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비자금 사건의 핵심 인물로 지목된 김영완씨가 거액을 밀반출한 사실이 적발된 가운데, 김씨와 현대가(家) 그리고 대북송금의 삼각 미스터리가 풀릴 수 있을 것인지 주목되고 있다. 검찰에 따르면 김씨는 2004년 159만 달러를 홍콩 HSBC 은행에 개설된 계좌로 송금했다. 대북송금 특검에서 제기됐던 의혹, 즉 현대와 북한, 또는 현대와 당시 권력핵심 실세 사이의 비밀스런 돈거래에 김씨가 깊숙이 개입돼 있다면 이번 밀반출은 사건의 실마리를 푸는 열쇠인 셈이다. 이와 관련 2003년 7~8월 검찰의 현대 비자금 수사가 본격화되는 시점에 갑작스럽게 사망한 고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에 접근할 수 있는 단서도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판도라 상자’의 열쇠를 쥐고 있는 김씨, 그리고 미심쩍은 거액의 해외 송금 출처를 추적해봤다. 지난달 26일 김영완씨가 해외로 거액을 송금한 행적이 홍콩 금융정보분석원(JFIU)에 포착돼 국내 금융정보분석원을 통해 검찰에 통보됐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김씨는 홍콩 HSBC 은행에 개설된 ‘미국 이민투자기회 및 투자프로그램 제공회사(PIDC)’의 한 계좌에 2004년 10월1일과 12월1일, 12월8일 등 세 차례에 걸쳐 53만달러씩 총 159만달러를 자신과 부인 장모씨 명의로 송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중 2004년 10월1일 송금된 53만 달러는 그 해 12월 김씨의 부인 장씨가 직접 찾아갔다.

이익치vs박지원 엇갈린 진술

김씨는 현대그룹의 비자금 200억원을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에게 제공하고 150억원을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전달하는 과정에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검찰이 지목한 인물이다.그러나 그는 대북송금 특검과 현대 비자금 수사가 시작되기 직전인 2003년 3월20일 미국으로 출국했다. 검찰은 당시 김씨가 없는 상태에서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과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 등의 진술을 토대로 권 전고문과 박 전실장을 각각 현대 비자금 200억원과 150억원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이와 관련, 박 전실장 사건은 대법원에서 무죄 취지로 고법에 파기환송된 상태다. 한편 사건이 진척되자 해외에 머물던 김씨는 변호사 등을 통해 자신이 두 사람의 비자금을 관리해왔다는 내용의 진술서를 검찰에 제출한 바 있다.

당시 검찰은 김씨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받기 위해 제3국에서 영사를 통한 증인 신문을 하자고 했고, 결국 일본에서 일본 주재 영사 2명이 질문하고 김씨가 답변하는 식으로 진술 청취서를 얻어냈다.김씨는 당시 권 전고문이 수수한 200억원 중 50억원은 17대 총선을 위해 채권 형태로 보관하고 있으며, 박 전실장이 현대로부터 받은 150억원의 CD를 현찰로 교환한 뒤 보관하고 있다는 등의 내용을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토대로 검찰은 권 전고문과 박 전실장이 각각 김씨에게 맡겨놓은 자금 중 150억원과 30억여원을 빼내 사용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나머지 잔액은 여전히 김씨가 관리하고 있다는 것. 이는 이번에 밝혀진 거액의 밀반출이 사건을 푸는 열쇠로 관측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김씨가 홍콩 HSBC 은행 계좌로 송금한 159만 달러도 김씨가 보관·관리하고 있던 이 돈 중 일부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명동 사채시장 ‘세탁’ 후 송금

