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축구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다.축구는 국력을 보여주는 바로미터가 되고 있다.따라서 모든 국가는 축구에 사활을 걸고 있다.2006 독일월드컵은 국가간의 한판 전쟁을 예고하고 있다.승패가 곧 국력으로 평가받기 때문이다.실제로 그간 축구로 인해 국가간의 전쟁으로까지 번질 조짐을 보였던 사례도 적지 않다. 본지는 코앞으로 다가온 2006 독일월드컵의 또다른 ‘신화창조’를 기원하면서 특별기획코너를 마련한다.축구의 발자취를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더듬은 세계적 축구전문 칼럼니스트 사이먼 쿠퍼가 쓴 <축구 전쟁의 역사 | 원제 Football against the Enemy (이지북 출판사)>를 발췌, 연재한다.

<편집자주> 난1990년 9월 베를린으로 갔다. 장벽이 무너진 지도 10개월이 지난 때였다. 당시 그 도시에는 두 개의 큰 축구 클럽이 있었는데 ‘FC 베를린’(FC Berlin)은 동베를린을, ‘헤르타 BSC’(Hertha BSC)는 서베를린을 연고지로 하고 있었다. 헬무트 클롭플라이슈(Helmut Klopfleisch)는 이미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이주한 상태였다.

‘디나모’팀 “열한마리 돼지들”

FC 베를린은 과거 디나모 베를린(Dynamo Berlin)이라고 불렸다. 장벽이 무너지기 전 그러니까 구동독 시절 이 팀은 얀 스타디움(Jahn Stadium)에서 경기를 했었다. 내가 처음 머물렀던 아파트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는 곳이었다. 경기장이 있는 프렌츠라우어베르크(Prenzlauer Berg) 지구는 연합국의 베를린 폭격을 견뎌낸 몇 안 되는 곳이었다. 건물은 오래되어 낡고 덜컹거렸다. 수리공의 유지보수 작업은 1920년대 이후로는 없었다고 한다. 1945년 5월 소련의 붉은군대는 시가지를 장악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만 했다.

대량 실업과 신나치의 낙서 그리고 루마니아인 거지들이 있었지만 동베를린은 여전히 공산주의의 수도였다. 그 도시는 언제나 11월처럼 카키색과 옅은 갈색 그리고 끝없는 회색의 음영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 중앙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동상이 있는데 마르크스는 앉아 있고, 엥겔스는 서 있다. 아마도 레닌은 누워 있어야 할 것이다. ‘디나모’팀은 ‘열한 마리 돼지들(Eleven Schweine)’로 불렸다. 그들은 유럽에서 가장 인기 없는 클럽이었다. 그러나 또한 가장 성공한 클럽으로 1979년부터 1988년까지 무려 열 번이나 전동독선수권을 연속 거머쥐었던 것이다. 수도에서 전동독선수권전을 계속한다는 확고한 목표에 따라 대전이 끝나고 디나모가 설립되었다.

1989년 혁명 당시까지 클럽 총수는 공포스런 구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의 우두머리인 ‘에리히 밀케’(Erich Mielke)였다. 디나모는 95분경 얻은 페널티킥으로 잡은 게임이 수두룩하다. 동베를린에는 디나모가 그렇게 되기를 열망했던 노동자 클럽 유니언 베를린(Union Berlin)팀도 있었다. 이 클럽의 용감한 팬들은 ‘철의 유니언’이라는 슬로건 사이사이에 “도이칠란트, 도이칠란트”라는 말을 집어넣곤 했다. 그리고 유니언이 디나모와 격돌하면 경기장은 인파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모두가 유니언을 응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승리는 언제나 디나모 차지였다.

헤르타는 장벽의 피해자

서베를린에는 헤르타가 있었다. 1930년과 31년 전독일챔피언이었던 이 팀을 독일인들은 진정한 명문 클럽으로 인정했다. 그들은 한때 베를린 전체를 대표하는 팀이기도 했다. 그러나 1961년 8월 13일 밤 갑작스럽게 장벽이 쳐지자 헤르타 선수와 팬의 절반은 자신들이 동베를린에 묶였음을 알았다. 클럽은 형편없는 선수들을 데려오기 시작했고 뇌물수수 추문에 휘말렸으며 유망한 10대 공격수 피에르 리트바르스키(Pierre Littbarski)를 놓쳐버렸다. 심지어 80년대 중반에는 베를린 아마추어 리그로 강등되는 수모를 당했다. 장벽이 무너졌을 때 그들은 독일 2부리그에서 뛰고 있었고 1950년대 헤르타 셔츠를 입고 마침내 경기장을 찾았던 동베를린 축구팬들은 눈물 바람으로 올림픽 스타디움(Olympic Stadium)에 자리를 잡았다.

아마도 헤르타의 가장 열렬한 팬은 헬무트 ‘클롭플라이슈’일 것이다. 그는 1948년 동베를린에서 태어나 1989년까지 그곳에서 살았고 부적당한 팀을 응원했다는 이유로 동독에서 추방되었다. 추방되기 전 그는 장벽이 올라가고 처음 몇 달 동안 동베를린의 헤르타 팬들과 함께 장벽 주위를 어슬렁거리면서 토요일 오후를 보냈다. 동베를린에는 불법이지만 헤르타 팬클럽이 있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가졌죠. 매번 다른 장소에서요. 가끔은 빙고 클럽이라고 속이고 카페의 뒷방을 빌리기도 했습니다. 헤르타의 감독이 모임을 찾는 경우도 있었고 가끔은 선수들이나 코치들이 넘어오기도 했죠. 과거 이삼십 년 동안 일했던 헤르타 감독들을 모두 만난 것 같아요. 그들은 클럽의 일을 얘기해줬죠. 평범한 소식들은 서방의 라디오와 TV를 통해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내부적 문제나 진짜 가십 따위를 알고 싶어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소식을 갈망했죠.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달나라 사람처럼 소외되었을 겁니다. 감독들은 우리를 한 무리의 광신자들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상황이 비관적이라고 항상 우리에게 얘기했습니다. 우리는 모임의 비밀을 지켜달라고 그들에게 요구했죠. 그런데도 그들은 경기 일정을 알리는 프로그램에 동베를린의 열성 축구팬을 소개하는 글을 실었어요. 평지풍파를 일으킨 겁니다. 슈타지가 감시를 강화한 것은 당연했죠. 그들은 국경을 통과하려는 감독들을 제지했습니다. 위르겐 쥔데만을 알몸수색한 적도 있었죠. 모임 때마다 우리는 감독이 국경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지를 긴장 속에서 기다렸죠. 아슬아슬한 모험이었습니다.”

