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파일 판도라상자 열릴까.”검찰이 안기부(현 국정원) 도청파일에 등장한 유명인사들의 명단 공개를 적극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파문을 예고하고 있다. 명단공개는 베일에 가려져 있는 도청내용 공개를 촉발하는 매개 역할을 할 것이고, 이는 궁극적으로 거대한 도청 판도라상자를 여는 핵심 키가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명단에는 이미 공개된 거물급 정치인과 재계 유명인사뿐 아니라 전직 대통령을 포함해 정계 관계 재계 언론계 등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대거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정국을 또 한차례 폭풍속으로 몰아넣을 것으로 관측된다. 검찰 주변에서는 벌써부터 ‘도청명단’이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 김종빈 전 총장 사퇴이후 격앙된 검찰은 유력 정치인들이 대거 포함된 도청 사건을 발본색원할 의지를 다지고 있다. 총장 사퇴 후폭풍과 맞물려 도청명단 뇌관이 정치권 핫이슈로 부상하고 있는 형국이다.검찰은 ‘법이 허용하는 범위’와 ‘국민이 알아야 할 부분’이라고 단서 조항을 달았지만 과거 정보기관이 도청한 유명인사들의 명단을 공개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시기 및 최종 공개 대상자 선정 작업만 남았을 뿐 ‘공개’ 의지가 강한 분위기다.검찰은 공운영 전 미림팀장 자택에서 압수한 274개 도청테이프 내용분석을 이미 끝마쳤고, DJ정부 시절 국정원이 도청한 정·관·재계 인사들에 대한 내사도 본격화하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도청수사팀은 DJ정부 시절 국정원 차장을 지낸 김은성씨를 전격 구속한데 이어 17일에는 초대 국정원장을 지낸 이종찬씨를 소환했다. 또 임동원·신건 전 국정원장도 조만간 소환 조사할 방침이다.

YS시절 대권주자도 명단 포함

이처럼 검찰이 도청수사에 박차를 가하면서 명단 공개 의지를 내비치자 정치권은 바짝 긴장하며 검찰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특히 그 대상자로 거론되고 있는 거물급 인사들은 위법성 여부를 떠나 도덕적 타격을 우려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그렇다면 검찰이 확보한 도청명단 및 공개 리스트는 누구일까. 97년 대선 직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안기부 X파일’ 문건과 2002년 한나라당 의원들이 신건 당시 국정원장을 상대로 제출한 고소장 등에 등장한 유력 인사들이 그 대상이 될 것이란 분석에 무게감이 실리고 있다. 검찰이 확보한 도청 대상 명단에는 홍석현 전 중앙일보 회장과 이학수 삼성그룹 부회장이 나눈 녹취록에 등장하는 DJ와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등 당시 대권주자들을 포함해 아직 공개되지 않은 거물급 인사들이 대거 포함돼 있다.

실제로 <일요서울>이 입수한 홍-이 녹취록에만 정·관·재계 등 유명인사 38명이 등장한다. DJ와 이 전총재 외에 또다른 대권 예비주자였던 A씨와 B씨는 삼성측에 각각 10억원과 3억원을 요구했던 것으로 드러나 파문이 예상된다. 특히 3억원을 요구했던 B씨의 경우 3억원을 추가로 요구한 것으로 적시돼 있어 그 전에도 삼성측으로부터 적지 않은 정치자금을 제공받았을 것이란 의혹을 사고 있다. 하지만 삼성측이 이들 두 사람이 요구한 정치자금을 건넸는지 여부는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다.이 전총재의 동생인 이회성씨와 서상목 전 한나라당 의원은 정치자금 및 정보교환 등을 위해 삼성측 고위인사들과 자주 접촉했던 대표적인 정계 인사로 분류되고 있다. 검찰과 정치권 관계자들도 이 전총재의 두터운 신뢰를 받았던 이 두 사람이 정치자금 등에 깊숙이 개입돼 있었을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중앙일보 편집국장 출신인 한나라당 K의원은 삼성과 이 전총재측 사이에서 막후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문건은 적시하고 있다. 또 DJ의 핵심측근인 K 전의원과 이 전총재의 측근인 S 전의원도 정치자금 문제와 관련해 조연으로 등장한다. 재계 인사 중에는 이건희 삼성그룹회장과 이학수 부회장이 대표적이지만 공개되지 않은 거물급도 적지 않다. K그룹 K 전회장과 M사 L회장, K사 고문을 역임한 S씨가 대표적이다. ‘안기부 X파일’ 사건과 관련해 검찰의 칼날이 삼성을 정조준하자 삼성측이 “왜 우리만 가지고 그러냐”며 볼멘 소리를 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관계인사 중에도 거물급이 대거 포함돼 있다.