이와 관련, 현대 비자금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검찰은 최근 박 전실장의 수수 혐의를 입증할 단서를 포착했다고 밝힌 바 있다. ‘김영완 수표’를 받은 언론인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박지원 전실장에게서 받은 수표”라는 진술을 얻어낸 것. 김씨의 계좌에서 나온 수표를 추적하다가 그 중 일부가 언론사 고위 간부들에게 흘러들어간 정황이 드러난 것이다. 검찰은 이와 같은 정황 증거를 토대로 박 전실장이 김씨를 통해 ‘돈세탁’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검찰 주변에서 권 전고문과 박 전실장이 김씨에게 맡긴 돈 외에 고 정 전회장의 현대비자금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어 주목된다. 이번 밀반출된 거액이 명동 사채시장에서 현금으로 세탁된 뒤 다시 달러로 바뀌어 송금된 정황이 포착되고 있어, 현대 비자금 쪽에 무게 중심이 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미 고 정 전회장이 사망하기 직전인 2003년 7월 말, 김씨와 고 정 전회장이 서너 차례국제전화로 통화했다는 사실도 현대 비자금일 가능성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당시의 통화 내용은 김씨가 정 전회장에게 “현대 비자금 관리로 인해 손해가 막심하다”는 항의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이번 사건과 현대 비자금의 연관성이 주목을 끌고 있는 이유는 얼마 전에 있었던 ‘현대 비자금 15억원 수수’ 혐의로 기소된 박 전실장에 대한 파기환송심 재판에서의 박 전실장측의 주장이다. 지난달 19일 7개월여 만에 재개된 공판에서, 검찰과 변호인측은 김씨 진술의 신빙성 등을 놓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인 바 있다. 박 전실장의 파기환송과 관련, 대법원은 “피고인의 혐의를 입증하는 주요 증거는 이익치 전회장과 김영완씨의 진술인데, 이 전회장의 진술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 많고, 해외에서 변호사 입회 하에 작성된 김씨 진술도 신빙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며 무죄 취지로 사건을 고법으로 돌려보낸 상태다.

이에 박 전실장의 변호인측은 “법정이 아닌 영사에 의해 청취된 진술을 증언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문제는 박 전실장측의 단호한 해명이다. 이날 박 전실장의 변호인 측은 “김영완씨는 이미 권노갑 전고문 사건에서 공범으로 기소된 범죄 혐의자이고, 검찰의 기소내용대로라면 김씨는 피고인의 돈을 받아 관리한 공범이라는 것이 검찰의 주장”이라며 “김씨의 진술을 청취할 수 있을 정도로 소재를 파악하고 있으면서 범죄인 인도조약까지 체결돼 있는 일본에서 체포하지 않고 감싸고도는 이유가 무엇인지 납득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 자리에서 박 전실장의 변호인측은 김씨에 대한 신문 내용과 관련 “검찰의 자금추적 결과 증인(김영완)이 본건 150억원 외에 임태수씨(김영완의 재산관리인)에게 증여한 150여억원의 개인 자금을 임태수가 관리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대목을 두고 문제제기를 했다.김씨가 99년까지만 해도 종합소득세가 1,785만원 가량이었는데, 2000년부터 갑자기 소득세가 억대로 뛰었고, 강남에 4채의 빌딩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 변호인측은 검찰에 150억원에 대한 수사를 진행, 김씨의 재산규모에 대한 추가자료도 요청했다.

2000년, 갑자기 불어난 재산

이날 공판이 있은 직후 검찰 주변에선 김씨의 재산이 2000년에 갑자기 불어난 것에 대해 고 정 전회장의 자금일 가능성이 높다는 추측이 흘러나왔다. ‘배달사고’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누군가’를 거치지 않고 김씨에게 그대로 흘러들어간 게 아니냐는 것. 이날 공판은 ‘해외에서 변호사 입회 하에 진행된 김씨의 진술’의 신빙성에 대한 서로의 입장차를 확인하는 자리였음에도, 박 전실장측의 주장으로 인해 김씨와 현대 비자금의 유착관계가 상당한 설득력을 얻었던 게 사실이다. 한편, 김씨와 관련된 석연치 않은 자금 흐름은 이번 해외 송금건 외에도 이미 여러 차례 검찰에 포착돼 온 탓에 또 다른 출처의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2002년 김씨가 떼강도들에게 도난당한 채권 90억원 중 만기가 도래한 30여억원이 2003년 말 한국증권금융 등을 통해 현금화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또 시중은행을 통해 수십억원을 인출한 정황도 포착된 상태다. 이외에 검찰 주변에선 여러 시중은행과 증권회사의 계좌 수십 개를 통해 수십억원의 뭉칫돈이 입출금됐으며, 검찰의 눈을 피해 금융거래를 할 수 있었던 데는 대리인이 존재한다는 첩보도 들려온다. 그러나 김씨는 2003년 3월 출국한 이후 한 번도 귀국한 적이 없다.


