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묻지마 광풍’에 빠지다

 

- ‘묻지마 범죄’, 가해자 피해자 일면식도 없는 경우 허다

- 대부분이 우발적 정신질환 범죄, 대책마련 절실


‘묻지마 살인’은 이제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무 이유 없이 행해지는 살인행위, 일본어로는 도리마(通り魔)라고 한다. 만나는 사람에게 재해를 끼치고 순식간에 사라진다는 마물을 뜻한다. 일반 살인과는 달리 범행 피해자와 가해자의 상관성이 전혀 없다. 또 폭력이나 알콜 중독 등의 정신적 병리 상태가 동반되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경제적 빈곤이나 반사회적인 성격 장애 등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전문가들은 ‘묻지마 살인’이 급증하는 이유로 “가족 해체와 적대적 경쟁사회 등의 개인적·사회적 배경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탓”으로 보고 있다. 결국 그 사회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살인 앞에 붙은 ‘묻지마’라는 말처럼 원한이나 치정·보복 등의 관계에서 비롯돼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원인동기가 없이 마구잡이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을 뜻한다. 때문에 그 피해자들의 억울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이유도, 목적도, 그리고 정해진 범행 대상도 없다. 특히 피해자에 대한 동정심조차 없다. 자책이나 양심도 없다. 이 같은 범죄가 전 세계는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끊이지 않는다. 나를 포함해 그 누구라도 피해자가 될 수 있는 ‘묻지마 살인’. 이젠 우리 일상 생활 속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공포’로 자리를 잡았다.


이 범죄의 경우 다른 어떤 범죄보다 예방이 어렵고 사회에 미치는 파장이 크다. 무차별적이고 폭력적인 특성으로 사회 전반적인 공포를 키운다.

이 광풍은 이미 전 세계로 퍼져 있다. 지난 7월 22일 노르웨이에서는 정치이념에 따른 테러로 91명이 목숨을 잃었다. 오슬로 정부 청사와 오슬로 교외 우토야섬의 노동당 청년 캠프 행사장에서 연쇄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4월 15일에는 중국랴오닝성 안산시얼타이쯔촌 공중목욕탕과 세차장에서 일가족 3명 등 모두 10명이 살해를 당했다. 범인은 이들 피해자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앞서 3월 23일 오전에는 중국 푸젠성 난핑시 난핑실험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엽기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보건소 의사 출신의 40대 남성이 등교 중이던 초등학생들을 상대로 칼을 휘둘러 8명이 숨졌다. 일본에서는 지난해 12월 17일 ‘길거리 악마’로 일컸는 ‘도오리마’ 사건이 발생했다. 도쿄 한 전철역 버스승강장에서 이바라키현 도리데 역 노선버스 2대에 한 남성이 올라 흉기를 마구 휘둘러 10여명이 죽거나 다쳤다. 이 남성은 “내 인생을 끝내고 싶었기에 상대를 가리지 않고 흉기를 휘둘렀다”고 말했다. 2008년 6월 8일에도 일본 전 지역이 무차별적 살인으로 충격에 빠졌다. 도쿄 시내 전자상가로 유명한 아키하바라 대로에서 2톤 대형트럭이 돌진해 당시 횡단보도를 건너던 보행자 3명이 그 자리에서 차량에 치였다. 운전자 20대 남자는 돌진 후 차량에서 내려 소지하고 있던 등산용 칼로 거리를 걷던 행인 7명을 찔러 죽였다. 10여명 정도의 시민이 중경상을 입기도 했다. 이 남성은 “나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아키하바라에 왔다.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게 지겹다. 누구를 죽이던 상관없었다”고 경찰 조사에서 밝혔다.


