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4일은 영국의 ‘타이타닉‘호 여객선이 북대서양 뉴파운드랜드의 그랜드뱅크 남단 150km 해상에서 침몰한지 꼭 백주년이 되는 날이다.

타이타닉은 4만6000t 급으로 당시 최대 규모 여객선이었다. 관광객과 미국 이민자들을 태우고 영국 사우스햄튼을 떠나 뉴욕으로 가던 처녀 항해였다.

1912년 4월 14일 밤 11시 40분 타이타닉은 22노트로 항해하던 중 빙하를 들이받았다. 우측이 100m나 찢겨져 나갔고 방수격실(防水隔室) 16개들 중 5개가 파열, 두 시간 반 만인 15일 새벽 2시 20분 완전 침몰했다. 2224명 중 1513명이 사망했다. 희생자가 많았던 이유는 배가 삽시간에 가라앉은 데다 구명정은 2224 승객의 절반인 1178명 분 밖에 없었다. 32km 밖에는 여객선이 있었으나 구조를 요청할 라디오 통신사도 승선하지 않았다.

타이타닉은 침몰하는 과정에서 반듯한 노블레스 오블리쥬(높은 신분에 맞는 도덕적 의무)와 인간의 숭고한 가족 사랑을 보여준 스토리를 남겼다.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은 최후 순간 까지 승객들의 탈출을 이끌었다. 그는 자신이 서 있는 선교(船橋)가 바닷물에 잠겨가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메가폰을 통해 아우성치는 승객들에게 “영국인답게 행동하라”며 질서정연한 탈출을 지휘했다. 그리고 그는 갑판위에 서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 했다.

지난 1월 13일 밤 지중해에서 한 여객선이 전복됐다. 그러나 선장이 먼저 도망쳐 꼭 100년 전의 타이타닉 선장과 대조를 이뤘다. 이탈리아 유람선 코스타 콩코르디아는 4229명을 태우고 이탈리아의 북서 토스카나 제도의 얕은 수심을 지나고 있었다. 거기서 암초에 부딪쳐 비스듬히 전복돼 선체의 일부가 물에 잠겼고 35명의 사망과 실종자를 냈다.

당시 프란체스코 셰티노 선장은 그리 급한 상황도 아니었는데 승객들 보다 먼저 구명정을 타고 탈출했다. 그는 법정에서 “사람들을 구명보트에 질서 있게 태우려고 노력했지만 배가 60-70도로 기울어지는 바람에 발을 헛디뎌 내가 보트 위로 떨어졌다”고 둘러댔다.

지난 달에는 타이타닉호에서 한 가장(家長)이 가족을 구명정에 태우고 자신은 배와 함께 최후를 보낸 기록이 공개돼 가슴을 뭉클케 했다. 영국 런던의 일간지 ‘더 타임스’는 남편을 잃은 아내가 써 놓은 기록을 입수, 3월 26일 공개했다. 36세인 아서 웨스트 씨는 미국으로 이민가기 위해 아내 에이더, 큰딸 콘스턴스(5세), 막내 딸 바바라(10개월)와 함께 타이타닉을 탔다. 배가 침몰하자 아서는 두 딸에게 구명조끼를 입힌 후 아내와 구명보트로 달려갔다. 그는 아내와 두 딸을 보트에 밀어 넣고는 객실로 뛰었다. 그리고 그는 따뜻한 우유 한 병을 가져와 밧줄에 묶어 가족이 탄 보트로 내려 보낸 다음 다시 갑판으로 되돌아가 배와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 북대서양 추위에 떨고 있던 가족을 위해 내려 보낸 마지막 선물이었다. 아서는 여성과 노약자를 먼저 돌본다는 조난구조 덕목을 충실히 지키고는 자신의 생명을 던졌다.

부인 에이더는 후에 남편의 마지막 의연한 모습을 글로 남겼다. ‘남편은 우유병을 내게 건네 준 뒤 우리에게 작별인사를 남기고 갑판으로 돌아갔다’며 ‘타이타닉이 가라않는 순간 구명보트에 올랐던 일부 남자 승객들은 두려움에 질려 여자들의 치마 밑에 숨기까지 했지만, 남편은 1500여 명의 다른 승객들과 함께 용기있는 죽음을 맞았다’고 적었다.

우리 주변에는 위험에서 혼자 살아남기 위해 셰티노 선장과 같이 먼저 도망치거나 여자 치마 밑에 숨는 비굴한 남자들이 없지 않다. 그래서 100년 전 잔인한 달 4월 보여 준 스미스 선장의 노블레스 오블리쥬 그리고 아서의 숭고한 가족 사랑을 새삼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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