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부터 정치 얘기는 안하려고 했는데 지금 우리사회의 화두가 ‘새정치’에 관한 사항이고 보니 또 정치 얘기를 할 수 밖에 없게 됐다. 올해 국가 예산 계수조정 소위가 열린 여의도 렉싱턴호텔의 한 객실 앞으로 여야의원들의 지역구 민원 예산이 담긴 ‘민원 쪽지’가 31일 자정까지 쇄도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어느 곳의 예산은 늘고 어느 곳은 줄고를 반복했다는 소식이다.


여야가 지난 대선기간동안 경쟁적으로 외쳐댄 정치쇄신, 특권 내려놓기, 국회선진화방안이 대선 끝나고 불과 13일 만에 침몰하고 말았다.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의 지역구가 있는 인천은 2014년 인천 아시아경기대회 주경기장 건립에 615억 원을 더 받았고, 이한구 원내대표는 지역사업의 타당성조사 사업비로 182억 원을 늘렸다. 민주당의 박지원 전 원내대표는 목포대 천일염연구센타 예산과 목포대교 폐쇄회로 비용을 늘렸고 예결위 최재성 민주당 간사와 박기춘 새 원내대표 지역구인 남양주 관련예산 100억 원 이상이 늘었다.


새누리당 장윤석 예결위원장과 김학용 간사도 지역구 예산을 각각 50억 원씩 넘게 늘렸다. 이런 넣고 빼기의 와중에서 사업비가 뭉텅이로 빠진 곳이 놀랍게 방위사업비로 드러났다. 차세대 전투기 도입계획에 차질이 불가피해졌고, 그 외의 방위사업비 4000여억 원이 줄었다. 이처럼 턱없이 ‘칼질’ 당한 예산의 빈자리는 지역 민원성 예산으로 채워졌다. 전혀 달라지지 않은 종전대로의 국회 모습이었다.
오히려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취약계층 관련 예산이 줄어든 항목이 눈에 띄어 정작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을 위한 예산은 빼버렸다는 비난까지 일었다. 톡톡히 쓴맛을 본 민주당이 공약, 복지 예산에 집중키로 했다는 말도 허구였다. 민주당 관련인사는 “일부 의원이 합의를 깨고 강경하게 나오면서 의총 분위기가 휩쓸렸다”며 “선명성 경쟁으로 선거 때 쓴맛을 봤는데 똑같은 문제가 되풀이 되고 있다”고 했다.


지역구의원들의 이처럼 변화하지 않는 작태는 지역구민들의 인기에 영합해서 정치생명력을 높이고 다선의원으로 성장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이렇게 지역구의원들의 온 신경이 이 계수조정소위에 쏠려있을 때, 한켠에선 새누리당 대구 출신 유승민 의원의 쓴 소리가 해당지역 한 신문에 터져 나왔다. 유 의원은 윤창중 인수위 대변인이 너무 ‘극우’라며 당장 자진 사퇴하는 게 맞다는 주장을 폈다. 그는 또 김용준 인수위원장을 “무색무취하다”고 말하고 인수위를 너무 친정 체제로 끌고 가면 잘못된 방향으로 가더라도 충언을 할 참모가 없게 된다고 비판했다.


그가 윤창중 대변인을 극우로 지목한데 대해 윤 대변인이 그렇다고 단언할 근거는 사실 없다. 막말 논란이 일어났을 뿐이다. 또 법 밖에 모른다는 김용준 위원장을 ‘무색무취’로 표현한 것도 백퍼센트 공감하는 국민이 압도적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럼에도 유 의원이 돋보일 수 있는 것은 그가 누구에게도 쓴 소리를 마다않는 소신 있고 정의감 있는 정치인으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정치인의 성장과정이 이같이 두 가지다. 지도자의 눈에 들고 지역민들 인기 얻어 2인자까지 오른 사람이 있다. 소신과 배짱 있는 언행, 그리고 신념으로 계보를 거느리며 최고 정점에 오른 우리 정치사가 또한 분명하다. 그러나 일어설 용기는 미리 일어서기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일어서 주기를 바랄 때여야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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