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장관으로서 수사지휘권을 행사하겠다.” “부당한 수사개입은 거부한다.” ‘뜨거운 감자’ 안기부 도청 X파일 ‘수사 지휘권’을 두고 천정배 법무부 장관과 김종빈 검찰총장이 정면 충돌할 조짐이다. 대상그룹, 도청 ‘X파일’ 수사 등 검찰의 소극적인 수사 의지가 천 장관을 자극시킨 것이라는 해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천 장관의 수사 지휘권 행사 여부와 상관없이 1라운드는 천 장관이 승리한 것으로 보인다. 삼성으로부터 ‘떡값’을 받은 전현직 검사들의 실명 공개에 이어, 경찰이 수사하고 있는 브로커의 ‘관리수첩’에도 전현직 검사들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는 입장에서 김 총장은 “비합리적인 부분 승복 불가”라는 원칙론으로 불만을 대신했을 뿐이다. 각종 권력형 비리에 휩싸인 검찰내 인사 폭도 커질 것으로 관측돼 ‘실세 장관’천 장관의 검찰 장악력도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김 총장은 이대로 주저앉을 것인가.

1라운드 천 장관 승리

대 검찰 선전포고는 이렇게 시작됐다. 천 장관은 지난 18일 “단호한 검찰권 행사를 위한 지휘·감독 차원에서 필요하다면 구체적인 사건에도 지휘권을 행사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그는 또 “사회적으로 이목을 끄는 중요 사건이나, 거대권력이 관련된 구조적 비리 사건에는 참고인중지, 기소중지와 같은 중간처분을 포함해 각 사건처리 단계별로 법무부 장관에게 미리 보고하는 체계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천 장관이 ‘수사 지휘권’을 강조하며 그 이유로 내세운 사건은 대상그룹 임창욱 명예회장건이다. 검찰이 ‘감찰 불가’로 판단한 대상그룹 비자금 사건에 대해 천 장관은 ‘봐주기 수사’라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법무부와 검찰의 1라운드는 천 장관쪽에 승리의 기운이 감돈다. 김 총장이 지난 19일 “총장은 지휘가 내려와도 비합리적인 부분까지 승복할 이유는 없다”고 ‘원칙론’을 들어 천 장관 발언에 반박했으나, 검찰을 둘러싼 사건이 잇달아 터지고 있어 당분간은 원칙론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란 분석이다.

지난 18일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이 도청 ‘X파일’을 전격 공개, 삼성으로부터 떡값을 받은 7명의 전현직 검사들의 ‘실명’이 노출됐다. 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김상희 법무 차관은 사표를 제출한 상태다. X파일 파문이 검찰로 향하고 있는 가운데, 경찰에서 수사 중인 브로커의 ‘관리수첩’에 전현직 검사들의 이름도 오르내리고 있다. “억울하다”며 사의를 제출한 김 차관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후속 인사를 단행하게 된다면 일부 검사장급 인사가 불가피해 천 장관에게 힘이 실릴 것이란 분석이다. 기강 확립 차원에서 인사가 단행될 것이란 얘기다. 특히 김 차관과 함께 X파일에 실명이 거론된 홍석조 광주고검장도 사표를 제출할 경우 인사 폭은 더 커질 것이라는 관측이다. 또한 대상그룹 첫 수사팀과 지휘 계통에 있었던 이종백 서울중앙지검장(당시 인천지검장)에 대한 인책성 인사도 기다리고 있다.

‘실세 장관’ 급부상중

법무부 장관의 수사 지휘권 행사 여부와 상관없이 파문은 천 장관의 검찰 장악력을 높여주는 계기가 돼 준 것이다. 비리 사건에 휘말리고 있는 검찰 입장에선 돌파구를 찾기가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이에 천 장관의 발언 배경에 정치권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특히 천 장관이 여권내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라는 점에서도 수사 지휘권 발언이 심상치 않다는 정치권의 해석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천 장관이 각별한 사이라는 점에서 청와대와의 ‘사전 교감설’도 등장했다. 천 장관은 현역 정치인 중 노 대통령의 복심을 가장 잘 읽어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사로 꼽히고 있다. 그는 지난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후보 경선에서 가장 먼저 노무현 캠프에 합류한 현역 의원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연을 이유로 노 대통령은 후보 시절 “끝까지 갈 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천정배”라고 말했으며, 이 발언은 ‘천정배 대망론’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민주당 분당 과정에서 ‘천신정’ 트리오가 활약하기 훨씬 이전부터 2007년 대선 전 노 대통령이 천 장관을 대권 주자 반열에 올려놓을 것이란 관측도 우세했다.지난 6월 정치권의 관측은 사실로 이어진 것이다. 천정배 의원은 참여정부 후반기 사법부를 진두지휘할 법무부 장관에 기용됐다. ‘강금실-김승규’로 이어지는 비정치인 발탁의 틀을 깬 인사였을 뿐만 아니라, 올 초까지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를 지낸 천 장관 입장에선 ‘김근태-정동영’ 잠룡들과 함께 대권 수업을 받게 된 것이다. 때문에 ‘청와대-법무부’ 사전 교감설은 더욱 힘을 받고 있다. 후임 인사 단행이 이뤄진다면 천 장관의 검찰 및 법무부 조직 개혁과 장악이 탄력을 받을 것이란 전망이다. 이른 바 ‘실세 장관’으로 급부상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취임 두 달째를 맞고 있는 천 장관의 법무행정과 검찰사무에 대한 업무파악이 어느 정도 이뤄졌을 것이라는 정치권의 분석이다.

