 방식이 가장 문제”라고 말했다.

개혁의지, 일단은 합격점

태권도협회는 이를 위해 주먹 기술에 대한 포인트 적용 폭을 넓힌다는 방침이다. 안면 가격 외에도 고난도 기술을 적중시켰을 경우 점수에 가중치를 주는 방안도 검토하기로 했다. 이는 태권도 특유의 화려한 기술을 되살리기 위한 방안 중 하나다. 또 타이틀이 걸린 국제대회나 선발전 외에 국내에서 열리는 일부 경기를 세미프로 대회 형태로 열어 새로운 규칙을 적용하는 안도 고려하고 있다. 협회는 또 앞으로 대표 팀을 상시 훈련 체제로 바꾸고 전임코치제를 도입하는 등 대표 선수 선발·관리 방식을 대폭 개선할 방침이다. 이 같은 태권도 협회의 개혁의지는 일단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내며 좋은 점수를 받는 데 성공했다.관련 협회와 체육계는 물론 일반 팬들까지도 합격점을 준 상태.

아이디가 jeff04인 한 네티즌은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간만에 들려온 좋은 소식”이라면서 “이제 화끈한 기합소리와 함께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볼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된다”고 말했다. 다른 네티즌들도 반응은 마찬가지. 대부분 태권도협회의 이번 개혁의지에 찬성하며 응원을 보낸다는 내용의 글들이 게시판을 메웠다. 스포츠 학계와 관계자들도 고개를 끄덕이는 분위기다. 태권도 관련단체의 한 단체장은 “이미 오래전에 ‘공사’가 이뤄졌어야 했다”면서 “현행 점수 산정방식은 개정돼야 한다는 비판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발만 사용하니 단조롭고 지루한 것은 당연하다. 태권도협회가 발표한 계획들이 아직 구체화 되진 않았지만 긍정적인 효과가 기대된다. 세부사항을 조율해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태권도가 올림픽에서 정식종목으로 살아남기 위해선 쿼터제 폐지가 필요하다”는 조언도 덧붙였다. 그는 “올림픽 정식종목 중 쿼터제가 있는 종목은 단 1개. 바로 태권도뿐이다. 8개 체급 중 한국이 참가하지 않은 나머지 4개 체급은 출전권을 따지 못해 출전하지 못하는 것이다. 특정국가의 독주를 막기 위해 참가 종목을 4개 체급으로 제한한 종목은 태권도뿐이라는 얘기다. 결국 아직까지 태권도가 올림픽에서 정식종목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난관을 넘어야 하는가를 알 수 있다. 협회의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의견을 피력했다.

종주국 위상 세울 수 있을까?

문제는 실현 가능성이다. 그동안 태권도 경기운영 방식에 대한 문제점이 수차례 지적돼왔고, 또 그에 따른 자구책도 마련된 바 있지만 실제 개정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이번에 발표된 규칙개정 역시 말 그대로 ‘계획’일 뿐, 구체적으로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게다가 태권도 규칙을 개정하기 위해선 세계태권도연맹(WTF)의 동의가 필요한 상황. 세계 176개 회원국 태권도협회장들의 총회를 통해야만 규칙 개정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 태권도협회 한 관계자는 “제도적 현실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면서 “우리나라가 태권도 종주국이긴 하지만 WTF의 동의가 있어야만 규칙개정이 가능하다. 규칙개정에 대한 협회의 의지는 확고하고 또 단호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욕심만 갖고 모든 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조정원 세계태권도연맹(WTF) 총재나 국기원측과 태권도 룰을 바꾸자는 기본적인 합의에 도달한 것으로 알고 있다. 구체적인 세부사항은 물론 현실적 문제를 신중하게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한편 대한체육회 한 관계자는 “이번 개혁을 통해 종주국의 위상을 되살려야 한다”면서 “김운용 비리사건과 태권도 올림픽 퇴출설 등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태권도가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통해 확실히 변모해야 할 것이다. 아테네올림픽에서 문대성 선수가 보여준 화끈한 뒤돌려차기는 한국 태권도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대로 보여준 경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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