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오 살리고 나머지 다 쳐낸다

▲ 5일 오전 국회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실에서 열린 비상대책회의에서 박근혜 위원장이 2차공천관련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서울=뉴시스>

새누리당이 2월 27일 1차 공천자 명단과 전략공천 지역을 발표하자 친이계 내부가 술렁이고 있다. 겉으로는 친이계 좌장격인 이재오 의원을 공천하면서 ‘화합’하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실제는 ‘친이계 공천학살’의 전주곡이었다는 것이 당 안팎의 대체적인 시각이기 때문이다. 1차 공천 결과를 두고 벌어진 김종인 비대위원 등 비대위와 공천위 갈등 양상도 결국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분석까지 나온다.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친이계를 몰살시키겠다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공천학살 징후 곳곳 ‘감지’

박근혜 위원장은 비대위 출범 초기부터 “국민이 행복하지 않은데 국가의 성장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며 “국민 행복이 곧 국가경쟁력이 되도록 정책 패러다임을 바꾸겠다. (현정부와) 인위적 결별이 아니라 그런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MB노믹스로 대변되는 성장주의 정책을 용도폐기하고 복지, 경제민주화 등을 내세우며 차별화를 꾀했다.
박 위원장은 지난달 15일 정당대표 라디오 연설을 통해서도 “저와 새누리당, 잘못된 과거와는 깨끗이 단절하고 성큼성큼 미래로 나가겠다”며 “새누리당은 이번 총선을 정치·정책 쇄신의 출발점으로 삼으려 한다”고 이명박 정부와의 선긋기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또한, 박 위원장은 지난달 28일 있었던 ‘핵안보정상회의 기념국제학술회의’ 기조연설에서 “7·4 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6·15 및 10·4 선언을 꿰뚫는 기본 정신은 서로 상대방을 인정하고 함께 평화를 만들어가자는 것”이라며 “저와 새누리당은 남북한이 ‘상호존중과 인정’의 정신을 확고하게 지켜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고 MB정부의 대북정책과 차별화할 것임을 공표했다.
이처럼 박 위원장은 ‘정책 차별화’를 통한 쇄신을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박 위원장과 세종시 문제나 동남권 신공항 등 주요 국책사업에서 확연히 입장차가 갈렸던 친이계가 달라진 새누리당과 함께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우회적 표현으로도 받아들여진다. 현 정부 실세로 통했던 MB 측근들 역시 ‘박근혜식 쇄신기조’와 분명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김종인 사퇴 배수진? ‘친이 공천학살’ 예고편

하지만, 박 위원장은 이재오 의원이 포함된 1차 공천안에 대해 “공천위의 결정 사항이라 누가 자의적으로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부분”이라며 당의 ‘화합’을 바란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박 위원장이 정책적인 차별화에 방점을 찍으면서도 ‘화합’에 중점을 두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김종인, 이상돈 비대위원 등은 ‘MB정권실세 용퇴론’을 강력 주장하면서 ‘친이계 공천학살’을 암시해 왔었다.
김종인 위원은 1차 공천안에 대해 “기본적으로 공천의 방향을 잘못 잡은 것 같다”고 직격탄을 날리면서 “박근혜 위원장의 태도가 모호하다”고 비판, ‘사의 표명’이라는 배수진을 쳤다.
김 위원의 사퇴 배수진은 ‘공천위-비대위’ 갈등설로까지 비화되면서 박 위원장의 리더십 문제가 불거질 수도 있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위원장은 2월 29일 충북 청주를 방문한 자리에서 김 위원 사퇴를 만류할 것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잘 될 것”이라고 의연한 태도를 보이면서, 이미 김 위원과 사전조율을 마친 상태임을 강력 시사했다. 이와 관련, 박 위원장과 김 위원은 이날 오전 직접 통화를 하며 깊은 얘기를 나눈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발 더 나아가 박 위원장은 “김종인 비대위원님께서 좋은 정강정책을 만들어 그것을 제대로 실천할 사람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이 아주 중요한 말씀이고 거기에 공감을 하고 있다”며 “그런 방향으로 후보들을 추천하면 잘 해나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김 비대위원에 대한 전폭적 지지 입장을 밝혔다.
‘제대로 실천할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은 향후 공천 과정에서 ‘경제민주화’에 앞장설 개혁 성향의 외부 인사들을 전면 배치할 것임을 시사하는 한편, 과거(MB정부)와의 단절을 뜻하는 것으로 친이계 대거 낙천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김종인 위원은 지난 1일 위원들과의 만찬회동을 마치고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나는 화합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화합하자는 건 옛날로 돌아가자는 것”이라고 강경 입장을 재천명하면서 ‘쇄신 공천’에 무게를 둘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와 관련,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김종인 비대위원이 ‘사퇴 카드’를 쓰면서까지 하는 말이 결국은 박근혜 위원장이 하고 싶은 말인 것 같다”며 “친이계를 상대로 한 사람(김종인)은 협박하고 한 사람(박근혜)은 달래고 있는 모양새”라고 꼬집었다. 
김창권 한길리서치 대표도 “(김종인 사퇴 카드는) 향후 공천과정에서 친이계를 치겠다는 시그널을 내보인 것”이라고 분석했다.