전직 총리를 역임한 L씨와 또다른 L씨, J씨, 부총리를 지낸 K씨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거물급 관계 인사중 두 세 사람은 당시 대권주자 하마평에 오르내릴 정도로 대중적 인지도를 확보하고 있었다. L씨의 경우 삼성측이 그가 이번에 대선후보가 안되더라도 차기 정권을 기약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던 정황이 문건 곳곳에 묻어 있을 정도다. YS의 측근이자 정부 고위직 출신인 K씨는 모 기업으로부터 수억원대의 뇌물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논란의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장관급인 K씨와 L씨도 등장하는데 L씨는 당시 수사당국으로부터 내사를 받고 있던 상황인 것으로 적시돼 있다.

DJ시절 재계 핵심인사 대상

DJ정부 시절에도 도·감청이 이뤄진 것으로 검찰 수사 과정에서 드러남에 따라 당시 유력 정치인 등 상당수 정·재계 거물급들이 도청 대상에 포함됐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실제로 검찰이 국정원 직원 자택에서 입수한 녹음테이프에는 DJ정부 초대 국정원장을 지낸 이종찬씨도 도청 대상이 됐던 것으로 드러났다.또 DJ정부 핵심 실세로 통했던 권노갑 전 고문도 도청당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어 현직 대통령을 제외한 상당수 거물급들이 도청 대상에 포함됐을 것이란 관측에 무게감이 실리고 있다. 한나라당 김재경 의원은 11일 법무부 국정감사에서 “2002년 2월 권노갑씨가 언론사 간부 4명과 나눈 대화 내용을 녹취한 녹취록이 있다는 것을 사정기관 관계자에게서 들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구속된 김은성 전 차장도 검찰 조사에서 2000년 당시 권 전고문의 퇴진을 주장했던 민주당 소장파 의원들을 도청 대상으로 삼았다고 진술하기도 했다.검찰은 또 국정원이 현대그룹의 후계구도를 둘러싼 형제간 경영권 다툼이 벌어지던 2000년 3~11월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 등 현대가 사람들과 관련 경제인들의 통화내용을 도청했다는 사실을 최근 밝혀냈다. 검찰이 김은성씨와 감청부서인 과학보안국 K 전국장으로부터 진술 받은 내용에 따르면 당시 주요 도청 대상은 정 전명예회장을 비롯한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 가신그룹인 이익치(당시 현대증권 회장)·김윤규(당시 현대건설 사장)·김재수(당시 구조조정위원장) 등 현대그룹 핵심인사들이 대거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DJ측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DJ정부 시절에도 정권 차원의 조직적인 정치사찰이 진행됐음을 뒷받침하는 정황들이다.지난 2002년 대선 직전 한나라당이 폭로했던 도청문건도 검찰 수사 과정에서 일부 사실로 확인되면서 문건 내용과 도청 대상자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다.

<일요서울>이 당시 입수한 문건에는 여야를 망라한 정치인과 관계 재계 언론계 인사들이 도청 명단에 올라 있다. 문건에는 2002년 당시 여야를 망라한 정치권 주요 인사간, 정치인과 언론인간의 통화 내용이 날짜별로 자세히 적시돼 있다. 한나라당은 이러한 문건 내용을 바탕으로 2002년 12월 이부영 의원 외 18명의 현역의원들이 연대서명해 당시 신건 국정원장을 통신비밀보호법 및 국가정보원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소하기도 했다.이처럼 YS·DJ정부 시절에 자행됐던 불법 도·감청 의혹이 검찰 수사 결과 일부 사실로 드러남에 따라 그동안 문건과 녹취록 등에 등장한 도청 대상자들의 대화 내용도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검찰이 강한 의지를 가지고 도청 대상자 명단 공개를 검토하고 있는 것도 도청과 관련한 각종 의혹을 뒷받침할 증거를 확보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검찰발 도청뇌관이 새롭게 터질지 정·관·재계의 이목이 검찰에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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