국정원 전면 압수수색

그렇다고 김 총장이 ‘정치인 장관’의 수사 지휘권 위협에 대해 원칙론에서 그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말을 아끼는 김 총장의 성격상 천 장관 발언이 있었던 이튿날 ‘원칙론’을 내세운 이유도 ‘검찰 독립’이라는 무언의 경고라는 해석이다. 노 대통령과 정치적 인연을 함께 한 천 장관이 수사 지휘권을 행사하게 된다면 정권과 검찰의 유착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동시에 검찰 독립은 유명무실해진다. 특히 천 장관 발언 직후 국가정보원에 대한 대대적인 압수수색에 들어간 배경에는 김 총장의 이러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도청 X파일에 대한 그동안의 검찰 수사가 내용과는 무관하게 ‘불법’에만 맞추고 있어 천 장관이 불만을 갖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김 총장은 검사 및 통신전문가를 포함한 국정원 수색 인력을 40여명으로 조직했다. 압수수색의 경우 대부분 수사관들이거나, 1명의 검사만이 투입되는 관례상 김 총장 역시 이례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특히 국정원 불법 도·감청과 관련, 현 정권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음모론에서 출발, 검찰 안팎에서는 김 총장이 어떤 식으로든 천 장관의 수사 지휘권 발언에 반발할 것이라는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 호남 민심 겨냥? - 법조계 수장들 모두 호남 출신

법조계에 호남풍이 거세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이 이용훈 대법원장을 지명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사법·법무·정보·감찰기관 등 법조계의 수장이 모두 호남 출신 인사들로 채워졌다. 이용훈 지명자는 전남 보성 출신이며 윤영철 헌법재판소장은 전북 순창, 김승규 국가정보원장은 전남 광양 출신이다. 천정배 법무부 장관은 전남 목포 출신이며 김종빈 검찰총장은 전남 여천 출신이다. 여기에 전윤철 감사원장도 전남 목포 출신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우연의 일치’라는 여권의 주장은 무색해진다. 호남 출신 인사들이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국정원과 법무부, 검찰을 동시에 장악함으로써 ‘호남 법맥(法脈)’이란 말도 등장했다. 정치권에선 노 대통령이 호남 민심을 잡기 위해 의도적으로 호남 출신을 배려한 게 아니냐는 분석이다. 정치권과 청와대로 눈을 돌릴 경우에도 마찬가지라는 점에서다. 전북 정읍 출신인 김원기 국회의장, 전남 해남 출신인 청와대 김완기 인사수석을 비롯해 이병완 신임 비서실장 역시 전남 장성 출신이다.

참여정부는 민주당 분당 과정을 겪은 이후 ‘호남 홀대론’에 시달려 왔다. 때문에 참여정부 집권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호남 출신들이 중용되는 데는 노 대통령의 정치적 의도가 짙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내년 지방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에서 호남권을 의식한 사전 포석으로 풀이된다는 것. 여권 일각에선 호남 출신 대통령 후보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한 정치적 배려라는 해석도 이어지고 있다. 여권내 유력 잠룡으로 거론되고 있는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천정배 법무부 장관이 이에 해당된다. 그러나 당내 일각에선 2007 대선까지 상당한 시간이 남아 있다며 지금의 사법·법무·정보·감찰기관 최고 수장들의 입김이 대선에 작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어쨌든 권력에 ‘칼’을 휘두를 수 있는 사법·법무·정보·감찰기관의 최고 책임직에 호남 출신 인사들이 대거 기용된 사례는 대한민국 역사상 드문 일이다. 여권내 한 인사는 “호남 출신 대통령인 국민의 정부에서도 지금처럼 호남 인맥이 권력 기관의 최고 책임직을 장악한 시절은 없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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