# ‘무기중개상’서 ‘돈줄 가교’ 김영완은 누구명함사진 한장으로 남은 영원한 대학생

대북송금 특검이 시작되기 직전 미국으로 출국해 현재까지 입국하지 않고 있는 김영완씨는 철저히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다. 고려대 출신으로 전국적으로 24개 필지의 부동산을 소유한 재산가이며, 정·관·재계 유력 인사들과 상당한 교분을 맺어왔다는 사실만 알려졌을 뿐이다. 그의 ‘사진’에 관한 의혹도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쉰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현재 언론에 공개된 김씨의 사진은 대학교 졸업사진. 주민등록상에 마땅히 붙어있어야 할 증명사진이 누군가에 의해 고의로 떼어낸 흔적이 있다는 게 정설이다. 특히 그의 신상 정보의 보안과 관련, 주변 사람들을 철저하게 주의시켰다는 것은 이미 여러 차례 알려진 바다.

여러 명의 운전기사들을 고용하고 있으면서도 운전기사들간, 또 인근 주민들과 대화를 극도로 꺼리며 수시로 운전기사를 교체했다고 알려진다. 이처럼 베일에 싸인 김씨가 언론에 처음으로 공개된 때는 ‘무기중개상’으로 활동하던 91년 미국 보잉사 헬기 도입 과정에 대한 국회 국정감사에서다. 당시 평민당 의원이던 권노갑 전고문은 무기중개업자로서 보잉사 국내 대리인이었던 김씨의 이름을 의혹의 대상자로 지목한다. 이후 93년 국회 율곡사업 비리 청문회에서 국방위원과 증인 자격으로 만났으며, 이들은 각별한 관계로 발전한다. 권 전고문은 98년 말 일본에서 귀국, 정치활동을 재개한 뒤 김씨와 자주 접촉했으며, 김씨가 한 때 소유했던 서울 평창동 S빌라에 99년부터 2002년 여름까지 거주하기도 했다.특히 김씨는 고 정몽헌 전회장과 이익치 전회장이 권 전고문을 만날 때마다 늘 자리에 동석한 것으로 알려진다.

김씨는 권 전고문의 단순한 정치자금 ‘관리’뿐만 아니라 ‘조성’에도 깊숙이 관여한 게 아니냐는 추측을 불러일으킨 대목이다. 현대 비자금과 관련, 김씨와 고 정 회장의 관계도 눈여겨 볼만하다. 김씨가 고 정회장을 만난 시점은 92년, 고 정회장이 현대전자 경영을 맡으면서 무기거래상이었던 김씨를 알게 돼 친분을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와 관련, 김씨는 2000년 3월 권 전고문이 현대측에 요구한 총선자금의 구체적 액수를 현대측과 협의, 이를 직접 수령한 것으로 드러난 바 있다. 현대와 권 전고문을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한 셈이다.다음은 박지원 전실장과 김씨와의 관계다. 현대 비자금 150억원을 받은 혐의로 검찰에 기소된 박 전실장은 당시 “YS 정부에서 장관을 역임한 인사로부터 김씨를 소개받았다”고 밝혔지만 권 전고문이 김씨를 박 전실장에게 연결시켜 준 게 아니냐는 의혹이 여전히 짙다.이처럼 ‘김영완-권노갑-박지원-정몽헌’ 이들 네 사람의 얽히고설킨 관계가 대북송금, 현대 비자금, 고 정 전회장의 자살 사건을 푸는 열쇠임에도 사실상 이들 사이의 ‘돈줄’ 가교역할을 해온 김씨가 해외로 도피한 탓에 진실은 미궁 속을 헤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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