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을 깨는 제보 “따르르르릉”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8월초. 서울지방경찰청 강력2팀 사무실에는 김동욱 팀장을 비롯한 7명의 형사들이 이틀째 야간근무 중이었다. 계속되는 잠복 및 야근으로 형사들이 슬슬 지쳐갈 때쯤 적막을 깨는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저 조만간 엄청난 규모의 위조수표가 유통될 겁니다.” 제보자는 놀랍게도 위조수표를 전문적으로 유통시키는 일을 하는 브로커 박모씨. 민족 최대의 명절을 앞두고 가뜩이나 금융사고가 일어나지 않을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경찰에게 박씨의 첩보는 실로 충격적이었다. “액수가 얼마나 되죠?” “딱 천장이에요 그것도 100만원짜리 자기앞수표로” 경찰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씨의 말대로라면 10억원이라는 위조수표가 시중에 유통되는 엄청난 금융사고가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일종의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위조수표 사건을 맡아왔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심각했다. 박씨의 첩보를 입수한 경찰은 김동욱 팀장의 지휘하에 긴급회의에 들어갔다. 범인들을 잡을 방법은 단 하나, 브로커 박씨를 통하는 길 밖에 없었다. 경찰에 따르면 위조수표는 소위 말하는 ‘꾼’들끼리만 거래된다는 특징이 있다. 그들은 섣불리 위조수표를 유통시키지도 않을 뿐더러, 그동안 거래를 해왔던 이들끼리만 신중히 거래를 하려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믿을만한 브로커가 개입되지 않는 한, 일반인의 경우 이들과의 접촉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들의 이러한 특성을 꿰뚫고 있는 김길수 형사 등은 작전에 들어갔다. 방법은 수표 구매자로 위장하는 것. 진짜 구매자가 나타나기전에 ‘거래’를 빌미로 한시라도 빨리 범인들과 접촉하는 것이 시급했다. 브로커 박씨는 범인들에게 “수표를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속였다.

박씨가 경찰과 손을 잡은 것을 알리없는 범인들은 순순히 거래에 응했다. 때마침 추석이 불과 한달도 남지 않은터라 위조수표를 유통시키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범인들은 100만원권 위조수표 600매를 현금 1억 2,000만원에 팔겠다고 했고 구매자로 위장한 경찰은 ‘당연히’ 그들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였다. 약속한 날짜인 8월 23일 오후 2시. 용산구 한강로2가의 한 빌딩 지하에는 4명의 중년 남성들이 초조하게 수표 구매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 이들을 지켜보던 경찰은 약속한 수표 구매자로 위장, 접근해 범인들이 가지고 온 수표를 면밀히 확인하는 등 침착하게 ‘연기’를 해나갔다. 거래는 원만히 성사되는 듯 했다. 수표가방을 건넨 일당들은 약속한 현금 1억 2,000만원을 요구했다. 그때였다. ‘철커덕!’ 순식간의 일이었다. 격렬한 격투 끝에 경찰은 현장에서 일당 중 두명을 현행범으로 체포하는 한편, 달아난 공범들을 열흘간의 추적수사 끝에 추가로 검거했다.

# “10억 위조수표 내가 밀고했다”


경찰에 따르면 교도소 선후배 사이인 노모(52)씨와 조모(43)씨 등 4명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지난 8월 초. 사기 등으로 ‘큰집’을 제집 드나들 듯 하던 이들은 출소 후 도박판을 전전하던 중 도박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10억원어치의 위조수표를 만들어 현금으로 교환하려는 공모를 한다. 이들은 곧바로 컴퓨터와 스캐너, 컬러프린터 등을 이용해 100만원짜리 수표 1,000장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한 김씨는 8월 10일 완벽히 만들어진 수표를 노씨 일당에게 넘겼다. 위조수표를 건네받은 일당들은 평소 친분이 있던 브로커 박씨를 통해 위조수표를 구매할 마땅한 사람을 물색하고 있었다. 수년간 브로커 일을 해온 탓에 이미 그쪽 바닥에서는 유명한 박씨는 이번에도 별 거리낌없이 일당들과 거래를 성사시키려 했다.

그러나 수표를 본 순간 박씨의 마음은 변했다. 기껏해야 수백만원일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유통시키기에는 규모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규모가 크면 리스크도 큰 법. 100만원권 수표 1,000장은 브로커 박씨에게도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다. 거래를 연결시켜주는 사례비가 탐이 나서 위험한 거래를 알선했다가는 일이 잘못될 경우, 덩달아 쇠고랑을 찰 수도 있는 일이었다. 또 위조수표가 함부로 시중에 나돌 경우 경찰의 압박수사로 인해 수사망이 좁혀질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기 때문에 브로커로서도 좋을리 없었다.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 브로커 박씨는 경찰에 밀고를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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