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하는 보이스 피싱


[일요서울|최은서 기자] 2006년 최초 신고가 발생한 보이스 피싱(전화금융사기)이 조직화·기업화돼 가고 있는 가운데 수법 또한 날이 갈수록 교묘해지고 있다. ‘피싱 대상’에 대한 구체적 정보까지 파악한 뒤 접근 하는 등 치밀한데다 피싱 수법도 끝없이 변하고 있다. 이처럼 하루가 다르게 진화해 가고 있는 보이스 피싱의 검은 손길이 10대 학생들에게 뻗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등학생들이 돈을 받고 보이스 피싱에 활용될 대포통장 70여 매를 발급받아 필리핀으로 넘기다 경찰에 붙잡힌 것. 하지만 경찰은 학생들에게 대포 통장을 개설하도록 사주한 보이스 피싱 일당의 위조책 신원과 관련해 이렇다 할 실마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고교생들 이용해 위조학생증으로 대포통장 발급
국제택배로 발송된 위조학생증 세관에 발각돼 덜미

▲ 뉴시스

지난해 12월 14일 인천 부평구 부안동 문화의 거리를 걷고 있던 정모(17)양에게 40대 남성 A씨가 접근했다. 이 남성은 “대포 통장을 만드는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겠느냐”며 “통장과 체크카드를 만들어주면 건당 5만 원을 주겠다”라고 정양에게 은밀히 제의했다. 그는 “아르바이트를 할 생각이 있으면 이 번호로 연락 달라”며 휴대폰 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정양에게 건네줬다.

건당 5만 원에 솔깃

일주일이 지난 뒤 정양은 자신의 남자친구인 김모(17)군에게 ‘통장과 체크카드를 만들어주면 건당 5만 원을 주는 아르바이트가 있다’는 문자와 A씨 연락처를 보내 ‘대포통장 아르바이트’를 소개했다.

귀가 솔깃해진 김군은 A씨에게 전화를 걸어 “이 일은 어떻게 하는거냐”며 관심을 드러냈다. A씨는 “교복을 입고 안경을 쓴 채로 증명사진을 찍어서 이메일로 보내 달라”며 이메일 주소를 알려줬다. 김군은 A씨의 요구대로 증명사진을 찍어 A씨 이메일로 곧바로 보냈다.

A씨는 김군이 보낸 증명사진으로 위조 학생증 여러 개를 만들었다. 학생증 사진은 김군의 것으로 동일했지만, 인적 정보는 학생증마다 달랐다. A씨가 자신이 미리 확보한 학생들의 인적 정보로 김군 사진을 이용해 서울 소재 고등학교 학생 명의의 위조 학생증을 여러 개 만든 것. 경찰 관계자는 “아직 위조책 A씨를 잡지 못해 학생들의 인적 정보 유입경로는 파악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김군이 증명사진을 보낸 다음날 A씨는 퀵서비스로 위조 학생증을 김군에게 전달하고 대포통장을 만들 것을 지시했다. A씨는 “오늘 3시 화곡역 1번 출구에서 퀵서비스로 학생증을 받은 뒤 통장과 인터넷뱅킹, 체크카드를 만들어라”고 했다. 그는 또 “비밀번호는 08**, 6자리 비밀번호는 0008**, ID는 김○○이면 KIM9407(생년월일)로 만들어라”며 미리 정해 둔 비밀번호와 아이디를 일러줬다.

김군은 위조한 학생증으로 은행에서 통장 3개를 발급 받고 A씨에게 전화를 걸어 계좌번호를 알려줬다. A씨는 3개의 계좌 가운데 하나의 계좌로 20만 원을 입금해 줬다. 이후 A씨는 “화곡역 1번 출구에서 퀵서비스로 통장을 보내라”고 했다. 경찰 관계자는 “A씨는 금융기관이 신원확인을 제대로 하지 않고 통장을 개설해주는 허점을 이용했다”고 밝혔다.

학생 이용한 신종수법

김군은 며칠 뒤 친구 최모(17)군과 인터넷 메신저로 대화하다 “통장을 만들어주기만 하면 돈을 주는 아르바이트가 있다”며 이 아르바이트를 소개했다. 이후 김군은 최군 등 4명과 함께 같은 방법으로 학생증 217매를 위조하고, 위조한 학생증으로 대포통장 70여 개를 은행 등 금융기관으로부터 발급받았다.

김군 등은 대포통장 70여 개를 A씨가 지정해 준 필리핀 주소로 발송해주고 350여만 원을 받아 챙겼다. 이들은 이 돈 대부분을 여관비, 찜질방비, 식사비, PC방비 등 생활비 등으로 사용했다. 경찰관계자는 “김군 등은 자신들이 만든 대포통장이 보이스 피싱 등에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전했다.

김군 등은 지난 14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89개의 위조 학생증이 국제택배로 발송된 것을 발견한 김포세관이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면서 덜미가 잡혔다. 경찰이 택배 수취 장소인 지하철 출구에서 위조된 학생증을 받으러 나온 최군을 검거하고 인근 PC방에서 김군 등을 차례로 검거했다.

경찰 관계자는 “초기 단계에서는 학생과 접촉해 2~3건 정도의 학생증을 위조하고, 범행 가담자 구축이 완료되면 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필리핀에서 다량의 학생증을 위조했다”며 “노숙자를 이용한 대포통장 개설하던 기존의 수법에서 진화해 학생이나 자퇴생을 이용해 대포 통장을 개설한 신종 수법이다”라고 말했다. 경찰은 본인이 발급받지 않는 통장에 대해 부정계좌로 등록하도록 통보하고, 대포통장으로 발급된 것으로 확인된 계좌에 대해서는 직접 부정계좌로 등록했다.

한편 경찰은 신원이 확보되지 않은 A씨 검거에 주력하는 한편, 명의가 도용된 피해자 명의로 발급된 대포통장에 대한 거래내역을 확보해 추가 범죄를 수사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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