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 ‘정중동’ 선언… “내가 할 일은 없다”

▲ 박원순 서울시장<사진=정대웅 기자>
[일요서울ㅣ정찬대 기자]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 무소속 안철수 후보의 가교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공개지지 불가입장’을 선언했다. 박 시장은 ‘정중동’을 고집하며 “이번 대선에서 내가 할 일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박 시장의 이 같은 발언에도 정치권은 그의 행보에 주목하고 있다. 지난달 안철수, 문재인 후보와 잇따라 회동을 가진 박 시장은 양측으로부터 직접적인 러브콜을 받고 있다. 그러나 지난해 서울시장 보선에서 두 사람 모두에게 마음의 빚을 졌다는 점에서 결단이 쉽지 않다. 그런 만큼 박 시장의 속앓이도 깊어가고 있다.

‘정치적 동지관계’, 안철수

“문재인과 안철수 중 누가 더 좋으냐고 묻는 건 엄마와 아빠 중 누가 더 좋으냐고 묻는 것과 같다”

박원순 시장이 지난달 17일 시청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문재인-안철수 후보 중 누가 더 좋냐’는 기자들의 물음에 한 말이다. 농담반 진담반이지만 특정 후보를 지지할 수 없는 박 시장의 속내와 고민이 그대로 반영된 답변이다.

박 시장은 안 후보와 문 후보 모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안 후보가 ‘정치적 동지’격이라며, 문 후보와는 ‘정치적 조력자’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10·26재보선 당시 서울시장에 출마한 박 시장은 안 후보의 도움으로 사실상 서울시장에 당선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만큼 안 후보에 대한 마음의 빚도 상당하다.

‘아름다운 양보’를 선택한 안 후보는 아무런 조건 없이 박원순 당시 무소속 후보를 지지했다. 여권의 네거티브 공세로 지지율이 주춤세를 보이고 있을 때는 투표 참여를 호소하는 편지를 공개해 박 시장의 지지율을 지키는데 도움을 줬다. 이후 박 시장과 안 후보는 ‘정치적 동지’라는 별칭이 붙기 시작했다.

지난달 19일 안 후보는 대선 출마 기자회견을 앞두고 박 시장과 비공개 회동을 가졌다. 이날 회동 이후 안 후보가 대선 출마 입장을 굳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적잖은 정치적 멘토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박 시장은 회동 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정치적인 얘기는 일부러라도 나누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정치권에선 자연스레 12월 대선과 단일화에 대한 얘기가 오갔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안 후보의 출마 기자회견이 임박한 상태에서 회동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안 후보 측이 어떤 식으로든 지원을 요청했을 가능성도 높게 점쳐지고 있다.

‘정치적 조력자’, 문재인

박 시장은 문 후보와의 관계도 고려해야 한다. 안 후보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면 문 후보에게는 인간적인 신뢰관계가 돈독하게 형성돼 있다. 지난해 서울시장 보선에 출마할 당시 박 시장은 안 후보와 단일화하기 전 백두대간 종주 중에 문 후보에게 전화해 도움을 요청한 사실이 있다. 이후 문 후보는 선거 유세차를 타고 다니며 박 사장의 선거운동을 지원했다.

문 후보와 박 시장은 사법연수원 12기 동기이며, ‘그남자 문재인’이라는 책까지 공동으로 펴낼 정도로 친분이 두텁다. 박 시장은 또 현재 민주통합당 당적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자당 후보인 문 후보를 돕는 것이 도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난달 26일 박 시장과 문 후보는 비공개 회동을 갖고 당 쇄신과 정치개혁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눴으며, “민주통합당이 새로운 정치의 변화를 이끌어내 국민적 지지를 받는 정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문 후보가 박 시장을 만난 것은 그가 대선 후보로 확정된 이후 처음이다. 특히 안 후보가 대선출마를 선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란 점에서 이날 회동을 둘러싸고 다양한 정치적 해석이 제기됐다.

문 후보는 이 자리에서 안 후보가 단일화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운 정치쇄신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후보를 정점으로 하는 수직적 선대위 체제가 아니라 당과 시민, 정책이 수평적으로 협력하는 네트워크형 선대위를 구성할 것”이라며 “이를 기초로 정치를 쇄신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단일화는 文?…캠프인사는 安?

대선을 앞두고 초미의 관심사는 문재인-안철수 후보의 단일화 여부다. 박 시장은 두 사람 모두와 친분이 두텁다는 점에서 중요 가교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박 시장은 지난 4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어쨌든 안 후보에 대한 지지가 높은 것은 기존의 정치, 정당에 대한 불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며 안 후보를 치켜세으면서도 “그럼에도 정당체제라는 것이 한국 정치의 근간을 이루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정당이 개혁해 국민들을 사로잡아야 한다”며 사실상 민주통합당의 손을 들어주었다.

박 시장은 안 후보의 대선출마 선언과 관련,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문 후보와 경쟁해야하는 상황이니 나로서는 어디 편들기가 쉽진 않다”고 전한 뒤 “선의의 경쟁이 두 분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 후보 측은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박 시장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박 시장은 지난달 15일 안 후보와의 회동 사실을 박지원 원내대표에게 사전에 알렸으며, 만남 뒤에는 이해찬 대표에게 전화해 회담 내용을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안 후보에 캠프에서 활동하고 있는 상당수 인사들은 지난해 박원순 후보 캠프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민주통합당을 탈당하고 안 캠프로 거처를 옮긴 박선숙 본부장은 박원순 캠프에서 선거대책본부장을 지냈으며, 안 후보의 비서실장을 맡고 있는 조광희 변호사는 박원순 캠프의 법률특보를 맡았다.

‘안철수의 입’으로 활약하고 있는 유민영 대변인은 박원순 캠프의 메시지 팀장을 역임했으며, 네거티브 대응팀인 금태섭 변호사는 지난해 박 캠프의 멘토단으로 활동했다. 또한 안 캠프의 공보팀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형민 전 청와대 행정관 역시 박 캠프의 공보특보를 지낸 인물이다.

정연순 공동대변인의 경우 박원순 캠프에서 활동한 경험은 없지만 그의 남편이 박원순 시장이 주도한 총선시민연대 대변인으로 활동하는 등 박 시장과 가깝다. 아울러 안 캠프의 전략커뮤니이션팀에 합류한 정치 컨설턴트 김윤재 변호사는 박 캠프의 선거 전략을 담당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상황이 이러니 일각에선 안 후보가 지난해 박원순 캠프 조직을 그대로 인수해 선거를 치르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오고 있다.

박 시장은 “공무원 신분이라 선거법상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구체적인 지원은 어려운 상태”라며 “시정에만 몰두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문 후보와 안 후보 진영은 박 시장에게 계속해서 ‘구애’를 요청하고 있다.

야권 진영에서 박 시장이 갖고 있는 상징성은 상당하다. 시민사회의 대표격이며, 무소속 후보로 서울시장에 당선됐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시민사회 진영이 약한 문 후보나, 조직이 약한 안 후보에게 박 시장의 도움은 절실하다. 그런 점에서 박 시장의 선택은 정치권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정찬대 기자>minch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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