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한국축구 ‘히딩크 유산’ 찾아라

지난 6월 21일 스위스 바젤의 세인트 야콥파크 경기장에서 열린 ‘유로2008’ 8강 네덜란드 대 러시아의 경기에서 승리한 러시아의 거스 히딩크(왼쪽) 감독이 드미트리 토르빈스키(오른쪽)와 기뻐하고 있다. (EPA=연합)

‘한국 축구의 영웅’ 히딩크 감독의 신화가 2008년 또다시 빛을 발하고 있다. ‘월드컵 보다 더 월드컵다운’ 유로2008 무대에서 변방 러시아를 단숨에 주인공으로 등극시킨 그의 지도력은 2002년 한국의 4강 신화를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하다. 세 번의 월드컵과 유럽 챔피언스리그를 평정한 그의 능력은 이미 검증됐지만 축구팬들은 히딩크 특유의 직설화법에 유독 뜨거운 지지를 보내고 있다.

최근 2010년 남아공 월드컵 3차 예선전을 치르며 불거진 허정무 국가대표팀 감독의 ‘문제 발언’이 도마 위에 오른 가운데 ‘불후의 명언’으로 촌철살인의 재치가 담긴 ‘히딩크 화법’은 모든 지도자들이 갖춰야할 무게와 배려가 담겨있어 화제다.

히딩크 감독은 지난달 23일 유로2008 스페인전을 앞두고 가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러시아와 한국팀의 닮은 점을 “가르칠만한(coachable) 팀”이라 꼽았다. 선수들이 사령탑인 자신의 지시에 잘 따르고 습득 능력이 빠르다는 점을 치켜세운 것이다.

6년 전 한국 월드컵 대표팀과 유럽 축구 명가를 차례로 무너트린 러시아 전사들은 확실히 닮아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히딩크에 대한 양국 국민들의 뜨거운 지지다.


‘러시아 대통령’ 히딩크?

한반도가 붉은 물결로 뒤덮였던 2002년 6월, 한국과 강호 이탈리아가 맞붙은 한-일 월드컵 16강전이 펼쳐진 대전월드컵 구장에서 한 팬이 손수 적어온 플래카드 한 장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히딩크를 대통령으로’라는 다소 과장된 한마디였다.

6년 뒤 같은 주장이 러시아를 뒤흔들고 있다. 영국의 더 타임스는 지난달 24일 모스크바발 기사에서 ‘히딩크 대통령론’을 보도했다.

이 신문은 ‘히딩크 감독이 만약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면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될 것’이라며 러시아 국민들의 뜨거운 분위기를 전했다. 당초 유로2008 조별예선 탈락이 점쳐졌던 러시아의 저력이 드러날수록 히딩크 감독에 대한 무한 신뢰가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마치 6년 전 ‘만약 대한민국이 월드컵에서 우승한다면 대통령제는 폐지되고 히딩크가 지배하는 제정일치사회(?)가 될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인터넷 세상에서 공감을 얻었던 것과 같은 상황이 재연된 셈이다.

UEFA(유럽축구연맹)도 히딩크 감독과 러시아 축구를 재조명하고 나섰다. UEFA 기술 그룹은 ‘히딩크 감독은 이기는 방법을 잘 아는 사령탑이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 선수 대부분은 자국리그에서 뛰지만 이들의 기술력과 정신력은 이미 서유럽 수준을 뛰어넘었다. 러시아의 유로2008 4강은 우연이 아니다’라는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

반면 황금시대를 연 러시아와 달리 일찍이 히딩크 지도아래 기적을 일궜던 한국 축구의 오늘은 상당히 실망스럽다. 북한과 나란히 조 1, 2위로 최종예선에 진출한 한국은 사우디, 이란 등 아시아 신흥 강국들을 염려해야 하는 지경에 빠진 것이 현실이다.

지난 2002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한국 축구와 경제의 공통점’이란 발언이 큰 호응을 얻은바 있다. ▶죽어라 뛰는데 실속이 없다. ▶어렵게 실적을 내고 쉽게 무너진다. ▶한번 신바람 나면 기적을 일으키기도 한다 등이 그 내용이다.

이 같은 주장처럼 히딩크 감독은 한국 축구에 신바람을 불러왔다.

그러나 히딩크가 떠나자 신화는 순식간에 평범한 일상으로 평가절하 됐다. 잇따른 해외진출로 박지성, 이영표 등 유럽파 선수들 개개인의 능력은 눈부시게 성장했지만 4명의 외국인 감독을 거쳐 최근 허정무 감독 체제로 재편된 국가대표팀 성적은 기대 이하였다.

비능률과 허약체질로 대표되던 히딩크 이전 시대로 역행한 것이다.

