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출국 배려한 배후세력 있나 >>

강릉 영동대 교비 72억여원 횡령 사건으로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은 정태수(84) 전한보그룹 회장이 법정구속 되지 않고 일본으로 출국한 뒤 소식이 끊어져 해외도피 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서울행정법원은 지난 4월 20일 정 전회장 측 소송대리인이 제출한 출국금지 집행정지 신청에 대해 4월 22일부터 5월 20일까지 한 달간 출국금지 집행을 정지한다며 정 전회장의 신청을 받아 들였다. 정 전회장 측은 당시 한달 반에서 3개월가량 지병을 치료한 뒤 곧바로 입국할 것이라고 법원에 밝혔으나 아직 소식이 없는 상태다.
교비 횡령 사건의 재판을 담당하고 있는 서울고등법원 형사 3부(재판장 심상철)는 정 전회장이 약속한 치료 기간이 지났음에도 귀국하지 않고 있는 점을 들어 그의 귀국 가능성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와 관련, 일부에서는 외부세력 개입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고 수군거리고 있다.
정 전회장은 과연 세간에 떠도는 소문대로 해외 도피한 것일까. 정 전회장의 미스터리한 출국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지 그 의문을 따라가 보자.


정경유착의 대표적 인물로 꼽히는 정 전회장은 97년 한보철강 부도 당시 과세된 세금을 납부하지 못해 출입국관리법에 따라 출국이 금지됐다.

지난해 국세청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정 전회장은 2127억원의 세금을 장기 체납하면서 3년 연속 고액 체납자 1위에 올랐다. 정 전회장의 세금 체납액은 지난해 2493억원에서 2127억원으로 366억원이 줄었다.

이처럼 천문학적인 액수의 세금을 포탈한데 이어 현재 형사재판 1심에서 유죄가 선고된 정 전회장이 어떻게 해외로 나갈 수 있었을까.

정 전회장은 현재 지병을 이유로 일본 모 병원에서 치료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실제로 해당 병원에서 치료중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정 전회장의 변호인조차 이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다.


정 전회장 소식 아무도 몰라

정 전회장의 변론을 담당하고 있는 법무법인 한승의 이우근 변호사는 “정 전회장은 지병으로 일본에서 치료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도 “정 전회장 측과 연락이 잘 되지 않아 현재 치료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정 전회장은 오는 8월 중에는 치료를 끝내고 입국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정 전회장의 행방이 묘연하자 일부에선 “거액의 세금포탈에 대한 추징성이 여전히 남아 있는데다 형사재판 중인 인물이 그처럼 유유히 해외로 빠져나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사례를 보더라도 정 전회장의 도주우려는 충분한데도 출금조치를 정지했다는 것은 어딘가 석연
치 않은 구석이 다분하다”고 의혹의 날을 세우고 있다.

하지만 정 전회장의 출국금지 집행정지 신청을 심리했던 서울행정법원 6부(재판장 전성수)의 박용우 판사는 “재판부의 결정에 있어 외부의 압력 또는 보이지 않는 세력의 개입 등은 추호도 없었다”고 못 박은 뒤 “분명히 정 전회장 변호인 측이 제출한 정확한 근거 자료에 의해 심리를 했고 그에 따라 타당하다는 판단이
내려져 출금 집행을 한 달 간 정지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전회장 건강상태 심각

정 전회장은 일본 병원에서 지병에 대한 진단서와 의사의 소견서 등을 신청 자료로 제출 했으며 오래전부터 일본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 왔다는 증거도 함께 제출했다고 박 판사는 밝혔다.

그러나 이 같은 행정법원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모락모락 피어나는 의혹의 연기는 쉽게 사그러들지 않고 있다. 출국금지 집행정지는 출국기한만 정해져 있을 뿐 입국기한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법적으로 입국지연에 대한 여죄를 물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박 판사도 “출금 정지 조치는 한시적으로 정해진 기한 내에 출입국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입국 강제조항이 없기 때문에 정 전회장의 입국이 늦어진다고 해서 법적으로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고 밝혔다.

다시 말해 정 전회장이 한 달 반에서 3개월간 일본에서 치료한 뒤 돌아오겠다고 했지만 이는 강제이행 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 입국할 것인지 정하는 것은 정 전회장의 결정에 달렸다는 것이다.

또 박 판사는 “정 전회장은 여든살이 넘은 고령일 뿐 아니라 당뇨 합병증에 대장암까지 앓고 있다”며 “그의 출국을 허락한 것은 처벌보다 치료가 선행돼야겠다는 인도적 차원에서 내린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정 전회장을 잘 아는 이들은 그가 한동안 국내로 들어오는 일은 없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정 전회장이 해외에서 제기를 도모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정 전회장은 지난 2004년 4월 카자흐스탄 에너지·지하자원부 블라디미르 슈콜니크 장관으로부터 유전개발 등에 대한 사업협의를 위해 초청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정 전회장의 대리인이었던 한종원 변호사는 이에 대해 “출국금지가 풀릴 경우 장관을 만나 유전시추개발권을 포함한 에너지 개발사업에 관한 협의 등의 준비작업도 벌일 예정"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한편 서울고법은 5월 공판 때 정 전회장의 변호인들에게 정 전회장 불출석에 대해 엄중히 경고했지만 정 전회장은 6월 공판에도 출석하지 않았다.

서울고법은 “변호인들에게 정 전회장이 다음 기일인 8월23일에도 나오지 않을 경우엔 그에 상응하는 조처를 취하겠다는 뜻을 전했다”고 밝혔다.

서울 고법의 한 관계자는 “정 전회장의 출석여부에 대해 알아 봤지만 변호인들도 정 전회장의 귀국 여부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며 “재판은 증인 1명 신문만을 남겨 둔 상태로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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