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자, 참고인 및 증인으로 조사를 받은 사람만 1만 8,000명, 연인원 180만명의 수사인력 동원, 10만명 이상의 베테랑 형사 투입, 7억원이 넘는 수사 활동비, 현장에 투입된 기자 수만 500여명, 5,000만원의 현상금, 범죄전문가, 사회학자, 정신분석학자, 무당, 사립탐정까지 동원…. 지난 86년 9월15일부터 91년 4월3일까지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일대 반경 5km안에서 부녀자 10명이 성폭행 당한 뒤 살해된 일명 ‘화성연쇄살인사건’이 세운 기록들이다. ‘세계 100대 살인사건’에 이름을 올린 이 사건은 그 기록만으로도 우리사회에 일으킨 파장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세계범죄사에 기록된 이 희대의 사건은 여전히 미궁에 빠진 채 이달 14일이면 9차사건 공소시효도 막을 내린다.

“1주일만 버티면 범인승리”

DNA분석결과 9차 사건과 10차 사건의 범인은 다른 사람이었다. 즉 9차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화성사건의 진범을 잡을 확률은 사실상 멀어지는 셈이다. 경찰을 더욱 맥빠지게 하는 것은 1주일 후면 진범이 나타나도 처벌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간 쏟은 경찰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화성 9차사건의 피살자는 불과 13살로 화성사건의 희생자중 가장 어렸다. 1990년 11월 15일. 경기도 화성 A중학교 1학년에 재학중이던 K양은 병점5리 야산에서 처참한 시체로 발견됐다.

시신은 눈뜨고 볼 수 없을만큼 참혹했다. 입은 브래지어로 재갈이 물려져있었으며 팔다리는 스타킹으로 결박된 채 상체가 구부러진 상태였는데, 강간의 흔적이 역력한 음부 주위는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음부에는 볼펜과 수저, 포크 등이 꽂혀있었으며 가슴은 무려 19군데나 난자되어 있었다. 소녀는 ‘악마’에게 단단히 결박당한 채 찢어질 듯한 육체적 고통과 죽음의 공포를 온몸으로 느끼며 죽어갔을 터였다. 그러나 공소시효를 불과 일주일 앞둔 지금까지도 밝혀진 것은 범인의 혈액형이 B형이라는 것과 현재 갓 40세를 넘겼다는 추측뿐이다.

루머만 있을뿐… 범인은 없다

‘비오는 날 빨간 옷을 입지 말라’는 유행어를 남긴 이 사건은 온 국민을 충격과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는 동시에 수많은 루머들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사상 최대의 수사인력이 동원됐음에도 범인이 잡히지 않자 범인이 범행 후 일부러 교도소를 은신처로 삼아 숨어드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까지 나왔다. 또 범인은 공무원이나 기자 등 조사대상에서 제외되는 신분이거나, 경찰일지도 모른다는 분석도 나왔다. 또 모든 수사 진행 상황을 현장에서 보면서 사태파악이 가능한 주민, 혹은 성도착증을 지닌 정신병자라는 주장도 있었다.

한편 남편과 불화를 겪은 주부가 ‘남편이 화성사건의 범인’이라며 거짓 신고하거나, 재소자가 다른 수감자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내가 화성 범인’이라고 주장하는 등 웃지못할 에피소드들도 쏟아져 나왔다. 또 화성사건을 소재로 한 연극 ‘날 보러와요’는 범인을 잡고자 하는 수사관들의 심리를 극명하게 보여줬으며, 15대 총선에서는 ‘살인으로 더럽혀진 군명(郡名)을 바꾸겠다’는 이색공약까지 등장했다.