축구는 다른 스포츠와 달리 사령탑의 머리와 입으로 승패가 결정되는 ‘감독의 작품’이다. 감독은 경기장에 직접 나서지 않지만 상대를 꺾을 전략을 짜고 선수단을 구성한다. 멤버들의 정신무장을 위해 혹독한 다그침도 필요하지만 팀 사기를 높이기 위해 선수단의 의중을 꿰뚫는 언론플레이도 필수다.


“히딩크의 유산 한 톨도 안 남아”

문제는 허정무 감독을 비롯한 국내 지도자들이 이 같은 감독의 능력을 갖추고 있느냐는 점이다. 한국 축구에 대한 신랄한 분석으로 유명한 영국 출신 축구 칼럼니스트 존 듀어든은 공중파 방송에 출연, “현재 한국대표팀에는 히딩크가 남긴 유산이 아무것도 없다”고 일갈했다. 그는 또 “히딩크가 떠난 뒤 그가 만든 공격 지향적이고 창의적인 축구가 사라졌다”고 진단했다.

최근 대표팀 사령탑에 대한 축구팬의 지지도 역시 바닥이다. 축구 전문 월간지 베스트일레븐이 해외축구 전문사이트 사커라인과 함께 지난달 9~17일까지 축구팬 153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허정무호, 가시적인 문제점은’이라는 주제의 설문조사에서 전체 응답자의 29.5%가 ‘객관적인 수준 미달’을 꼽았다. 객관적인 수준에는 선수 기량과 감독의 전술 운용 능력 등이 포함된다.

이어 ‘코칭스태프의 지도력 부족’(23%)과 ‘확실한 킬러 부재’(15%), ‘고질적인 수비불안’(9%) 등 이 꼽혔다. 반면 ‘축구협회 지원 부족’이라는 대답은 불과 1.9%를 기록, 축구팬 대다수는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의 능력부족을 대표팀 부진의 주된 이유로 봤다.

무엇보다 경기를 마친 뒤 부진을 선수탓으로 돌리는 듯한 허정무 감독의 화법을 문제점으로 지적하는 의견이 상당하다. 지난달 5월 31일 열린 요르단전에서 대표팀 선발 수문장으로 나선 김용대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연발한 끝에 내리 2골을 내줬다.

어렵사리 추격골을 뽑아 2:2로 승점1점을 따낸 뒤 허정무 감독은 곧장 김용대의 실수를 언론을 통해 적나라하게 꼬집었다. 징계중인 이운재의 대표팀 복귀를 시사하는 식이었다.

그는 “이운재가 온다면 수비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 이운재의 사면을 건의하겠다”고 말했다. 며칠 간 소동 끝에 이운재 사면은 없던 일이 됐지만 대표팀 소속 선수들은 남모를 맘고생에 시달려야했다. 무엇보다 허 감독의 말에 정면으로 심장을 꿰뚫린 김용대는 적잖은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대표팀 모 선수는 “자신이 뽑은 선수들을 믿지 못하는 감독의 인터뷰에 실망했다”고까지 말했다.


대표팀 사령탑 지지율 바닥

허 감독의 ‘새털 같은’ 언변은 지난달 펼쳐진 원정 2경기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우리 경기력은 FIFA 순위 100위권 팀과 다를 바 없다”(6월 7일 요르단전 후) “국내 선수층이 뻔하다보니 쓸 만한 수비수 찾기가 힘들다”(6월 14일 투르크메니스탄전 후)유로2008 예선 첫 경기에서 스페인에 1:4 대패한 뒤에도 “러시아 선수들은 젊다. 남들이 3년 만에 배울 것을 사흘 만에 익힐 수 있다”며 선수들의 기를 살려준 히딩크 감독과는 수준이 다른 인터뷰다.

물론 허 감독의 하소연이 일면 틀리지만은 않다. 그러나 이는 팀의 수장인 감독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용수 KBS해설위원은 “말은 많을수록 화를 불러온다. 불필요한 말이나 논란을 일으킬 만한 내용은 걸러내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꼬집었다.

한국은 2010 남아공 월드컵으로 가기 위한 최종 관문에 안착했다.

그러나 수많은 문제점을 드러낸 지금의 전력으로는 아시아 맹주라는 자존심을 지키는 것도 힘겨워 보인다.

2008년 재연된 히딩크 매직으로 팬들의 눈높이는 한층 더 높아졌다. 무엇보다 선수 활용과 전술구사능력에서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 허정무 감독과 코칭스태프의 환골탈태가 기대되는 대목이다. 비능률과 남 탓으로 일관한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월드컵 본선 7회 연속 진출의 꿈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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