대한민국, ‘안전지대’ 아니다


국내에서도 ‘묻지마 살인’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전문가들 역시 어느 경우던 한국도 이제 ‘묻지마 살인’의 안전지대가 아니라고 경고한다. ‘묻지마 살인’ 예방을 위해서는 장기적 안목으로 우선 사회구조적인 원인 해결과 생활 속 치안망 확보가 가장 중요하다. 이 같은 살인은 경제위기와 양극화 현상 등에서 비롯된 증오범죄로 더욱 커질 가능성이 크다. 결국 ‘묻지마 살인’은 개인적 좌절과 절망을 사회의 탓으로 돌려 이유 없이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들에 대한 무차별적 살인 등의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검찰청의 ‘2010년 범죄분석’에 따르면 우발적이고 현실 불만 등의 이유로 ‘묻지마 살인’이 계속 늘어 전체 살인사건 가운데 이 범죄로 인한 살해 사건이 54%를 차지한다. 최근 5년간 살인 등 강력 범죄의 36.7%가 음주상태에서 벌어졌다. 이 가운데 대부분이 술에 취해 벌어지는 충동 범죄, ‘묻지마 범죄’다. 음주에 이어 정신질환자의 범죄도 여전하다. 지난 9월에는 정신질환을 앓던 50대 A씨가 아파트 승강기에서 초등학생 2명을 둔기로 때려 중상을 입힌 뒤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숨지기도 했다. 여성이나 노인, 범인 대상이 정해진 것은 없다. 경찰 관계자는 “‘묻지마 살인’이나 ‘묻지마 범죄’의 경우 뚜렷한 특징도 없다. 사건 대부분 한밤 중 골목길에서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낮 경찰서 안이 범행 무대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들 대부분 범행 동기가 ‘우발적’, ‘현실 불만’ 등이다. 이같은 ‘묻지마’ 범행은 2005년 360여건 가운데 37%를, 2009년 650여건 가운데 54%를 차지했다.


묻지마, 특정인(?)의 횡포


‘묻지마 범죄’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 더욱 불안감을 키운다. 지난달 3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유정현 의원(한나라당)이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각종 범죄자 가운데 정신이상자는 2008년 1841명, 2009년 1984명, 2010년 1979명으로 집계됐다. 올 들어 8월까지 1500명으로 올 연말까지 2000명을 넘을 수 있다. 지난해 정신이상자 범죄 유형을 보면 폭력이 558명으로 가장 많았고 살인과 강도, 강간, 방화 등 4대 강력범죄도 137명이나 됐다. 정상인보다 가벼운 처벌을 받는 정신이상 범죄자는 분별력이나 자기 통제력이 약하기 때문에 꾸준히 치료를 받지 않으면 다시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정신질환 범죄자의 재범률은 32.1%로 전체 범죄자 재범률(24.3%)보다 8% 가까이 높았다. 정신이상 범죄자가 쉽게 풀려나 다시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문제지만 그 범죄가 대부분 명확한 이유 없이 불특정 시민을 대상으로 한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유 의원은 “정신질환자의 ‘묻마 범죄’는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어 심각한 사회문제인데도 정부가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은 적이 없다”면서 “무고한 시민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체계적인 예방 및 재발방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정신질환 범죄자, 흉기든 이유는


지난 9월, 하굣길에 나선 초등학생 2명이 50대가 휘두른 둔기에 맞아 쓰러지는가 하면 다음날 저녁 대전에서는 가정집에 괴한이 침입해 가족 등을 흉기로 위협하다가 격투 끝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 모두 가해자와 피해자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 사건을 낸 가해자 모두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 순간적 충동에 평범했던 가정이 ‘풍비박산’ 난 꼴이다. 살인 등의 범죄를 저지른 정신질환자들을 수용하고 있는 공주의 국립법무병원의 수감자 대부분은 꾸준한 약물 치료 및 관리만 이뤄졌다면 이들 범행을 사전에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하지만 모든 정신질환 범죄자가 이 병원에 입원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경범죄자들은 가족에게 넘겨지거나 사회에 방치되는 상황으로 이로 인한 재범의 확률이 무척 높다. 지난해 대구에서는 한 정신질환자가 마을 주민을 시멘트 벽돌로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그는 전과 23범으로 가족으로는 정신분열증을 앓던 누나와 가해자 단 둘이었다. 제대로 된 치료는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재범의 위험성을 그대로 보여줬다. 실제로 강제성 없이 정신질환 범죄자를 치료하기는 어렵다. 특히 가족이 없는 정신질환의 경우 치료는 물론 범죄 예방 자체가 어려워 흉악범으로 이어지기 쉽다. 꾸준한 약물치료 및 교육 등이 정신질환 범죄자, ‘묻지마 범죄’를 줄일 수 있는 최우선 방법이라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김장중 기자> kjj@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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