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면돌파 승부수 던졌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파격 행보에 정치권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특히 박 전 대표가 지난 3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에 적극 찬성하는 입장을 밝혀 주목받고 있다.

박 전 대표가 한·미FTA에 대한 야권의 반발이 거센 가운데 매우 신속하게 당 지도부 지원 사격에 나섰다는 것은 대야 공세를 강화함으로써 보수 세력 결집을 노린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또한, 박 전 대표는 MB노믹스와 차별화된 자신의 정책을 내세움으로써 현 정권과의 차별화도 꾀하고 있다. 박 전 대표가 ‘얼굴마담’으로 전면에 나서진 않지만 사실상 정면돌파 카드를 택한 게 아니냐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이와 맞물려 ‘박근혜 조기등판론’이 친이계뿐만 아니라 친박계 내부에서도 꿈틀대고 있는 상황이다.

대야 공세로 보수우파 끌어안기
MB와 정책차별화 꾀해

홍준표 힘 실어주려 했지만
잇단 ‘설화’
서울시장 보선 참패 이후 한나라당 내에서는 ‘지도부 총사퇴론’이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홍준표 대표는 ‘무승부’라고 강변하고 임태희 대통령실장의 ‘사의 표명’을 몸을 던져 막는 등 처절하리만치 버텼다. 결국 홍 대표는 박 전 대표와 친박계의 암묵적 동의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박 전 대표가 “모든 것을 정치공학적으로 얘기하게 되면 국민들이 참 피곤해진다”고 말한 이후 ‘지도부 책임론’이 사그라졌다는 게 중론이다.

친박계가 ‘지도부 책임론’보다는 ‘쇄신론’에 무게를 싣고 방향을 튼 것이다. 아직까지 홍준표 대표체제를 가져가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에서다. 내년 총선을 치르고 대선까지 가기 위해서는 여러 고비를 거쳐야 하는데 지금 당장 박 전 대표가 전면에 나서기는 부담스러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당 혁신을 명분으로 공천개혁을 비롯한 인적쇄신을 하려면 누군가 앞장설 사람이 필요한데, 현재로선 홍 대표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홍 대표의 잇단 설화로 인해 이러한 계획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홍 대표는 선거가 끝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아 또다시 “꼴 같잖은 게 대들고”, “내가 이대 계집애들 싫어했다” 등의 막말을 쏟아내며 여론의 비난을 자초했다.

지난 2일 당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는 ‘막말 파문’을 일으킨 홍준표 대표와 지지부진한 당 쇄신에 대한 비판,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유승민 최고위원은 이날 “당의 쇄신을 한다면서 홍대앞 타운미팅에서 어떻게 그렇게 막말을 할 수 있는지, 당에 어떤 해를 끼치는지 반성하고 국민 앞에 사과하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홍 대표는 해명하기에 급급했지만 당내 불만의 목소리들은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다. 수도권 한 친이명박계 의원은 “FTA 처리만 끝나면 정식으로 홍 대표 진퇴 문제를 제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혁신파인 정태근 의원은 YTN뉴스에 출연, “국민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한 번만 더 하면 그 자리에 계속 있는 게 불가능하다고 본다”고 경고했다.

더군다나 홍 대표가 지난 2일 TVN 백지연의 끝장토론에 출연 “임기말 대통령 지지율이 떨어진다고 배신하는 것은 배신의 정치이고 그런 것은 하지 않는다”고 발언한 것을 두고도 당내 비판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한 당직자는 “(홍 대표가) 가만히 있는 게 우리를 도와주는 것 아니겠느냐”면서 “청와대 쇄신을 논해야하는 판에 왜 그런 말을 하고 다니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가 1일 자신의 주최로 국회 도서관 대강당에서 열린 고용복지 세미나에서 참석자들에게 인사 하고 있다. <정대웅 기자> photo@ilyoseoul.co.kr

박근혜 ‘조기등판론’ 꿈틀

박 전 대표가 ‘조기등판론’에 선을 긋고 있는 가운데 당내에서 홍 대표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면서 박 전 대표가 나서서 한나라당의 쇄신을 주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박 전 대표가 ‘홍준표 체제’에 힘을 실어줬음에도 불구하고 파열음이 새어나오는 양상이다.

원희룡 최고위원은 ‘지도부 총사퇴 이후 비대위 구성’을 제안했고, 친이계 좌장인 이재오 의원 역시 트위터에 “내년 농사 잘 지으려면 객토(땅 힘을 돋우기 위해 다른 곳에서 좋은 흙을 가져오기)를 하든, 땅을 바꾸든 해야 한다”고 ‘객토론’을 주장했다.

이 의원이 ‘내년 농사’를 거론하며 객토론을 다시 들고 나온 것은 내년 총ㆍ대선을 앞두고 과감한 당 개혁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 의원의 언급은 지도부 교체와 대폭적인 물갈이를 촉구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정몽준 전 대표 역시 “당 안에서 개혁과 쇄신을 실제 실천하고 책임질 수 있으며 힘이 있는 분들이 지도부에 참여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실제로 당을 이끌 수 있는 사람이 지도부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친박계 의원 사이에서도 박 전 대표의 ‘조기 등판론’이 번지고 있다.