체코군대 호텔입구 봉쇄

1981년 바이에른 뮌헨팀이 체코슬로바키아를 방문했다. 슈타지는 뭔가 조치를 취해야 했다. “적의를 품은 부정적 세력, 그러니까 범죄적으로 위험한 인물들·파괴적 젊은이들을 막기 위해.” 그러나 그들은 실패했다. 클롭플라이슈의 파일을 보자. “1981년 3월 18일 많은 축구팬과 더 많은 수의 시민이 바이에른 팀이 묵고 있는 호텔 앞에 운집했다. 질서와 안전을 회복하기 위해 체코 군대는 호텔 입구를 봉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장면이 호텔방 창문을 통해 한 남자에 의해 영화 필름 카메라로 찍혔다.” 그가 바로 클롭플라이슈였다.

곧 클롭플라이슈와 슈타지는 직접 만나기 시작했다. 서방 팀이 동독에서 시합을 가지면 그는 감금되기도 했다. “서독 수상 슈미트(Schmidt)가 1981년 동베를린을 방문했을 때도 나를 잡아 가두더군요. 내가 공항에 가서 서독 국기를 흔들거나 뭐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리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서방 팀과의 경기 입장권은 구하기가 아주 힘들었죠. 경기장 입장권은 당원들에게나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경기장 전체가 서방 팀을 응원하는 소리로 가득 찼을 테니까요. 함부르크 SV(Hamburg SV)와의 경기가 있었던 날은 경기 시작 한 시간 전에야 겨우 당원들에게 입장권이 건네졌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경기장에 들어갔죠. 공산당원(정식 명칭은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임)들은 대개 축구를 싫어했고 그래서 좌석표를 우리에게 팔았거든요.”

그는 1985년 다시 체포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와 서독의 대전에서 그는 베를린의 상징동물인 베를린 곰 인형을 서독팀 감독 프란츠 베켄바워에게 선물했고 슈타지가 이를 포착했다. 동독인과 접촉하는 서독 사람은 누구나 다 밀정을 붙이는 게 슈타지의 원칙이었다. 클롭플라이슈는 그 다음해에 또 체포되었다. 멕시코 월드컵이 열리기 바로 전이었다. 서독 국가 대표팀에 행운을 빈다는 전보를 친 게 체포 이유였다. 동독은 이 이단자들을 서독으로 보내버렸다.

1986년 클롭플라이슈 가족은 이민비자를 신청했고 3년 만에 그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졌다. 슈타지는 주의 깊게 시기를 선택했다. 클롭플라이슈의 어머니가 임종 직전이었던 것이다. “며칠만 더 머물게 해달라고 슈타지 요원에게 간청했죠. 어머니가 몇 시간밖에 더 사시지 못할 거라고 의사가 말했거든요. ‘몇 시간? 알아. 하지만 오늘 떠나지 않으면 영원히 떠날 수 없을 걸.’ 그들의 대답이었습니다. 그래서 난 떠나야 했고 5일 후 어머닌 돌아가셨죠. 장례식 참석도 불허하더군요.”

비밀경찰 슈타지 ‘횡포’

클롭플라이슈 가족은 서독의 한 난민 캠프에서 첫해를 보냈다. 그가 동독을 떠난지 몇 달 후인 1989년 11월 9일 장벽은 무너졌다. 마침내 그는 홈에서 헤르타와 바텐샤이트(Wattenscheid)의 경기를 볼 수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5만 9,000명이나왔더군요! 2부리근데 말이죠! 동베를린 시민 대부분이 경기장을 찾은 것 같았습니다. 그 월요일 우린 헤르타가 디나모 베를린과 유니언 베를린의 코치들을 시합에 초청했다는 사실을 신문을 보고 알았습니다. 바텐샤이트와의 경기에서 난 자원봉사자로 일했습니다. 그 다음 시합 입장객은 겨우 1만 6,000명뿐이었던 것은 이런 실망감 때문일 겁니다. 난 자원봉사를 그만뒀어요. 여전히 경기장에 가서 시합을 보긴 합니다. 헤르타야말로 베를린 유일의 클럽이죠. 시합을 보지 않는 사람도 경기 결과에는 늘 관심을 갖습니다. 블라우 바이스(Blau Weiss)가 더 잘 하긴 하죠. 하지만 그 팀이 헤르타가 될 수는 없죠.” 그도 인정하듯이 결론은 우울했다.

“올해로 난 43살입니다. 동독에서 41년을 살았죠. 그땐 어떻게든 살았고 가끔 재미도 있었지만 지금 보면 인생을 낭비한 것 같아요. 그래요, 당신도 알다시피 서독이 무적의 팀이었다는 사실은 정말 큰 위안이자 격려였습니다. 그들은 항상 동구권 팀을 격파했고 그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했죠.”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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