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선점만이 살 길이다

 

특허경쟁 패자는 승자에 천문학적인 대가 지급

‘그린카 시대’ 특허 조기 확보…대대적 조직 강화


국내 기업을 향한 글로벌 기업들의 특허 공세가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최대 격전지는 전자 업계다. 2000년대 들어와 국내 기업과 해외 기업이 벌인 특허소송만 100여건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들어서는 업종과 품목을 가리지 않고 전 분야에 걸쳐 특허분쟁이 전개되는 양상이다.

 

자동차업계도 하이브리드, 전기차 등 ‘그린카 시대’를 맞아 치열한 특허경쟁이 확산되고 있다. 이에 현대차그룹이 특허와의 전쟁에 조직적으로 나서고 있다. 남양기술연구소 내 특허팀을 특허실로 격상하는 등 대대적인 조직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특허실 격상은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직접 지시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정 회장의 의지 외에도 조직 내부에서 특허전쟁에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준비 작업이 급물살을 탔다는 전언이다.


올 들어 지난 4월부터 삼성전자가 애플과 휴대폰·태블릿PC 특허침해 소송을 놓고 9개국에서 치열한 소송전을 벌이고 있다. 지금까지는 제품 판매 금지와 같은 가처분소송 정도로 몸을 풀고 있는 형국이지만, 본안 소송에 들어가면 결과에 따라 어느 한쪽은 치명타를 입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업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지난 6월에는 독일 오스람이 삼성전자, 삼성LED, LG전자, LG이노텍을 상대로 LED(발광다이오드) 조명 특허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LG전자도 일본 소니와 작년 말부터 휴대폰 특허분쟁을 벌이다가 지난달 크로스 라이선스를 맺으며 일단락됐다.


특허청 관계자는 “올해 상반기 글로벌 기업과의 특허분쟁은 총 33건으로 이 가운데 22건(67%)이 삼성전자와 LG전자를 상대로 한 소송”이라고 설명했다.


현대차 역시 2005년부터 미국 특허관리업체 오리온IP로부터 3400만 달러 규모의 특허침해 소송을 당했다. 현대차는 1심에서는 패소했다가 작년 5월 2심에서 승소했다.


글로벌 특허분쟁은 일단 소송 전에서 패하면 막대한 타격을 입는다. 특허소송의 패자는 천문학적인 대가를 상대방에게 지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2000년부터 미국 램버스와 국내 기업들이 벌인 D램 특허분쟁이 대표적 사례다. 소송이 10년 넘게 지속되며 패색이 짙어지자 삼성전자는 지난해 초 램버스와 2015년까지 7억 달러를 주는 조건으로 크로스 라이선스 계약을 맺었다.


글로벌 전자업계가 특허전쟁에 휩싸인 가운데 현대차그룹이 외부 특허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 행보를 이어가고 있어 주목된다.


도요타 협박에도 하이브리드 독자 개발 성공

 

지난 2007년부터 현대차는 하이브리드 등 친환경차 분야의 기술 자립에 나섰다. 당시 도요타는 독자적인 개발에 나서지 말 것을 권유했다. 이기상 환경시스템개발실장(상무)은 “도요타가 찾아와 그 불확실한 것을 왜 개발하려 하느냐, 포드도 우리 것을 사다 쓰는데 좋은 조건으로 줄 테니 사다 쓰라 했다”고 전했다.


신기술 국산화는 쉽지 않았다. 이 상무는 “처음 개발할 때는 모터 등에 대한 설계나 평가기술이 없어 일본 모터 부품 회사랑 기술 협의차 일본에 갔는데, 전날 갑자기 없던 일로 하자는 통보가 와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일본 자동차 회사가 부품 계열사에 현대차에 샘플을 파는 것은 좋은데, 기술제휴는 조심하라는 요지의 공문을 뿌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차는 이후 2년여 개발에 돌입해 지난 2009년에 아반떼 LPi 하이브리드와 2011년 쏘나타·K5 하이브리드를 잇달아 선보였다. 도요타의 특허를 피해 오히려 앞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도요타 자회사인 부품업체 덴소조차 “현대차의 1모터 병렬형은 도요타 하이브리드 시스템보다 고속도로 등에서 연비와 가속성이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특허전쟁 대비 특허팀 → 특허실로 격상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유럽 최대 특허법률사무소 그뤼네커에 따르면, 현대차는 올 들어 전기차와 하이브리드차 부문에서 69개의 특허를 등록했다. 이는 도요타(188개)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수치다.


현대차는 닛산르노(58개), 혼다(51개), 폭스바겐(27개), BMW(27개), GM(17개) 등의 경쟁사보다 많은 특허를 확보해 기술 경쟁에서 한발 앞서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올 들어 현대차의 특허 등록이 급증해 주목된다. 또한 2006년부터 2011년까지 현대차의 총 특허 등록 건수는 234건으로 세계 6위를 기록했다. 올해 등록 비중이 무려 29.5%에 달한다. 이는 도요타(7.6%), 르노닛산(6.5%)은 물론 BMW(23.5%)와 벤츠(26.7%)를 능가하는 수치다.


진훈태 두창국제특허법률사무소 대표는 “올 들어 등록 건수가 크게 증가한 것은 현대차그룹이 최근 몇년새 특허 기술 확보에 주력해왔다는 증거”라며 “이를 계기로 현대차그룹이 글로벌 특허전에 보다 공격적으로 나설 것”이라고 내다봤다.


현대차그룹은 그린카 시대를 맞아 업체 간 특허전이 치열하게 전개될 것에 대비해 남양기술연구소 내 특허팀을 특허실로 격상하는 등 대대적인 조직 강화에 나섰다. 특허 출원을 전담하는 팀과 법무를 담당하는 팀을 분리해 전문성을 강화하고 특허 관련 인력도 종전 60여명에서 대폭 늘리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현대차그룹 고위 관계자는 “삼성과 애플이 특허와 관련한 법적 분쟁을 지속하는 등 앞으로 글로벌 자동차업계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불거질 것으로 예상한다”며 특허 조직 강화의 배경을 설명했다.


업계 관계자는 “기술 변화가 빠른 친환경 그린카 시대에는 독자 기술 확보가 경쟁력을 넘어 생존을 좌우한다”며 “현대차그룹은 단순한 양이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 경쟁사를 앞서는 기술력 확보에 주력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진우 기자> voreolee@ilyoseoul.co.kr

<김규리 기자> oymoon@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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