공천 확정 21곳 중 친이계는 5명 불과

새누리당이 1차 공천을 확정한 21곳을 살펴봐도 친이계 인사는 이재오 의원(서울 은평을)을 포함해 전재희(경기 광명을), 차명진(부천 소사), 윤진식(충북 충주), 정운천(전주 완산을) 등 5명 정도에 불과하다. 또한, 주목할 점은 이들 지역 모두 단수후보 신청 지역이었다는 점이다.
향후 공천과정에서는 친이계나 MB측근들에게 순순히 공천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분위기가 감지되기도 한다.
친박계 한 의원은 “이들은 친이계 핵심이기도 하지만 지역구에서 경쟁자가 없는 ‘강한 후보’이기도 했다”며 “이들을 살려주는 대신 경쟁 후보가 있는 다른 친이계 의원들을 대거 잘라낼 것이라는 얘기는 여전히 있다”고 말했다.
친이계 의원들 사이에 공천학살 위기감이 증폭되면서 MB 측근들도 낙천 공포에 휩싸이고 있다.
친이계를 비롯한 MB측근들은 ‘이재오 의원만 살리고 나머지 친이 진영은 모두 탈락시키려 하는 것 아니냐’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다.
신율 교수는 “친박계인 이혜훈 의원의 지역구(서초갑)를 전략지역으로 선정하면서 우리 쪽(친박)도 날릴 수 있다는 명분 쌓기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며 “결국 향후 공천 과정에서 친이계가 대거 탈락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 교수는 이어 “수장(이재오)을 잘라내면 집단 탈당 등 단체행동의 위험부담이 커 이재오 의원에게는 공천을 줬지만 결국 친이계나 MB측근 그룹이 총선에서 살아남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에 따라 이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이동관 전 청와대 홍보수석(서울 종로)과 박형준 전 정무수석(부산 수영) 등이 우선 배제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다. 현 정부 초대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텃밭인 서울 강남을에 공천을 신청한 정동기 전 수석도 탈락이 예상된다.
‘왕차관’으로 불린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2차관(대구 중남구), 인수위 시절부터 박영준 전 차관과 인선 작업을 함께한 이상휘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경북 포항북), MB 대선캠프 외곽조직을 이끌었던 김대식 전 국민권익위 부위원장(부산 사상), 이성권 전 시민사회비서관(부산 부산진을), 김형준 전 춘추관장(부산 사하갑), 김희정 전 청와대 대변인(부산 연제) 등도 영남권 물갈이 여파와 맞물려 위태로운 상황이다.
그 밖에, 김연광 전 정무1비서관(인천 부평을), 정문헌 전 통일비서관(강원 속초·고성·양양), 이태규 전 연설기록비서관(경기 고양일산서) 등도 출사표를 던졌지만, 공천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친이계와 MB측근들은 공천보복 가능성이 현실화됨에 따라 집단 무소속 출마를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공천학살에 반발, ‘무소속 연대’ 움직임

안상수 전 대표는 자신의 지역구인 경기 의왕·과천이 전략지역으로 지정된 것에 대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불공정 공천시 중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주민들이 ‘전국적으로 무소속 연대를 만들어서 한 번 해봐라’고 한다면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을 것”이라고 ‘친이 무소속 연대’로 총선을 치를 수도 있음을 경고했다.
MB 측근 이동관 전 수석도 “당이 다른 후보로 전략공천한다면 무소속으로라도 출마할 것”이라고 배수진을 쳐 놓고 있다.
영남권 출마를 희망하는 MB측근 인사들도 무소속 출마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부산의 한 예비후보는 기자와 통화에서 “공심위에 있는 친박 핵심인사가 지역민들을 만나 ‘친이계는 전원 공천 탈락시킬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닌다”면서 “공정한 공천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주변 예비후보들과 함께 집단 무소속 출마도 불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렇듯 실제 공천에서 탈락한 친이계가 ‘무소속 연대’를 조직적으로 결성해 총선에 나설 경우 전체 선거 판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줄 전망이다.
특히 이른바 ‘박세일 신당’으로 불리는 ‘국민생각’이 독자 후보를 배출한 가운데, 친이계 중심의 무소속 연대까지 뜰 경우 보수 지지표가 분산돼 여권에 악재로 작용할 전망이다.

<조기성 기자> kscho@ilyoseoul.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