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여자 프로골퍼 수십억 사기당한 내막
국내 유명 여성 프로골퍼가 전직 대통령 비자금 환전사업 빙자 사기에 휘말려 수십억 원을 날린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피해 당사자는 우리나라 최초로 미국 LPGA에서 우승한 여성 프로골퍼로, ‘한국 골프계의 맏언니’로 불리고 있는 구옥희(50)씨.
서울중앙지검 형사2부는 구씨에게 자신이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환전 사업을 맡고 있는 것처럼 속인 후, 골프장 개발을 미끼로 10억 원을 가로챈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로 일당 중 한 명인 이모(40)씨를 2일 구속기소했다.
외모 그 자체만으로 강력한 카리스마가 느껴지고, 연륜이나 경륜 면에서 정치를 잘 할 것 같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한 그가 이 같은 ‘어이없는’ 사기행각에 쉽게 넘어갔던 이유는 무엇일까. 구씨가 이씨 일당에게 10억 원이라는 거금을 사기당한 내막을 취재했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 2003년 9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검찰에 따르면 이씨 일당은 당시 구씨의 후배 골프선수인 서모씨에게 먼저 접근, “전직 대통령이 조성한 7조원대의 구권 달러를 미국에서 환전하는 ‘비밀업무’를 수행하는 공무원들과 사업을 하고 있다. 이 사업이 성공하면 10% 수수료 7,000억원을 벌 수 있다”고 속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이씨 일당은 서씨가 유명골퍼인 구씨와 친분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서씨로부터 “구씨는 해외에 체류 중인 기간이 잦다”는 얘기를 듣고, 구씨가 국내 사정에 다소 어두울 것이라고 판단, 서씨에게 구씨를 소개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로 인해 이씨 일당은 같은 해 12월 서씨의 소개로 구씨를 서울의 한 호텔에서 만나게 된다. 그들은 구씨에게 “구정권 비자금으로 경기도 남양주 지역에 골프장 개발 및 골프텔 분양을 하려고 하니 비자금 환전 보증금에 투자하라”며 귀가 솔깃한 제안을 했다.

또 구씨로부터 신뢰를 얻기 위해 자신들을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관리 극동 담당관 신분이라고 속이기도 했다.

이씨 일당은 “구권 화폐 형태의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을 관리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 구권 화폐를 쓸 수 없어 골프장 건설작업에 투자하려고 한다”는 그럴싸한 ‘거짓말’로 구씨를 현혹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으로 골프장을 건설한다는 말에 구씨가 관심을 보이자, 이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미끼를 던졌다. 이 사업에 투자를 할 경우 단기간에 고액의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다’는 구씨에게 이씨 일당은 단번에 꼬드기기 위해 “10억원을 투자하면 석달 후 17억원을 만들어주겠다”며 구체적인 액수까지 제안하기도 했다.

심지어 이들은 사전에 준비한 골프장 조감도까지 보여주며 구씨의 투자를 유도하기도 했으며, “당신이 유명한 골프선수이기 때문에 투자할 기회를 주는 것”이라며 생색까지 낸 것으로 드러나 검찰의 혀를 내두르게 했다.

이씨 일당의 철저하고 치밀한 계획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만에 하나 구씨가 의심할 것에 대비, 더욱 주도면밀한 그물망을 치기로 했다.


‘확실한 미끼’
자신들의 신분을 속인 것으로도 모자라, 누구나 들으면 솔깃할 만한 인물을 내세우기로 마음먹은 것.

이씨 일당이 구씨를 속이기 위해 끌어들인 인물은 바로 전직 대통령의 아들인 A씨. 그들은 “전직 대통령 아들도 이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며 결정적인 미끼를 던졌다. 처음부터 계획된 이들의 치밀한 사기수법에 구씨는 속아 넘어 갈 수밖에 없었다.

이들 일당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투자를 결심한 구씨는 결국 2004년 1월 15일 강남의 모 호텔 커피숍에서 이들을 만나 거액의 돈을 건네주고 말았다.

당시 구씨가 이들에게 건넨 돈은 1억 원짜리 당좌수표 10장으로 무려 10억 원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이후 구씨는 이씨 일당과 연락을 하려 했지만, 잦은 해외 일정으로 접촉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의심은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미 이들은 구씨로부터 거액의 돈을 받자마자 바로 달아난 뒤였다. 모든 것은 이들의 철저한 계획 하에 이뤄진 ‘한편의 사기극’일 뿐이었던 것이다.

서울중앙지검 형사2부 관계자는 “전직 대통령의 아들을 끌어들인 것이 구씨가 이들을 믿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 같다”며 “조사결과 이들 일당은 실제로는 전직 대통령과는 아무 연관도 없는 무직자에 불과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예나 지금이나 권력층 사기사건은 줄어들지 않고 있는 실정”이라면서 “특히 대통령 일가친척을 들먹일 때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사실 확인이 어려워 그냥 믿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고 분석했다.

한편, 이 관계자는 “조사결과 범행을 저지른 일당 중 두 사람은 내연관계로 밝혀지기도 했다”며 “이들은 골프장 사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구씨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 이 같은 사기행각을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고 덧붙였다.


#한국판 ‘나이지리아 사기단’ 기승

무엇보다 이번 사건은 지난 10여 년간 국정원이나 KOTRA가 지속적으로 주의 경고를 내렸던 일명 ‘나이지리아 사기단’의 국내 번역판이어서 더욱 충격을 주고 있다.

나이지리아 금융사기는 각종 피해사례와 경고내용을 담은 영문 책자만 수십 종이 나와 있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이들의 사기수법은 주로 나이지리아 고위급 신분을 사칭, “물품대금이나 비자금 등의 외화 반출을 도와주면 거액의 커미션을 주겠다”고 접근, 피
해자들에게 보증금 등을 요구한다. 주로 무작위 이메일이나 우편물 등을 통해 피해자에게 접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구씨를 속인 이씨 일당도 나이지리아 사기단의 포맷을 그대로 베껴 마치 자신들이 전두환·노태우 등 전대통령의 비자금을 다루는 비밀요원인 것처럼 행세했다.

국가정보원은 “지난 2005년 25건(200만 달러)의 피해가 발생한데 이어 작년에는 30건(240만 달러), 올해 초 6건(4만5,000 달러)의 피해가 보고되고 있다”면서 “해외교포와 함께 투자를 가장해 입국한 뒤 대상자를 직접 접촉하는 등 나이지리아 금융사기의 수법이 점차 지능화되고 있다”며 각별한 주의를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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