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9년 상품권법의 폐지로 인해 상품권발행 업체가 난립하고 있다. 94년 1월 개정될 당시만해도 상품권 발행이나 규모가 까다로웠지만 지금은 어느 업체나 공정거래위원회의 표준약관만 준수한다면 무제한적으로 금액이나 규모에 관계없이 발행할 수 있게 되어 있다. 현재 정부가 정확한 상품권 시장 규모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지만 사채시장으로 급속히 흡수된 상품권 시장은 연간 40조원 이상 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강남구 신사동에 위치한 국내 최대 상품권 유통회사인 천일사의 경우 연간 매출액만 10조원으로 0.5%만 이익을 내도 순이익이 500억원에 이를 정도다. 문제는 상품권이 추적이 되지 않고 유가증권으로 즉시 현금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업체나 개인들에게 비자금 조성수단이나 탈세의 온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또 공기업이나 공무원 관계자들도 접대비가 5만원으로 한도가 정해진 가운데 로비 수단으로 상품권을 선호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탈세의 온상이자 신종 로비수단으로 급부상한 상품권 시장의 실태와 폐해 그리고 방지 대책에 대해 알아봤다.

상품권 시장 40조원 이상

현재 상품권 시장에서 유통되는 규모에 대해 정확한 통계는 없다. 그 이유는 상품권법 폐지로 인한 결과다. 국회 재경위 소속 한 관계자에 따르면 특히 성인 오락실에서 현금 대신 지급하는 경품용 상품권 시장이 20조에 이른다고 추정했다. 그는 “성인오락실에서 사용되는 경품용 상품권은 현재 강남 테헤란로에서 ‘대박장사’를 하고 있다”며 “1년에 오락실용 상품권이 20조에 이른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여기에 전체 상품권의 60%를 차지하는 백화점, 제화, 패션, 주유 상품권 등을 다루는 국내 최대의 상품권 전문 유통회사 천일사의 경우 연간 매출액이 10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역시 수조원의 매출을 올리는 2위사인 제일사 매출액과 합한다면 전체 상품권 시장은 연간 최소 40조 이상 될 것이라는 게 관련자들의 관측이다.

현재 국내법상 상품권 발행한도나 규모에 제한이 없어 시중에 나오는 상품권 종류만도 3천종 이상이 유통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발행 금액도 최하 5천원에서부터 최고 2천만원까지 발행사 마음대로 발행가 조정이 가능한 형편이다.하지만 3천 여종의 상품권이 존재하지만 대기업이나 공무원들이 구매하는 우량상품권은 손에 꼽을 정도다. 현재 시중에서 가장 판매 인기도가 높은 상품권으로는 롯데, SK 주유권, LG 정유, 농협하나로 마트, E 마트, 제화 상품권, 신세계, 현대, 국민관광, 하나은행 상품권 등이다. 특히 판매시 할인 폭이 가장 적은 상품권은 농협 하나로 상품권이라는 게 재경위 관계자의 설명이다.

대기업 탈세 신종 수단

“상품권 시장은 탈세의 온상이다”이는 국회 재경위에서 8년간 근무해온 한 여당 관계자의 설명이다. 국세청도 손을 댈 수 없는 성역이라는 얘기다.그는 “상품권 구입은 법인카드나 개인카드로 할 수 있다”며 “특히 국세청이 기업이나 개인이 상품권 대량 구입에 있어 여신전문 금융법에 따라 상품권 카드 구매를 해야 함에도 일반물품으로 구매해도 전혀 구별할 수 없어 탈세·탈루의 온상으로 지목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개인의 경우엔 카드로 상품권을 대량 구매해 일반상품구입으로 영수증을 처리해 연말 소득공제를 받을 수도 있다. 법인회사 역시 물품 구입형식으로 상품권을 대량 구매해 경비 처리를 한 뒤 상품권을 접대용으로 사용하는 등 탈세·탈루에 법인세 절감 효과까지 얻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 과정에 비자금 조성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일부 기업의 경우 추적이 되지 않는다는 점과 세원 노출을 피하기 위해 카드로 구입한 상품권을 불법할인한 뒤 비자금이나 경비를 마련하는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기업 과대 매출로 ‘활용’

A기업의 한 관계자는 “급전이 필요할 경우 법인카드 10장을 만들어 상품권을 구매해 경비처리하고 이른바 ‘깡’(상품권 불법 할인매도·매입)을 통해 현금 조달하는 방식으로 메운다”고 토로했다.로비가 심한 정치권과 정부, 그리고 공무원들 사이에서도 상품권은 커다란 인기를 얻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기업이나 공무원 사회에서 접대비의 한도가 정해져 로비활동이 주춤한 게 사실이었으나 상품권을 통한 승진이나 청탁등 신종 로비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 또한 공공연한 현실이다.

