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의 대부’ 김근태 별세…큰 별 지다

▲ 뉴시스
‘민주화의 대부’ 김근태 별세…큰 별 지다

‘민주화의 대부’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지난달 30일 64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맨 앞자리에서 이 땅의 독재와 맞서며 선혈을 받쳤던 ‘청년 김근태’는 고문합병증 등으로 인한 지병으로 숨을 거두면서 시대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

김 고문은 지난 11월 말부터 뇌정맥 혈전증으로 서울대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왔으며, 2차 합병증이 겹치면서 패혈증을 일으켰다.

 

김 고문 별세 하루 전 그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이해찬, 한명숙 전 총리를 비롯해 전·현직 의원들이 서울대 병원을 찾아 김 고문의 쾌유를 기원했지만 끝내 숨을 거두면서 민주화운동 동지들은 오열했다.


“민주화의 큰 별이 졌다”


밤새 중환자실을 지킨 민주통합당 이인영 전 최고위원은 김 고문이 별세한 직후 침통한 표정으로 “아름다운 별이 졌다. 김근태의 깃발이 내려지고 수천수백만의 가슴 속에 해방의 횃불이 타오를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김근태 그의 이름을 민주주의 역사의 심장에 새긴다”고 고인을 추모했다.

 

원혜영 민주통합당 공동대표는 김 고문의 별세소식을 접한 후 “혹독한 고문으로 자신의 몸에는 몹쓸 병마가 심어졌지만 이 땅에는 선배님의 피와 눈물로 민주주의가 뿌려졌고 싹텄다”고 애도했다.

 

경기고 61학번 3인방으로 불렸던 손학규 전 민주통합당 전 대표도 빈소를 찾아 끝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손 전 대표는 “김근태라는 친구를 가진 것이 참 자랑스러웠다. 친구라기보다는 마음의 스승이었다”고 언급한 뒤 “올곧은 마음, 민주주의에 대한 뜨거운 열정, 항상 어려운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남북이 하나 되는 것을 먼저 생각했던 너무 큰 사람을 잃었다”며 김 상임고문의 죽음을 애도했다.

 

과거 김 상임고문과 민청학련 활동을 함께한 이재오 의원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김근태 선생 끝내 일어나지 못하셨군요. 어젯밤 선생의 투혼을 봤습니다. 비록 삶의 마지막 의지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생의 마지막 끈을 놓지 않으려는 선생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임종이 임박했음을 직감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지난날 그토록 갈망하던 민주화는 아직 속속들이 정착되지 않았고 온몸으로 외쳤던 통일은 아직 감이 잡히지 않고 있습니다”라며 김 상임고문의 죽음을 애도하고 민주화 과정 속에서 그의 활동을 기렸다.


순탄하지 않았던 김근태의 삶

 

김근태 상임고문은 ‘민주화의 대부’로 통한다. 1971년 박정희 정권 부정선거 파동 반대활동, 교련 데모에 적극 참여했고, 서울대 내란음모사건으로 수배를 당한다.

 

여러 차례의 수배로 도피생활을 했던 그는 1977년 8월 인천 부평의 봉제공장에 위장취업 중이던 인재근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인재근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초대 총무를 지내는 등 김 상임고문에게 있어서는 아내이자 영원한 민주화 동지였다.

 

이후 민청련사건과 전민련 활동을 이어오면서 수배와 투옥을 되풀이 했고, 이 과정에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모진 고문을 겪어야만 했다. 이로 인한 후유증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당시 고문기술자였던 이근안씨는 1월 [일요서울]과의 인터뷰에서 “솔직히 정말 그릇이 큰 양반이라고 느꼈다”면서 “이후 김근태씨가 내 특별사면을 건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면은 불발됐지만 차라리 형기를 모두 채우고 출소한 게 다행이었다. 마음의 짐을 하나라도 덜은 셈이다”고 밝힌바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고문기술자로 부르는 것에 대해 “굳이 기술자라는 호칭을 붙여야 한다면 ‘심문 기술자’가 맞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심문도 하나의 ‘예술’이다”라고 말해 그가 진정으로 뉘우치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일면서 국민적인 비판을 받았다.

 

김 상임고문은 이근안씨를 용서했지만 결국 그가 저지른 고문으로 인해 평생 후유증을 안고 갈 수밖에 없었다.


항상 통 큰 결단 내리던 김근태

 

1995년 민주당 부총재로 정치활동을 시작한 뒤 이듬해 15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서울 도봉갑에서 내리 3선을 했다.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을 지냈으며, 참여정부 시절 보건복지부 장관과 열린우리당 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정치권에 입문하기는 했지만 그의 행동은 이전과 결코 다르지 않았다. 소탈한 성격과 함께 약자를 따뜻하게 품어주는 그의 성품으로 인해 그를 따르는 이들이 많았다. 소위 ‘486 세대’라고 불리는 운동권 후배들이 그를 보좌하고 흠모했다.

 

평소 계파를 멀리했던 김 고문이지만 그의 진보적 가치와 이념을 공유하고 따르는 이들이 모이면서 열린우리당 시절 GT계(김근태계)가 형성되기도 했다. 이인영 전 최고위원은 ‘리틀GT’로 불릴 만큼 김 고문의 핵심측근 중 한사람이다.

 

김 상임고문은 자신에게 무척이나 철저한 인물이었다. 200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권노갑 고문에게 2000만 원을 받은 것을 시인하고, 2억4000만 원을 선관위 신고에서 누락했다고 양심고백을 하기도 했다.

 

또한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동지적 관계를 유지했고, 보건복지부 장관 등을 역임할 당시에는 원칙을 강조함과 동시에 개혁성과 진정성을 갖춘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많은 이들로부터 지지를 얻었다.


마지막까지도 놓지 않은 대통합

 

김 상임고문은 지난 10월 18일 자신의 인터넷 블로그에 ‘2012년을 점령하라’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왜 월가점령시위에 전 세계가 공감하는 것일까. 보이지 않는 손으로 상징되는 1%에 대한 99%의 분노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운 좋게도 2012년에는 우리에게도 점령의 기회가 두 번이나 있다”며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정권교체를 위해서는 야권이 뭉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그는 그 기회를 끝내 보지 못하고 ‘살아있는 자들’에게 마지막 유지를 남긴 채 우리의 곁을 떠났다.

 

김 상임고문은 의원이나 장관보다는 ‘선배’로 통했을 만큼 친근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이제 ‘김근태’란 이름을 다시는 부를 수 없게 됐지만 그가 씨앗이 되었던 민주주의의 역사는 시대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우리의 가슴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정찬대 기자> mincho@ilyoseoul.co.kr

<전수영 기자> jun6182@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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