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의 우애가 SK 성장을 이끌다"

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데는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 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그 세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열정과 패기로 새 역사를 기록한 SK그룹이다. 

▲담연 최종건 회장(맨 앞 왼쪽)이 직원들과 공장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제공=SK그룹 홍보실>


경기 수원시 평동 4번지. 1953년 SK그룹의 모태인 ‘선경직물’ 공장이 있던 곳이다. 이곳은 에너지와 정보통신 양대 축을 중심으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한국경제의 버팀목으로 우뚝 선 SK그룹을 낳은 ‘산실’이다.

특히 선경직물 공장은 SK그룹 창업주인 담연 최종건 회장이 몇 안 되는 종업원과 함께 자신의 마차로 돌과 자갈을 날라 만든 ‘꿈과 땀’이 담긴 SK그룹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1962년 10월 미국 시카고대학 유학 중 부친의 갑작스런 타계로 귀국한 동생 최종헌 회장은 선경직물의 질적 변화가 필요한 시기라고 판단한 최종건 창업 회장의 권유로 경영에 참여하게 됐다. 이렇게 최종건 회장의 ‘패기’에 최종현 회장의 ‘지략’이 더해져 SK그룹은 질적 도약의 시기로 도래할 수 있었다.

1953년 3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선경직물 공장이 오늘날 매출 100조 원대의 국내 굴지 그룹으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은 한 편의 서사시와도 같다.

‘선경직물’로 출발

최종건 회장은 우리나라 재벌 기업 창업주 가운데 가장 짧은 생애를 살면서 가장 많은 업적을 이룩해 놓은 정열적인 기업가로 꼽힌다.

최종건 회장이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던 선경직물 공장에 견습기사로 입사한 것은 해방을 얼마 앞두지 않은 1944년 4월이었다. 졸업과 함께 3급 기계정비사 자격을 획득한 그에게 취직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다지 규모가 크지 않은 선경직물 공장에 입사한 것은 고향 마을에 소재하고 있다는 이유뿐만 아니라 고향땅에 직물공장이 들어서기까지 그의 선친이신 학배공의 물심양면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사업을 해보겠다는 야망을 품고 1949년 선경직물 공장을 떠났던 최종건 회장은 6·25 동란 중 잿더미로 변한 선경직물 공장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1953년 3월 최 회장은 불타버린 100여 대 직기의 부속들을 수습해 재조립하고, 파괴된 공장 건물을 복구해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같은 해 8월 정부 귀속 재산이던 선경 직물주식회사를 인수함으로써 창업의 꿈을 실현하게 됐다. 불타버린 부품을 모아 직기 4대를 재조립하고 선경직물을 재건한 것. 그는 신의와 성실이라는 무형의 자산만으로 스스로의 역사를 창조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국내 유수의 재벌 기업으로 부상

창업 초창기 헌 직기를 사다 설비를 증설하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최종건 회장은 신제품 개발에 남다른 열정을 기울였다. 직기 4대로 출범한 선경직물은 불과 5년 사이에 보유 직기 1000대를 돌파했다.

최종건 회장의 품질제일주의가 빛을 본 것은 해방 10주년 기념 전국산업박람회에서 닭표안감이 부통령상을 수상하면서부터다. 부통령상 수상업체에 지원된 300만 환의 융자는 선경직물이 주식회사로 도약하는 귀중한 재원이 됐다.

1950년대 후반에는 국내 최초로 합성 직물인 나일론과 테토론을 생산한 데 이어 1960년대에는 ‘크레폰’·‘앙고라’·‘깔깔이’·‘스카이론’ 등 각종 직물을 개발·생산해 국민의 의류생활 개선에 기여했다.

선경이 국내 유수의 재벌 기업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말. 십 수 년 각고 끝에 최종건 회장이 아세테이트 원사와 폴리에스테르 원사 공장(現 SK케미칼)을 건설한 때부터다.

선경 성장사에 커다란 디딤돌을 놓게 된 아세테이트 공장 기공식이 거행된 것은 1968년 3월 25일이었다. 그리고 3개월 뒤 또 다시 폴리에스테르 원사 공장 가공식이 열렸다.

당시 업계는 선경의 두 공장 착공을 무모한 도전으로 여겼다. 세간에서는 선경이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어려움에 처할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마저 퍼졌다. 그러나 최종건 회장의 불같은 추진력과 최종현 회장(당시 부사장)의 뛰어난 지략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기적 같은 일을 이뤄냈다.

두 공장 완공 후 최종건 회장은 섬유산업의 계열화를 위해 선경유화(DMT )와 선경석유(정제)를 설립해 화학섬유의 원료산업인 석유화학 공업 진출을 도모했다. 그러나 석유파동이 밀려오던 1973년 11월 15일 밤 9시55분, 최종건 회장은 평생을 꿈꿔온 섬유산업 수직계열화의 꿈을 동생인 최종현 회장에게 넘기고 한창 일해야 할 4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원산 메이커로 도약

최종건·종현 형제의 성격은 서로 닮은 데가 있으면서도 판이하게 달랐다. 형은 일을 저지르는 편인 데 반해 동생은 일을 꾸미고 가꾸는 편이었다. 형은 통솔력과 추진력·사교성이 월등했고, 동생은 조직력과 계획성에서 형을 능가했다. 형제는 어떤 일에서나 손발이 잘 맞았다.

