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문지화‘폐족’(廢族) 시련딛고 화려한 부활


2010년 6월 2일.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전국 각지에서 환생했다. 한때 ‘멸문지화’를 당했던 ‘노무현의 남자들’이 현 정권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잇단 승리를 거머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의 ‘오른팔’ 격인 이광재 민주당 의원이 강원에서, ‘왼팔’ 안희정 최고위원이 자유선진당의 안방인 충남에서 화려한 승리를 거둔 것은 가히 ‘선거 혁명’이라는 평까지 얻고 있다.

이른바 ‘좌희정 우광재’의 부활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구정권 세력의 이명박 정권에 대한 복수전이 시작됐다는 점에서 이 대통령의 조기 레임덕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친노 세력의 약진은 일명 ‘폐족의 부활’로 불린다. 폐족은 과거 조상의 죄로 인해 벼슬길이 막힌 자손들을 일컫는다. 2006년 지방선거와 2007년 대선 참패 이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노무현계 폐족’들이 2010년 지방선거의 승리자로 우뚝 선 것이다.


참여정부 개국공신의 추락

‘MB정권 심판’을 걸고 출사표를 던진 친노 세력의 성적표는 화려했다. 안희정 충남지사 당선자와 이광재 강원지사 당선자, 김두관 경남지사 당선자 등이 극적인 역전 드라마를 펼치며 명예회복을 선언했다.

서울시장 후보로 나선 한명숙 전 총리와 경기지사에 출마한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역시 여권 유력 후보와 초박징 승부를 펼치며 이름값을 했다. “죽은 노무현이 산 이명박의 등을 친” 6·2 지방선거는 MB정권의 조기 레임덕 가능성에 불을 지폈다.

친노 세력의 정치적 생명은 2007년 대선 직후 끊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2002년 16대 대선 승리를 이끌며 참여정부 개국공신이 된 이들은 2004년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의 과반 의석을 안기며 화려한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부동산 정책 실패 등 잇단 실정으로 참여정부 지지율이 급락하며 친노 세력의 운도 함께 기울었다. 2006년 지방선거 참패이후 17대 대선에서 압도적인 패배를 당하며 정권을 넘겨줬지만 비극은 끝이 아니었다.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내 마음대로 차기를 지명하라면 한명숙”이라는 평까지 얻었던 한 전 총리와 ‘황태자’ 유시민 전 장관, ‘리틀 노무현’ 김두관 당선자 모두 2008년 총선에서 줄줄이 낙선했다.

‘좌희정 우광재’의 운명은 더욱 가혹했다. 안희정 당선자는 16대 대선 기간 중 선거자금 의혹에 발목이 잡히며 ‘무관’(無官)의 영광에 만족해야 했고 수감생활을 마친 뒤에는 전과자 공천심사 배제 원칙에 따라 총선 출마가 좌절됐다.

청와대 국정상활실장을 지내고 18대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한 이광재 당선자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3월 ‘박연차 게이트’에 연루돼 구속된 이 당선자는 정계은퇴를 선언하며 친노 세력의 몰락을 선언했다.


“전당대회서 친노 입김 세질 것”

친노 세력의 부활은 민주당 내 정치지도를 새롭게 썼다. 전당대회를 얼마 남기지 않은 상황에서 친노그룹의 입김이 새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친노 세력의 부활은 지난해 5월 노 전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서거하면서 이미 예고된 상황이었다.

이후 지방선거를 앞두고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검찰 수사 논란이 불거지며 본격적인 ‘노풍’이 일기 시작했다. 천안함 사태를 둘러싼 ‘북풍’으로 친노그룹의 고전이 예상됐지만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우상호 민주당 대변인은 “노풍이 생각보다 미풍이었다고 하는데, 노풍은 밑바닥 기저에 깔려 있었다. 1년 전 투표로 복수하겠다고 다짐한 사람들은 조용히 그 약속을 지켰다”고 평했다.

안희정 당선자도 “이명박 정권의 퇴행적 독선적 국정운영에 대한 심판”이라며 “비극적으로 돌아가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재평가와 복권의 의미도 있다”고 강조했다. 안희정·이광재의 부활은 지방정부에서 ‘대권주자’를 키우자는 호소와 맞물렸다. 특히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한 특정 정당의 후보를 꺾고 새 인물이 패권을 쥐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그러나 한계는 분명하다. 서울과 경기 등 유력 격전지에서 석패하는 바람에 과거의 영광을 재현할 만큼의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친노가 전국에 팔, 다리는 뻗었는데 머리와 몸통은 세우지 못했다”는 말로 아쉬움을 대신했다.


7~8월 전대서 친노그룹 ‘헤쳐모여’ 가능성

지방선거를 승리로 장식한 민주당 내 역학구도가 흔들리고 있다.

상임선대위원장으로 선거 전 과정을 진두지휘한 정세균 대표에 힘이 실린 반면, 범야권 대권주자인 손학규 전 대표와, 정동영 의원의 입지는 좁아졌다.

지난 재보선 연승에 이어 지방선거도 승리한 정 대표는 얼마 남지 않은 전당대회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 이번 기회에 리더십을 인정받아 차기 대권주자로서의 인지도도 높였다는 평가다.

손학규 전 대표는 공동선대위원장으로 선거 지원에 발 벗고 나섰지만 경기지사 야권 단일후보였던 유시민 후보가 석패하면서 이미지를 구기게 됐다. 정동영 의원 역시 정세균 대표가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목소리가 작아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편 지방선거에서 무소속과 국민참여당 소속으로 출마했던 친노 세력들이 민주당으로 헤쳐모일 가능성이 당 안팎에서 제기되고 있다. 민주당 소속의 친노 인사들이 대거 당선된 반면 국민참여당 소속 인사들은 고전을 면치 못한 탓이다. 이에 따라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의 통합 논의가 급물살을 탈 전망이다.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지난 3일 기자들과 만나 “유시민 후보가 민주당 후보였다면 당선 됐을 것”이라며 “두 당이 반드시 합쳐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참여당으로서도 명분이 충분하다. 지방선거에서 야권 단일 후보 추대에 일정한 역할을 담당한 덕에 민주당에 ‘당대당 통합’을 요구할 수 있는 까닭이다. 이 같은 논의를 위해서는 전당대회 추인이 필수적인 만큼 오는 7~8월 중 예정된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구체적인 합의가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pot.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