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진 여성들의 성폭행 대처법

현장을 누비고 있는 강력계 형사들에 따르면 최근 여성들은 성범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피해여성들은 성폭행에 대한 수치심과 주변인들의 시선을 의식, 피해사실을 숨기는 등 경찰조사에 비협조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수사협조는 물론 직접 발 벗고 범인잡기에 나서는 경우도 많다. 최근 덜미를 잡힌 상습성폭행범의 상당수가 여성들의 결정적인 활약으로 검거됐다고 형사들은 입을 모은다. 사실 ‘연약한’ 여성이 작심하고 덤벼드는 성폭행범의 기습을 막아내기란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강간범의 경우 본격적인 ‘작업’에 앞서 무지막지한 물리적 폭행을 휘두르거나 흉기를 들이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용감한 여성들은 어떤 방법을 동원해 이들을 퇴치하는 것일까. 경찰 관계자들을 통해 그들의 대담하고도 엽기적인 활약상을 들어 보았다.


“요즘 대부분의 젊은 여성들은 성범죄에 대응하는 자세가 예전과 많이 다르다. 과거에는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제는 가만히 앉아 당하지 않는다. 성범죄 사건을 수사하다 보면 지금까지 피해 여성들은 대부분 피해 다니고 숨어살았지만, 이젠 성범죄에 맞서 싸우는 쪽이 많은 것 같다.”

서울 수서경찰서 형사과 관계자의 말이다.

여권이 신장되고 성 관념이 남녀수평구조로 바뀌면서 남성은 더 이상 성에 관한한 일방적인 약탈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경찰에 따르면 여성들은 성범죄에 대해 다양한 방법으로 대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자충격기, 가스총 등을 동원해 성범죄자의 접근을 아예 차단하는 유형이 있는가 하면,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일단 접근을 허락한 다음 범인의 신원을 파악해 경찰에 신고하는 유형도 있다. 최근 여성들은 후자의 방법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흉기든 강간범 앞 침착함 유지

지난해 말 서울 북부의 한 주택가. N빌라에 거주하고 있는 김모(33·여)씨는 늦은 새벽 이상한 인기척을 듣고 잠에서 깼다. 하지만 도둑고양이 소리라고 생각한 김씨는 다시 잠에 빠져 들었다.

그러나 잠시 후 김씨는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다시 점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고 방안을 휘둘러보던 그는 질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커먼 복면을 뒤집어쓴 괴한이 그의 머리맡에서 안광을 번뜩이고 있었기 때문. 더욱 김씨를 얼어붙게 했던 것은 괴한의 손에 들려 있는 흉기였다.

괴한은 김씨가 소리를 지르려 하자 재빨리 눈앞에 칼을 들이댔다. 그리고 천천히 김씨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김씨는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지만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취소했다. 얼마 전 TV에서 강간살인사건에 관한 뉴스를 본 기억이 떠올랐다. 생명에 위험을 느낀 김씨는 어떻게 해서든 목숨부터 구해야겠다 생각하고 기지를 발휘했다. 괴한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응하기로 한 것.

김씨의 저돌적(?)인 움직임에 괴한은 오히려 김씨에게 휘둘리며 혹사당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4시간 동안 모든 힘을 소비한 괴한은 큰 대자를 그리며 이부자리에 뻗고 말았다. 김씨는 괴한이 곯아떨어진 틈을 놓치지 않고 112로 전화를 돌렸다.

경찰 조사결과 괴한은 상습 강간범으로 경찰이 쫓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추가 범행사실을 모두 부인했지만 피해여성들이 적극적으로 피해사실을 증언하는 바람에 더 이상 거짓말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피해여성의 의지가 사건 해결

이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 관계자는 “당시 피해여성인 김씨는 업소에서 일하는 이른바 ‘나가요 걸’이었다”며 “김씨가 기지를 발휘해 범인을 잡을 수 있었고 그로인해 추가 피해자의 발생을 막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이 관계자는 “아무리 직업이 남성에게 웃음을 파는 것이라 해도 흉기까지 든 괴한을 상대로 그토록 침착하게 대응하는 것은 아무나 하기 힘든 일”이라며 “범인이 흉기를 들었을 경우 자칫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기 때문에 침착하게 대응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한 여성의 집념어린 추적 끝에 강간범이 덜미를 잡힌 사례도 있다. 강남지역에 거주하는 한모(27·여)씨가 바로 그 주인공. 한씨는 자신을 강간한 남성의 특징을 여자만의 섬세한 감각으로 꼼꼼히 기억해 두었다가 이를 추적해 결국 범인을 붙잡았다. 이 사건은 지금도 당시 수사관들 사이에서 영화 같은 이야기로 회자되곤 한다.

한씨는 피해를 당하자 즉시 경찰에 알렸고, 수사가 시작되자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모두 경찰에 털어 놓았다.

이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 관계자는 “경찰 생활하면서 그런 여자는 처음 보았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꼼꼼하게 범인에 대한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며 “손목 굵기, 손 크기, 허리 굵기, 사소한 버릇 등 마치 반평생 같이 산 남편의 신체를 기억하는 듯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유사 수법 전과자 10여명을 대상으로 감별식 수사를 했는데, 이 여성은 남성들의 신체를 유심히 살피고 만져 본 후 정확히 범인을 가려냈다. 한씨의 정확함에 범인조차 혀를 내두르며 모든 것을 자백했다고 경찰은 전했다.

또 이 관계자는 “요즘엔 여성들이 성폭행이나 강간을 당했을 경우 이 사실을 더 이상 쉬쉬하지 않는다”며 “덕분에 예전보다 이런 종류의 사건을 수사하기가 한결 수월하다”고 말했다.


피해자 카페도 활성화

한편 인터넷 포털 사이트 카페 중에는 성폭행 관련 카페도 있다. 이 카페는 강간범의 유형과 대응법 그리고 피해자들의 고민 등이 주로 다뤄지고 있다. 이 카페의 회원들은 카페활동을 통해 여성고민 상담센터 등에서 얻지 못했던 심리적 만족을 얻는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회원들은 그 이유에 대해 상담원을 통해 고민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를 당한 피해자들끼리 서로의 상황과 마음을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카페의 한 회원은 “강간에 의한 정신적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며 “끔찍한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만이 피해를 줄일 수 있는 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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