1929년 11월 21일 비교적 부유한 중농 가정에서 태어난 최종현 회장은 1954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재학 중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그의 꿈은 칼럼니스트가 되거나 무역업계에 진출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위스콘신대학을 졸업하고 시카고대학 대학원에 진학해 경제학 석사과정을 이수한 뒤, 1962년 귀국길에 올라야만 했다. 형이 운영하던 선경직물이 도산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최종현 회장의 경영 참여로 최종건 회장은 생산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동생은 형이 생산해 내는 직물을 동남아 지역으로 수출하는 한편, 정부가 수출 드라이브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하는 구상무역으로 큰돈을 벌어들였다. 5000여만 원의 악성 부채를 1년 만에 털어내고 3년째 되는 해에는 직기 150대에 불과하던 직물공장이 직기 1000대 규모로 성장해 있었다.

▲ 1968년 12월 아세테이트 원사 공장 완공 후 찍은 내부 전경. <사진제공=SK그룹 홍보실>

직물 메이커였던 선경이 원산 메이커로 도약한 것은 1968년이다. 그 무렵 국내에는 크고 작은 직물공장이 800여 개나 있을 때였다. 언감생심 직물 생산업자가 원사공장 건설을 생각했다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자본 규모가 영세한 직물 생산업자로서는 누구도 원사 공장 건설을 꿈꾸는 사람이 없었다. 자금동원 능력이 있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었다.

선진 외국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해야 했고, 기계 설비를 도입하는 데 필요한 외자 동원 능력도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선경직물의 자본금은 5000만 원에 불과했다.

꿈만 같던 불가능한 일은 최종건 회장의 ‘추진력’과 최종현 회장의 ‘머리’에서 시작됐다. 선경인더스트리(현 SK케미칼)의 전신이자 국내 최초의 폴리에스테르 원사 메이커인 선경합직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 무렵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국내 외환 대출로 공장설비를 도입했으며, 공장 건설에 필요한 내자는 합작선인 일본의 ‘제인’으로부터 폴리에스테르 원사를 연불조건으로 수입해 작물을 짜고 팔아 충당했다. 선경이 여러 선발업체들을 따돌리고 거대한 섬유기업집단으로 성장한 순간이었다.

폴리에스테르 원사 제조업체인 선경합직과 아세테이트 원사 제조사 선경화직을 비롯해 직물을 생산하는 선경직물 및 완제품 생산업체인 해외섬유와 선삼섬유로 이루어진 선경그룹은 일찍이 국내 기업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수직적 기업 결합을 선보였다.

동생 최종현 시대 개막

최종현 회장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선경그룹의 경영대권을 떠맡은 것은 제1차 석유파동의 한파가 불어 닥친 1973년 12월이다. 선경 창립자이자 맏형인 최종건 회장이 급환으로 타계하면서다.

최종건 회장이 작고하자 사회 각계의 이목과 관심은 자연스레 선경그룹 총수 자리를 승계한 최종현 회장에게로 집중됐다. 평소 형의 그늘 아래서 밖으로 드러나기를 좋아하지 않았던 최종현 회장의 경영능력을 외부에서는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회사 안에서도 새 총수를 의심하는 눈초리가 매서웠다. 취임 당시 최종현 회장은 안팎의 시련을 맞고 있었던 셈. 밖으로는 석유파동이 몰고 온 세계경제의 불황을 타개해야 했다.

‘수성은 창업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다. 창업은 남달리 특출한 용기가 있고 과감한 결단력이 있으면 가능하지만 수성을 위해서는 창업기반을 다져나갈 만한 지혜와 인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를 절감한 최종현 회장은 선경의 경영방식을 서서히 바꾸기 시작했다. 그룹 계열사 경영권을 각사 사장에게 위임하는 결단을 내렸고 마음속으로 구상 중이던 ‘석유에서 섬유까지’의 수직계열화를 대내외에 천명하면서 과감한 도전기에 접어들었다.

어려운 상황 속에 최종현 회장은 1974년 전년대비 71% 증가한 8600만 달러어치의 원사를 수출하고 1975년에는 200억 원을 투입해 울산에 일산 100t 규모의 폴리에스테르 원사공장을 건설하면서 국내 전체 화학섬유 생산능력의 34%를 점유하게 됐다. 국내 섬유업계 제1인자 자리를 명실상부하게 지켜낸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박수진 기자>
<출처=재계 100년-미래경영 3.0 창업주 DNA서 찾는다, KFI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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