특히 금강제화의 경우 상품권 발행과 판매를 동시에 하는데 구두 매출과 상품권 매출을 동시에 잡아 매출을 과대계상해 논란이 된 적도 있다. 재경위 관계자는 “지난번 문제가 된 금강제화 상품권의 경우 상품권 판매는 매출이 아님에도 매출로 잡아 과대 계상함으로써 분식회계 시초를 보여줬다”며 “이는 상품권 편법처리의 전형”이라고 언급했다.또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우량업체인 B 인터넷 기업의 경우 인터넷 사업 특성상 광고를 제외한 고액의 매출 수단이 없음에도 높은 주식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거품 상품권을 대량으로 발행해 이를 매출로 잡아 신용도를 높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재경위 관계자는 밝혔다.

정부 경기 위축 우려 ‘방관’

상품권의 이런 폐해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상품권 규제에 미온적인 반응이다. 그 이유는 경기도 안좋은데 상품권까지 규제하면 국내 경기가 활기를 잃는다는 우려감 때문이다.열린우리당 재경위 소속 문석호 의원은 지난해 국감에서 “상품권 시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관련 세수는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며 “상품권의 불법·변칙 거래가 만연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가 있다.

문 의원실의 한 관계자는 “사실 상품권 시장을 규제하는 것은 매우 단순하다”며 “신용카드로 상품권 구매를 못하도록 법안을 추진하고 오락실 경품권에 대해선 경품권 사용을 못하도록 규정하는 법을 만들면 된다”고 단순한 해법을 제시했다.그러나 그는 작년 국정감사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당 일각에서도 관련 법안을 추진했지만 정부측에서 경기 위축을 들며 난색을 표해 관련법안 처리가 당내에서 표류하고 있다고 실토했다.


# 상품권 시장의 ‘한국은행’ SK 주유권 실태1,000만원 상품권 할인구매하면 300만원 이익 >SK 본사는 전국 최대 정유업체로 3,700여개의 주유소 가운데 직영점도 1,000여개가 육박하고 있다. 일반 고객들과 기업체는 SK 직영점에서 SK 주유 상품권을 살 수가 있다. 관련 업계에선 급전이 필요한 영세기업체의 경우 SK 주유권을 대량 구매하는 데 그 이유는 가치가 높고 할인율이 낮은데다 현장에서 판매가 용이하다는 점이 작용하고 있다.통상 상품권 흐름도를 보면 SK 직영점이나 SK 네트웍스 등에서 구매한 개인이나 기업체의 SK 주유권은 상품권 전문 유통업체로 넘어간다.

또 개인이 친구나 은인에게 건네주고 이들은 SK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고 상품권으로 결제를 하면 상품권은 SK본사로 들어가고 직영점에 대금을 결제해 준다.이와 관련, 재경위 관계자는 “SK 주유소 직영점 사장은 SK 주유권으로 본사 기름 대금을 지급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정상적인 매출을 올리고 있다”고 말했다.상황이 이렇다보니 주유소 직영점 사장들은 매일 출근하다시피 신사동에 위치한 유명한 상품권 전문 유통회사 앞에서 SK 주유권을 구매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다. 그 이유는 할인된 가격으로 상품권을 대량 구매하고 액면가로 본사에 기름 값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1,000만원 상당의 상품권을 할인해 700만원에 구매했을 경우 앉아서 300만원을 벌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박리다매인 주유소 사업 특성상 정상적인 매출보다 비정상적인 매출이 더 높게 나오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게 재경위 관계자의 말이다.이런 상황에서 SK 본사는 주유권 가치가 너무 떨어지지 않도록 발행규모를 조정하고 할인율을 조정한다는 얘기다. 또 SK 본사는 직영 주유소 사장의 편법 상술을 눈감아 주지만 발행 규모와 할인율 등을 조정함으로써 한국은행처럼 주유권을 통해 통화량을 조절하듯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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