다시 시작된 악몽

작년 10월 27일 태안읍 일대에서 발생한 여대생 노모(당시 21세)양 실종사건은 한동안 잊혀졌던 화성사건의 악몽을 일깨우는 단초를 제공했다. 특히 노양이 실종 46일만에 정남면 야산에서 부패된 사체로 발견됨에 따라 국민은 또 한번 ‘얼굴없는 악마’의 공포에 떨어야했다. 당시 경찰은 인권침해의 비난을 무릅쓰고 불량배 및 전과자, 택시기사 등 화성 지역 성인 남자 4,600여명의 DNA 샘플을 채취, 국과수로 감정을 의뢰하기도 했으나, 지금까지도 사건은 오리무중이다.당시 기자가 현장을 방문했을 때 안녕리 태안지구대 관계자는 화성사건과의 무관함을 강조하며 태연한 척했지만 무척 불편한 표정이었다. 그는 “이 일대에서 사건만 발생하면 화성사건과 연관짓는 이유가 뭔가. 과민반응 보이지 말라”며 불평을 쏟아냈다.

또 기자의 질문에 대해서도 “우리도 모르는 수사진척 사항을 기자들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라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주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살인범때문이 아니라, 언론의 ‘횡포’ 때문에 못살겠다. 여기도 사람사는 곳”이라며 불만을 나타냈다. 태안읍 인근 상점 주인 A(55)씨는 “용의선상에서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평생을 여기서 살아온 주민으로서 지독한 스트레스였다”고 당시의 흉흉한 분위기를 전했다.그간 그들이 치른 곤욕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이 주민들의 말이다. 1986년 9월 19일 71세의 노파가 하의가 벗겨진 채 살해된 사건이 발생하기 전만해도 화성은 평범한 시골마을이었다.

그러나 연달아 터지는 사건으로 인해 서해안 시대의 요충지로 각광받던 마을은 저녁 8시만 돼도 개미 한 마리 찾아보기 힘든 ‘유령마을’로 변해갔다. 전과자와 정신병자, 알코올중독자들은 더없는 수난을 당했다.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이들은 일순위로 불려갔으며, 단순한 시비만 붙어도 화성사건 관련 조사를 받기 일쑤였다. 또 범인이 보여준 변태성욕 성향 때문에 부랑인은 물론, 독신자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등 그야말로 화성주민들은 누구나 용의선상에 오를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된 것. “특히 성범죄와 연관된 이들은 체모를 뽑히고 혈액형 검사를 다시 받는가하면, ‘화성사건과 연관 없음’이라는 꼬리표가 붙는 일도 있었다”는 경찰 관계자의 말은 당시 분위기를 대변해주고 있다.

세계 1백대 살인사건 올라

한편 화성살인 사건은 경찰의 명예와도 직결된 것이었다. 부임하는 경기경찰청장들마다 사건해결을 최대 임무로 내걸었으나, 그들에게서 나온 말은 하나같이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는 내용뿐이었다. 직위해제 등의 징계조치도 줄을 이었다. 베테랑수사관인 최중락 전서울시경강력과장과 양운석경감 등도 수사팀에 합류했지만 두손 두발을 들었으며 내로라 하는 경찰들이 줄줄이 옷을 벗었다. 밤낮없는 강행군으로 쓰러지거나 끝내 반신불수가 된 경찰도 생겨났다.그렇다면 현재 수사 분위기는 어떨까. 수사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다.

2일 오전 화성경찰서 관계자는 “수사본부도 있고 수사도 진행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수사진행 사항에 대해서는 극도로 말을 아끼며 언론을 경계했다. 제보도 끊겼으며 특별한 진척사항이 없다는 이유때문이었다. 한때는 동네 꼬마의 말 한마디에도 0.001%의 희망을 걸고 매달렸지만 현재 경찰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또 노양 사건마저 1년이 넘도록 단서조차 잡지 못하자 경찰은 벼랑끝까지 몰린 입장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궁금하냐”는 경찰 관계자의 말은 언론에 오르기조차 거부하는 뉘앙스를 풍겼다.

특히 공소시효 만료를 코앞에 둔 시점에서 경찰관계자는 더욱 착잡한 심정을 드러냈다. 사실상 수사에 더 이상 비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게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수사가 진행중인만큼 뭐라 확답할 수 없다”며 난감해했다. 그러나 그는 “공소시효가 만료된다해도 수사는 계속될 겁니다. 끝까지 해봐야죠. 처벌은 못한다해도 범인은 잡아야 할 것 아닙니까”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범인을 잡고 싶다”던 형사들의 절규를 뒤로 하고 범인은 지금도 웃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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