부산지역 친박계 핵심으로 꼽히는 허태열 의원은 지난 3일 SBS 라디오에 출연, 당내에서 제기되는 ‘박근혜 등판론’에 대해 “박 전 대표는 거의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다음 한나라당 대선후보가 되지 않겠느냐”며 “박 전 대표가 당연히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허 의원은 “역할을 맡는데 시기 문제도 있고 어떤 모양으로 맡느냐 하는 문제도 있다”고 덧붙였다.

친박 성향의 권영세 의원 역시 대선후보의 경우 대선 1년6개월 전 당직에서 사퇴하도록 규정한 현 당헌·당규를 고쳐서라도 박 전 대표가 전면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권 의원은 평화방송 ‘열린세상 오늘’과의 인터뷰에서 “박 전 대표도 현 상황을 고치기 위해 나서는 것이 당이나 본인을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친박계 내 박 전 대표 조기등판론 확산은 대권 가도를 위해 반드시 총선승리가 필요한 만큼 강력한 리더십 발휘가 불가피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 친박계 내에서도 조심스럽게 박근혜 등판론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홍 대표를 끌어내리는 방식이 아닌 선대위를 꾸리는 등의 다양한 방법을 구상 중이라는 것. 홍 대표와 현 지도부가 나서서 박 전 대표가 자연스럽게 활동할 정치적 공간을 열어줘 위기상황을 타개해나간다는 것이다.

대야 공세로
보수우파 끌어안기

이런 상황에서 박 전 대표가 최대 쟁점현안이 되고 있는 한미 FTA 비준동의안에 대해 “늦어질수록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번에 처리되는 게 좋겠다”는 입장을 밝혀 주목되고 있다. 박 전 대표의 이 같은 발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박 전 대표는 현 정부에서 여야 대치 현안이 있을 때마다 한나라당의 대야공세에 가담하지 않았었다. 그러던 박 전 대표가 18대 국회 마지막 예산국회 시점에 여권의 입장을 지지한 것은 당내 결속을 다지면서도 보수우파의 결집을 노린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사사건건 박 전 대표의 입장 표명을 주장했던 야권으로서는 박 전 대표의 이례적인 입장 표명에 어리둥절한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MB와 차별화

이와 별도로 박 전 대표는 정책을 통해 변화와 쇄신 의지를 강조하겠다는 뜻을 보이고 있다. 청와대, 이명박 대통령과 직접 맞서는 구도를 만들기보다는 현 정부의 정책적 문제점을 비판하면서 차별화를 시도하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박 전 대표는 지난 1일 열린 고용복지 정책 세미나에서 “거시지표보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복이 중요하다. 고용률을 우리 경제 정책의 중심 지표로 삼아야 한다”며 성장 중심의 ‘MB노믹스’와 반하는 정책을 내세웠다.

앞으로 성장보다는 복지에 초점을 맞추고 ‘자활과 자립을 위한 고용 창출’에 전념하겠다는 것이다. ‘747공약’(연 7% 경제 성장, 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 세계 7대 강국), 대기업 프렌들리, 감세와 규제완화 등으로 대변되는 이 정부의 경제정책과는 크게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박 전 대표의 측근들은 “‘정책 차별화’가 훨씬 더 본질적”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당의 전면에 나서 대통령과 정치적 대립각을 세우는 게 ‘MB심판론’에서 더 자유로울 수 있지만, 국민들 눈에는 또 다른 ‘구태 정치’로 보일 뿐이라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이에 따라 박 전 대표의 주변에선 조만간 꾸려질 대선 캠프도 기존 형태와는 완전히 달라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젊은층의 다양한 요구에 구체적인 정책 대안을 갖고 반응하는 캠프를 꾸리겠다는 것이다. 집권당에 등을 돌린 20~40대와는 박 전 대표가 직접 소통에 나서야 한다는 의견도 많이 나온다.

친박계 핵심 의원은 지난 2일 “돌아선 민심을 다시 돌려 세우는 길은 정책 패러다임의 전환뿐”이라면서 “청와대에 지속적으로 정책 변화를 요구하고 관철시키되, 도저히 정책적으로 함께할 수 없다는 판단이 서면 그때 결별을 선언하겠다”고 말했다. 토론회를 주도한 안종범 성균관대 교수도 “단기적인 정치적 주장보다 정책적 대안이 장기적으로 훨씬 강력하다”면서 “고용과 복지를 놓고 으르렁대던 기획재정부와 보건복지부, 고용노동부 1급 실장들을 토론회에 나오게 해 범정부적 조율을 요구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책적 차별화’에 대한 비판도 나온다. 서울시장 보선에서 참패한 결정적 원인이 ‘반(反)이명박’ 정서이고, 이에 대한 반사이익을 그동안 박 전 대표가 누려왔는데 이제 와서 민심을 대변하지 않고 원론적인 정책 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의도연구소장인 정두언 의원은 “내년 4월 총선이 어렵게 보이니까 대선만 신경 쓰는 것처럼 느껴진다”면서 “당이 어려움에 처했는데도 모른 체하는 것은 지도자의 자세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조기성 기자> ksch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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